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확의 여자 형제인 한씨(?~1424)는 1417년(태종17년) 명 성조(영락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황하신의 딸 황씨와 함께 명나라로 갔다. 한씨가 명나라로 갈 때 그의 오빠 한확도 그 길에 동행하는데[1], 동생을 데리고 간 당시 18세의 한확은 명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광록시는 조선에서 공녀로 간 여인이 가족과 동행하여 명에 갔을 때 그 가족에게 주어졌던 관직이다. [2] (광록시는 명나라 황실 연회 등에 술과 음식을 조달하는 관청으로 경과소경이 그 책임 관리자 직급이다)
여비(麗妃) 한씨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고, 황후가 없는 황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태종이 공경에 빠질 뻔한 일을 막는 등 조선 왕실의 외교에도 기여한 바가 있다. [3] 그런데 1424년 명 영락제가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하게 되자, 30명의 궁인을 순장하였는데, 여기에 조선에서 온 최씨와 여비 한씨가 포함되었다. 여비 한씨는 죽기 전 새 황제 홍희제(영락제의 맏아들)를 만나 함께 명으로 와 자신을 돌보았던 유모 김흑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황제는 이를 들어주기로 했으나, 황궁 여인들이 명의 순장 풍습이 조선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이를 반대해 돌아오지 못했다. 명 황제의 후궁으로 가 순장을 당한 여비 한씨의 사연과 명에 공녀로 간 조선의 여인들의 이야기들은 선덕제가 죽은 후 1435년 공녀의 몸종으로 따라간 53명의 조선 여성을 조선으로 돌려 보낼 때 함께 오게 된 유모 김흑을 통해 비로소 조선 왕실에 알려지게 되었다. [4] 여비 한씨는 사후에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로 시호를 받았다.
명 황제의 후궁의 삶은 여비 한씨에서 끝나지 않고, 막내동생인 한계란(韓桂蘭, 1410~1483[5])까지 이어졌다. 홍희제가 2년 만에 죽고 장자인 주첨기(선덕제)가 황제에 오르자, 명은 또 조선에 공녀를 요구했다.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여비 한씨의 동생이자 한확의 동생이기도 한 한계란(공신부인 한씨)을 지목하여 요구했고 한계란은 이에 저항했지만[6], 결국 1428년 11월 10일[7][8] 명으로 가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한계란이 조선을 떠나는 날 세종은 모화루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보냈다[9]고 하며, 이 행차 역시 오빠 한확이 동행했다. 명의 사신이 한계란을 지목해 요구했다고 하지만, 당시 세종실록 다른 기사를 통해 한확이 적극적으로 동생 한계란을 조선의 공녀로써 명으로 보내고자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10] 언니의 순장을 알게 된 한계란으로서는 명 황제의 후궁으로 가는 것이 절망적인 일이었지만, 이후 선덕제가 죽은 후 순장되지 않고, 정통제(正統帝), 경태제(景泰帝), 성화제(成化帝)에 이르기까지 명나라 4대에 걸쳐 황실의 어른 대접을 받았다. 또한 언니와 마찬가지로 성종의 아버지인 도원군을 덕종으로 추존하는 것을 비롯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1483년 6월 22일[11]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 호부상서((戶部尙書) 유우(劉羽)가 쓴 한계란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게 조심하여 말을 망령되게 발하지 아니하고 행동이 떳떳함이 있으며, 또 성품이 착하여 능히 여러 사람과 화목하므로 빈어(嬪御)의 무리가 신임하고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혹시 음례(陰禮)의 행사를 당하면 반드시 몰래 질문을 구하는데, 부인은 말하기를, '무엇이 행할 만하고 무엇이 행할 수 없다.'고 하며, 혹시 전뉴(剪紐)의 제도에 있어서도 반드시 몰래 가르치기를 구하면 부인이 말하기를, '무엇은 만들 만하고 무엇은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혹시 옛 내령(內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 반드시 몰래 밝히기를 청하면 부인은 말하기를, '내 기억으로는, 선성(宣聖)의 영(令)은 이와 같고, 영성(英聖)의 영은 이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빈어(嬪御) 이하가 모두 비겨 말하기를, '여사(女師)'라고 하였다."고 전한다.[12] 한계란은 사후 공신부인(恭愼夫人)의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