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고종 20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은 서양 국가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는 첫 공사로 루시어스 하워드 푸트를 파견했다. 푸트 공사 일행은 자신들이 머물고 근무할 공사관을 한성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잠시 박동의 묄렌도르프 집에 두었다가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고, 곧 정동에 있는 민계호, 민영교(명성황후의 친족들)의 집을 2,200달러에 사들여 그곳으로 옮겼다. 민계호 집은 건물 125칸, 빈 공간 300칸, 민영교 집은 건물 140칸, 빈 공간 150칸 규모였으며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 영역을 조성했다.
서양 외교공관 중 처음으로 생긴 미국공사관의 정동 입주를 계기로, 정동은 한성 내 서양인들의 터전이 되어갔다. 1897년(건양 2년)부터 고종이 인근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거주했고, 점점 경운궁의 영역을 넓히면서 미국공사관은 경운궁에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즈음에 부분적으로 개수했고, 실내도 고쳐지었다. 그리고 행랑도 만들었다.
미국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 공사관들과 차이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부터 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자리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조선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미국 외교관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편한 양옥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지원을 적게 해줬기 때문에 짓지 못했다. 정동에 공사관을 마련한 첫 미국공사 푸트는 미국 정부에 서양식 건물을 짓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푸트가 이유로 든 것이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국무장관은 ‘실내에서 모자를 안 쓰는 것이 조선 풍습으로 안다’고 답하며 거절한 것. 표면적인 이유는 저렇지만 미국이 조선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옥을 수리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한옥 청사에 대한 공사관 직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선교사, 의사 출신 호러스 뉴턴 알렌 공사는 자신들의 공사관이 다른 나라 공관보다 초라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고, 이에 대해 자신의 책 《조선의 이모저모(Things Korean)》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른 열강들은 각자 자신들의 대표자가 살 곳으로 미국공사관보다 훨씬 더 허세부린 건물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한때 조선 고관이 살던 진기한 모양의 아름다운 방갈로를 계속 사용했다. ...(중략)... 광활한 잔디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넓은 부지가 있어서 편하고 예술적인 거주지를 만들었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운 큰 건물에 비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반면 궁내부 찬의관 겸 외부 고문을 지냈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만족스러워 했고, 자신의 회고록인 《비외교적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 이렇게 써두었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한 곳 중 하나이다. 다른 공사관, 영사관 건물들은 유럽건축물을 본따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이밖의 다른 공관들은 한옥을 고쳐 지은 것이었으며, 한옥은 고치기 매우 편리한 구조였다. 그것은 잘 다듬은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운 건물이었다. 벽은 진흙 또는 벽돌이어서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친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