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고종 7) ~ 1917년】. 이상설(李相卨). 헤이그특사. 어려서 이범세·여규형·이시영·이회영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헐버트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여러 분야의 서양 학문 등도 공부하였다.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하였고, 1904년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소장을 올렸고 이 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는 소장을 올렸다. 1906년 봄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미국에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였고, 1909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 그곳에서 땅 45방(方)을 사서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고종에게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소장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1911년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고,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고,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었다.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