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22-R1-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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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yu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18일 (일) 21:29 판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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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황실의 마지막 공간 낙선재(樂善齋) 》 MIT 공대를 졸업한 수재 이구(李玖),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과 인연을 맺다

Story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2남으로 태어난 이구(李玖)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손이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자, 영친왕 부부는 미군정 측에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한다. 1947년 10월 18일 왕족들은 신적강하(臣籍降下)를 당하게 되고 이로써 이은과 이방자라는 평민이 된 영친왕 부부는 일본 정부와의 모든 관계가 끊겼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승만 정부에게도 냉대를 받는다. [1]

이러한 상황에서 당장 생활비부터 걱정해야 했던 이구(李玖)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보이스카우트 리더로 활동하여 미군사령부 피셔 씨를 잘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7세부터 미국인 상점의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였다. 미군 기관지인 스타즈 앤드 스트라이프즈(Stars and Stripes) 신문에서 「한국의 전 황태자 이왕의 아들이 미국인 상점의 점원이 되었다」고 사진과 함께 커다랗게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구는 부친인 영친왕에게 영어를 배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영친왕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2]

이구(李玖)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상점 주인 윌리엄 씨의 호의로 미국에 갈 뱃삯을 모았고, 피셔의 주선으로 친구인 히로아끼(博明)와 함께 미국 켄터키주 댄빌에 위치한 센트럴 칼리지(Centre College)로 유학을 가게 된다. 1950년 8월 3일 출항을 앞두고 준비를 하던 중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구는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3]

1953년 9월, 이구는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건축과에 입학하여 뉴욕에 살고 있는 가미데 마사다까(上出雅孝) 목사의 도움을 받아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4] 1958년 영친왕 부부는 아들 이구를 보기 위해 뉴욕으로 잠시 건너가게 되는데, 이 때 이구는 자신보다 1살 연상이며, 독일계 미국인을 양친으로 모신 중류 가정의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줄리아 멀록은 미대를 졸업하고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다가 이구가 다니는 건축회사에서 만나 서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렇게 1958년 5월에 이구와 줄리아 멀록은 정식으로 약혼한다.[5]

대학을 졸업한 뒤 이구는 뉴욕 아이엠페이(IMPEI) 건축사무소에 입사하고 1959년 10월 25일, 뉴욕에서 줄리아 멀록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1960년 겨울부터 1961년 5월까지 하와이대학 동서센터의 건축일로 이구 부부는 하와이에서 체류한다. 1963년, 이구 부부는 1964년 5월에 함께 동경으로 갈 것을 계획한다. 로스앤젤레스의 비버리힐즈 도시계획의 일이 그 즈음 일단락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3년 5월 7일, 영친왕 이은의 뇌일혈 병세가 악화되고 5월 15일, 이구 부부는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부친 영친왕을 산오(山王) 병원에 입원시킨다. 1963년 6월 15일, 이구와 줄리아 멀록은 최초로 모국인 한국 땅을 밟게 되고, 황실 친족과 정부 관계 인사, 종묘 참배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5일 만에 동경(東京)으로 돌아온다. 이후 7월 2일, 이구 부부는 미국으로 잠시 돌아간다.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한국으로 귀국하자 이구 부부도 한국으로 와서 지내게 된다. 따뜻한 인정에 굶주린 동양의 청년에게 줄리아는 정신적·물질적으로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었다고 이방자 여사는 회고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귀국하자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조국으로 돌아온 이상 이구(李玖)라는 사람은 황세손이고 전주 이씨 대종손이므로 한국 여성과 결혼해서 종손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이 뿐만 아니라, 제사만 해도 전국의 선조 묘(墓), 원(園), 단(壇)을 찾아다니며 1주일에 한 번씩 지내야 했다. 첫해에 종묘대례를 지낼 때는 조상들께 일일이 국궁사배(鞠躬四拜)를 해야 하므로 절을 천 몇백 번씩 하느라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고 며칠을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6]

이러한 와중에도 이구(李玖)는 고국의 발전에 보탬이 되는 시민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공대와 연세대에 나가 건축 강의를 하고, 건축 설계사로 베트남·괌·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나가 건설 용역을 맡아 하였다. 또 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곳의 수공예품을 수집해와서 우리나라의 것과 비교·개발하여 수출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도 하였다. 건설부의 지원을 받아 속리산 국립공원을 건설하고, 명휘원도 설계하였다. 1972년에는 항공 측량 회사인 신한항공을 차렸다. 그러나 이런 의욕적인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물 위에 떠도는 기름같이 소외감을 느껴야만 했는데,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그를 사람들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거나 어쩌다 사소한 실수를 해도 손가락질 받는 황세손이라는 굴레를 씌우려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워낙 돈 계산에 밝지 못하고 경영보다는 기술적인 면에 신경을 쓰다 보니 돈을 떼이거나 사기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사업이 자꾸만 실패로 돌아갔고 귀국하면서부터 말이 많던 줄리아와의 사이마저 소원해지게 되어 이구 부부는 1974년에 별거에 들어가게 된다. 1979년, 이구가 회장을 맡고 있던 신한항공이 부도를 내고 채권자들이 몰려 들었고, 이구는 좌절과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1982년에는 줄리아멀록과도 정식 이혼 절차를 밟는다. [7] 2005년 7월 16일, 이구는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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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1-08C Story Episode MIT 공대를 졸업한 수재 이구(李玖),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과 인연을 맺다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1-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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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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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Daehan Imperial Household) 회은황태손(懷慇皇太孫 李玖, 1931~2005) 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05.php
참고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Daehan Imperial Household) 회은황태손비(Julia Mullock, 1928~2017) 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05_02.php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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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1.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18쪽.
  2.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19쪽 참조.
  3. 김을환, 『人間 李垠』, 한국일보사, 1971, 227-233쪽 참조.
  4.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37쪽.
  5.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41쪽 참고.
  6.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90쪽.
  7. 이혼 후에도 줄리아 멀록은 “한국이 나의 시집이므로 한국에서 살겠다.”고 선언한 뒤 신반포에서 의류·완구·실내 장식품 등을 만들어 생활하며 불우한 아이들을 데려다 기술을 가르치는 등 이방자 여사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90-291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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