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광무 6)에 조석진 등이 고종황제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을 모사하여 흠문각에 봉안한 의절. 태조 등의 어진 이모를 완성하여 선원전에 봉안한 고종은 1902년에 자신의 어진 제작을 명하였다. 즉위 10주년인 1872년에 자신의 어진을 그린 적이 있었던 고종은 이번에는 영조와 정조가 10년마다 한 번씩 어진을 그린 전례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이러한 명을 내렸다. 마침 이듬해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를 기회로 황제권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고종은 기왕의 어진을 모두 세초하고서 새로 그리고, 아울러 황태자의 예진도 함께 그리도록 하였다.
어진 화원을 시재(試才)하고 2월 10일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였다. 고종의 어진 종류는 면복본, 곤복본, 군복본 등이며, 황태자도 같은 종류였다. 화원은 조석진과 안중식이 주관하였으며, 박용훈과 홍의환 등이 참여하였다. 4개월여 만에 정본이 완성되고 나서 6월 21일 어진과 예진에 표제(標題)를 서사하는 의절을 행하였다. 이때 제신들은 첨배(瞻拜)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장소는 정관헌이었다. 이 어진과 예진은 23일에 흠문각에 봉안하였다. 흠문각은 즉조당 북쪽에 있는 건물로서, 봉안처는 별실인 계명재(繼明齋)였다. 8월 18일(음력 7월 15일)에는 어진과 예진의 맹삭봉심(孟朔奉審)이 행해졌다.
고종은 정본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미 양궁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건설되는 서경의 행궁에 자신의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9월 17일에 어진과 예진을 흠문각에서 서경으로 옮겨가 드디어 12월 1일에 봉안 의례를 행하였다. 진전을 따로 짓지 않고 정전인 태극전과 동궁전인 중화전에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고종 어진은 조석진이 휘장을 배경으로 붉은색 강사포 차림으로 그린 전신좌상의 정면상과 채용신이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황색 곤룡포에 익선관 차림으로 그린 전신좌상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