【1900년 ~ 1940년】. 반복창(潘福昌). 일제 강점기 시절 미두 시장에서 활동했던 투자자. 당시 미두 시장에서 부를 축적했던 아카리의 집으로 12세 나이로 반복창은 들어 와 하인으로 일하였고, 2년 후 아라키의 중매점 요비코가 되었다. 1918년 19살때에 반복창은 중매점의 시장대리인으로 발탁된다. 그 뒤 반복창은 쌀 값이 오를 것이라는 예측으로 미두취인소에 증거금을 내지 않고 180만원 어치의 쌀을 매수했으나, 예측은 빗나간다. 더는 빚을 감당할 수 없던 아라키는 인천 미두시장에서 부도를 낸 후 일본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아라키의 신용을 믿고 거래했던 미두시장도 타격을 입어 폐쇄하게 된다. 석 달 후 조선총독부는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늘려 미두시장을 다시 개장했고, 다시 미두꾼들이 몰려들었고 반복창도 자신의 재산 500원 가량으로 미두시장에 뛰어든다. 반복창은 미두 중매점에서 쌓은 노하우로 인해 승승장구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반복창이 미두로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를 '미두신'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미두꾼들이 생겨났다. 1921년 4월, 반복창은 당대 최고의 미녀였던 김후동과 조선 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미두 시세가 자꾸 빗나가 손해를 보게 되어 불과 2년만에 전재산을 탕진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사기사건에 휘말리는등 시련을 겪어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서른살의 나이로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에 이른다. 몰락 후에도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푼돈으로 쌀 값의 등락을 알아 맞추는 합백에 빠져 살다가 정신마저 이상해져 10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다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