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은 강신(降神)하고, 축은 신명(神明)에게 성의를 통하게 하는 물건이므로 신성하게 여겼다. 제사에서 분향은 신관례의 하나이다. 신(晨)은 시간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새벽, 곧 장차 날이 밝아오려는 때이다. 개원례의 종묘 제향에 신관 절차가 있는데, 그 시각을 미명삼각(未明三刻)이라 하였다. 이때를 신이라 한 까닭에, 신관이라 이름 하였다. 송나라에서는 제사 시작 시각을 축초(丑初) 1각이라 하여, 조선에서는 이를 따랐으나 명칭은 개원례의 그것을 따라 신관이라 한 것이다. 관(祼)이라는 것은 울창주를 땅에 붓는 것이다. 붓는다는 실제의 의미에서는 관(灌)이겠으나, 강신의 예의 의미에서 관(祼)이라 쓴 것이다.
따라서 신관례는 강신례라고도 한다. 곧 신령이 제사 드리는 자리에 내려오시라는 청원으로 행하는 예절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신령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마광은 “울창주를 땅에 부어 냄새가 음(陰)으로 연천(淵泉)에 도달하게 하고, 쑥에 기장을 합해 냄새가 양(陽)으로 장옥(牆屋)에 도달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널리 신령을 구하려는 까닭이다. 지금 이러한 예는 사민(士民)의 집에서 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분향하고 술을 땅에 붓는 것으로 대신한다” 하였다. 예기 「교특생」에서 인용한 이 말을 통해 보면, 분향도 신령을 구하는 강신의 하나이다. 이는 양으로 혼령을 구하는 것이며, 술은 음으로 육신을 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혼령과 육신이 각각 음양의 본래의 자리, 곧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향은 친행의 경우에 침향을 사용하였다. 섭사 때에는 자단향(紫檀香)이었다. 이 향을 담당한 정부기관은 향실이었다. 궁궐에서 전달해준 향축은 종묘의 정문인 묘문(廟門)에 들어서는 정로를 거쳐 향대청으로 향했다. 정로는 그전에는 전석을 깔지 않았던 모양이다. 향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이를 국왕이 친히 전하는 것으로 국조속오례의에 해당 의주를 수록하였다. 그 이전인 영조 16년에는 묘문으로부터 종묘 전각의 앞과 뒤까지 정로에 전석(磚石)을 깔아서 협로와 구별하고 향축은 정로를 거치는 것으로 정식을 삼도록 하였다.
술은 본래 5종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오제(五齊)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이나 대한제국에서는 그중 2제, 곧 예제와 앙제만을 사용하였다. 예제는 단술이다. 앙제는 아주 엷고 푸른 빛깔이 나는 조금 맑은 술이다.
선초에는 내시별감 한 사람과 교서관 관원 한 사람이 향과 축문을 담당하였다. 그러니까 향의 전담은 내시별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세종 22년 5월에 향실 별감別監은 내시 중에서 문리文理가 밝게 통한 여섯 사람을 가리어 정원을 삼아서, 서로 교대해가면서 근무토록 하였다. 향 관련 업무가 대폭 늘어났는지, 그 담당자가 한 명에서 6명으로 증가하였다.
향실은 교서관 소속의 관사이며, 재계齋戒하는 신소神所라 하여 매우 중시하였다. 그 역할은 교서관에서 파견된 관원이 축문의 작성 등 축문을 담당하였으며, 내시별감이 향을 담당하였다. 향실 관원은 승지의 감독하에 향을 향합香盒에 담아 봉함하였다. 향축을 가지고 승정원에 가서 싸던 것을 향실에 싸도록 하였다. 언제부턴가는 헌관이 마주앉아 함께 하도록 하였다.
향실의 위치는 경복궁의 경우, 성종 12년의 기록에 홍문관 뒤에 있다고 하였다. 성종 25년에는 향실이 옛날 서연의 대청 곁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옛날 서연청 북쪽편에다 옮겨 설치토록 하였다. 또 연산군 10년에는 인정전의 동․서랑의 처마 밑에 담을 쌓고서 약방과 향실․도총부를 옮겨 배설하라고 하였다. 향실의 구조는 중종 7년의 기사를 보면, 위의 세 칸은 시렁을 매달아 향축을 봉안하고 아래의 두 칸은 관원들의 처소로 만들었다. 향은 자단향을 사용하였으나, 영조 7년에 친전향에는 사체가 자별하니 자단향이 아니라 침향을 봉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친행의 경우에는 침향沈香을 사용하나, 섭사 때에는 자단향紫檀香이다. 향실에서는 백단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빠트릴 수 없는 향을 영녕전 제11실에 빠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담당자가 그 일로 인해 문책을 당하기도 하였다.
술은 본래 5종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오제五齊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이나 대한제국에서는 그중 2제, 곧 예제와 앙제만을 사용하였다. 예제는 단술이다. 주례 「천관天官」을 보면, “주정酒正은 술의 정령을 관장하고 (중략) 오제의 이름을 나누는데, 범제․예제․앙제․제제․침제라고 한다” 하고, 그 주에서 “예는 체와 같다. 술이 익었는데 즙과 찌꺼기가 서로 섞여 있다” 하였으며, 또 “예제 이상은 더욱 탁하여 걸러서 따르는 것이고, 앙제 이하는 조금 맑다”고 하였다. 설문해자 14편에서는 “예는 하룻밤을 묵혀서 익힌 것”이라 하였다. 탁한 감주甘酒라 하겠다. 앙제는 아주 엷고 푸른 빛깔이 나는 조금 맑은 술이다. 주례 천관, 주정酒正의 주注에, “앙은 옹과 같다. 술이 익었는데 옹옹연하여 아주 엷은 푸른색이다”라고 하였다. ‘제’는 제사 때에만 양조하여 사용하므로 그 수량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현주는 검은 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물이다. 의례 「사관례」에서 현주는 왼쪽에 있다고 한 글의 정현의 주에, ‘현주는 신선한 물이다. 지금 사용하지 않더라도 진설한다면 옛날을 잊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이에 따라 현주는 준소상의 왼쪽에 놓았으며, 그것은 고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태고적에 술 대신에 물을 사용한 소박함과 근본을 잊지 않았다는 말이다.
영조가 동왕 12년 경덕궁으로 이어할 때, 파자전교 앞에서 의궤채여를 받들고 오던 향실 관원을 마주쳤다. 영조는 연에서 내려 앞서 출발하라고 명하자, 신하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영수각의 어첩御帖에 배례한 자신인데, 향실과 축식이 어찌 어첩과 차이가 있겠냐면서 천승의 존엄으로도 낮추고 굽히는 곳이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고 하여, 향실 관원을 먼저 보냈다. 예제사회에서 향축의 중요성을 다시금 각인시켜주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