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종묘제도는 제후오묘가 적용되었다. 예치를 국가의 운영수단으로 채택한 조선에서 동아시아 전통의 사당제도를 수용한 것이다. 그것이 제후오묘와 천자칠묘이다. 제후는 시조인 태조의 사당을 북쪽의 중심에 남향으로 두고 좌우로 둘씩의 사당을 설치하였다. 좌우의 사묘는 곧 종자의 사대(四代)를 말한다. 이는 좌소우목(左昭右穆)의 원칙에 입각하여 봉안된 것인데, 이를 소목제라고 한다. 사당제도는 천자를 정점으로 신분별 세대수의 차등을 두었다.
그런데 종묘의 준공기사를 보면, 대묘(大廟)의 대실은 7칸이며 동당이실(同堂異室)이고 안에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이 각각 2칸씩이라 하였다. 이 기사만 놓고 보면 언뜻 이해가 가질 않는 측면이 있다. 제후오묘의 준칙에 따라 건설되었다면서 대실 7칸이라니, 언뜻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석실 5칸이다. 석실에 대한 언급은 이 기사 외에는 이후로 전혀 없다.
완공기사 전후의 기록을 보면, 제후오묘에 대한 인식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조의 즉위교서에서 이미 이를 제도로 삼을 것을 천명하였으며, 공정왕의 부묘 논의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공정왕을 부묘하게 되면 6실이 되므로 이는 제후오묘의 예법에 어긋난다는 원칙론을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또 예기 「왕제」에서의 소목제에 의거한 제후오묘를 언급한 것이라든가, 추존된 사대조의 신주를 조천하여 능서(陵署)에서 제사지내고 그래야 제후오묘에 합치된다는 안을 제시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오묘는 종묘에서는 석실이었다. 석실은 종석(宗祏)이라고도 한다. 종석은 종묘 안에 신주를 보관하는 석실이라 하였지만, 종묘의 석실이 신주 보관함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석실은 신실의 용도로 건설된 것이며, 좌실은 조묘(祧廟)의 기능을 하는 신실이며, 우실은 제기고이다. 이 같은 형식은 사당의 조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제후오묘가 사가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로 나타났다. 한 종족에서 시조묘는 대종(大宗)에서 불천위의 별묘를 두지만, 소종(小宗)에서는 고조까지의 신주를 봉안토록 한 것이다. 사대를 넘어가면 친함이 다했다고 해서 친진(親盡)이라 하고, 해당 신주를 묘소 근처에 매안하였다.
“천자칠묘는 삼소삼목과 태조의 사당으로서 일곱이 되며, 제후오묘는 이소이목과 태조의 사당으로서 다섯이 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천자와 제후는 공히 태조를 모시고, 천자는 칠묘, 제후는 오묘의 종묘를 두었다. 이소이목은 태조의 사당을 중심으로 왼편에 있는 이세二世, 사세四世의 사당인 두 소昭와, 오른편에 있는 삼세三世, 오세五世의 사당인 두 목穆을 이른다. 따라서 이러한 배치는 부소자목父昭子穆이 되어, 소묘昭廟에는 종자의 조부와 고조부, 목묘에는 부와 증조부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즉 소목에 입각한 사당의 배치는 조부와 고조부가 한 열이 되고 부와 증조부가 한 열이 된다.
이 절차는 가례에서의 부祔와 유사하다. 부제는 졸곡卒哭 다음날에 행한다. 소목제가 적용된 사당과는 달리, 가례에서의 부제는 동당이실同堂異室의 사당에서 상주의 부父를 합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아뢰는 의절이다. 이때 모시는 신주는 망자의 조부모이다. 따라서 사당의 구조는 바뀌었지만, 사당에 들여 합사함을 고하는 의례는 소목제의 유제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이 의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망자의 신주를 감실에 모시는 것은 아니다. 주인이 상을 벗지 않았으므로 부제가 끝난 후에 다시 영좌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례의 부제는 소목제의 전통에 따르기는 하되, 입묘入廟와 합사를 조부모에게 고유하는 단계에서 그치고, 신주의 봉안은 사당구조의 변화에 따라 고위考位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