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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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

Story

1897년(건양 2) 2월 20일 경운궁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법궁이 됐다. 확장 공사를 해서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이곳을 궁궐로 정한 것은 러시아·영국·미국 등의 공사관이 가까이 있어 유사 시에 즉시 보호를 받기 쉽다는 이유가 있었다. 1897년 9월 17일에는 고종이 항제 즉위식을 하고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이날부터 이 궁을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으로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이어서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仁化門 : 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이 완성되었다. 1903년 2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여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그러나 1904년 2월에 화재로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도 불이 났으며, 준명당·수옥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만 온전했다. 고종은 곧바로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1905년 10월 21일 밤,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중화전 재건이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1906년에는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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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07 Story Episode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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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덕수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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