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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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혁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1월 19일 (금) 09: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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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근대식 상징건물 석조전

Story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덕수궁 소재의 전각. 대한제국 정전으로 건축된 석조전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전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건축 양식이었다. 덕수궁 궁역 안쪽에 위치하며, 중화전 서북쪽에 있다. 고종과 순종, 영친왕 등 왕실가족의 생활공간과 외국사절 접견장소로 사용되었다. 태황제 고종이 서거한 다음에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 바 있다. 석조전의 건축은 1893년(고종 30)부터 총세무사(總稅務司)로 근무했던 영국인 브라운([柏貞安], Brown, John Mcleavy)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환궁과 함께 구상한 대한제국 건설의 일환으로 제국의 얼굴이 될 정전을 건축하고자 한 것이다. 설계는 1897년 중국의 상하이에 거주하던 하딩(Harding, J. R.)에게 의뢰하였고, 1900년(광무 4) 5월 이전에 설계가 완료되었다. 공사는 여러 차례의 궁궐 화재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1905년(광무 9)부터 영국인 데이비슨(Davison, M. H.)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이다. 목조가 일반적인 전통 궁궐건축에서 벗어나 돌로 지었다는 것은 곧 서구문물의 적극적인 수용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외견상 3층 건축으로 보이지만, 중앙의 주 계단을 올라서면 주된 층이므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땅에 면한 지하층이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다. 2층 전면에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열을 지어 있으며, 그 위로 삼각형의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에서 넓은 면이 정면을 형성하고 있어 페디먼트를 전면 전체에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중앙부를 돌출시켜 강조하였으며 돌출된 부분에만 페디먼트를 설치하였다. 기둥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정면의 현관에는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좌우 회랑 부분에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었다.

석조전에는 전면뿐 아니라 양측 면에도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어, 베란다 건축 양식 또는 식민지 건축 양식으로 부른다. 건물의 전면에 베란다가 설치되는 것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에서는 일반적이다. 이는 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일찍이 식민지를 경영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고온 다습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전통 건축 양식을 변형시킨 결과이다. 베란다는 그늘을 만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외부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온 다습하지는 않지만 하딩은 상하이에서 활동하여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대한 이해가 적었다. 때문에 석조전을 설계할 때 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건축 양식을 채택하여 베란다를 전면에 설치하였다.

석조전은 1910년 완공되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에서 황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종이 덕수궁에 거처하면서 석조전을 사용한 용도를 보면 침전과 편전의 기능이 복합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궁궐 건축에서 편전과 침전이 분리되었던 것과 비교된다. 서양 건축이 전통 건축과 달리 다층 건물이고 넓은 내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인데, 서양 건축의 도입으로 전통 궁궐 건축의 기능과 공간의 분리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석조전은 1층에 접견실 및 홀, 2층에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고, 지층에는 시종들의 방과 지원 시설이 위치한다. 중앙의 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들어서면, 여느 건물과 달리 1층과 2층이 하나로 된 중앙 홀을 만나게 된다. 주 현관홀은 천창(天窓)에서 채광된 햇빛으로 밝게 유지되었다. 건물의 좌우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면 알현실과 침실이 위치한다. 2층에서 베란다로 나가면 열 지어 세워진 기둥들 사이로 잘 정돈된 정원과 함께 중화전과 석조전 서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지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운궁의 대표적 건축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조전이 완공된 시점에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일제시기에 작성한 『순종실록』 부록의 기록에 따르면, 황위에서 물러난 고종은 석조전을 종친과 귀족을 비롯한 방문객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2년 5월 11일에는 영친왕의 첫 번째 아들인 왕손 이진(李晉)이 석조전에서 사망했으며(『순종실록부록』 15년 5월 11일), 다음 날 종친들과 석조전에서 그 장례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현재 석조전에 관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영친왕, 덕혜옹주가 함께 1층 홀에서 촬영한 사진이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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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고종의 묘호존호급시호에 관한 이론(高宗의 廟號尊號及諡號에 關한 異論) 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 원문 고종실록 고종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원문 순종실록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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