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신과 충의, 부의 신으로 비유되는 촉한의 장수 관우를 제사하는 사당으로 1881년(고종 18))에 사인 박도환이 관우의 현몽으로 세웠다고 하나, 위치는 자세하지 않다. 고종은 외세침탈로 인한 국가운영의 불안을 해소하고 군신이자 재신(財神)인 관우를 통해 외세를 배격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며 왕실의 안정을 이루려는 열망에서 서울의 동·서(숭의묘)·남·북 4곳을 비롯해 전국의 각지(안동, 성주, 완도, 남원, 전주, 개성, 평양) 7곳 등 1908년 제사가 모두 폐지될 때까지 모두 11곳을 세웠는데, 평양 관왕묘는 그 중의 하나이다. 대한제국기인 1908년에는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享祀釐正件]으로 관왕묘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없어졌다. 이 칙령에 따라 숭의묘, 동묘, 남묘, 북묘 및 지방 관왕묘의 제사가 폐지되었고, 숭의묘와 북묘는 국유로, 동묘, 남묘 및 지방 관왕묘는 해당 지방 관청으로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하도록 했다. 이후 서묘는 1909년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에 헐어버렸다. 현재는 흥인문 밖에 위치한 동묘만 남아 있게 되었지만, 민간에서는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숭배하는 무속신앙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왕묘 의례는 『국조속오례의서례』(1744), 『춘관통고』(1788), 『대한예전』(1897)에 나타나며 경칩・상강에 거행한다. 소사를 기록한 『국조속오례의』에는 향사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의주가 없다. 중사를 기록한 『춘관통고』에는 춘추향사관왕묘의, 작헌관왕묘의(금의), 전배관왕묘의(금의), 왕세자작헌관왕묘의(금의), 왕세자전배관왕묘의(금의), 왕세손전배관왕묘의(금의)가 실려 있다. 『대한예전』의 향사의례는 『춘관통고』의 중사 규정에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