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고종44) 3월 11일에 중화전에서 설행된 영친왕 관례 때의 음식 상차림과 그 종류. 영친왕 관례는 1907년 2월 27일에 표훈원총재 민영휘(閔泳徽)를 빈(賓)으로 삼고, 중추원찬의 김만수(金晩秀)를 찬(贊)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영친왕관례홀기'가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관례의 절차는 이 홀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장서각에는 또 는 의례의 절차를 기록한 것으로서, 관례 하루 전에 빈(賓)과 찬(贊)의 관차(冠次)를 설치하는 것으로써 본 홀기는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관례 당일 향안(香案)과 절안(節案), 제서안(制書案), 빈찬위(賓贊位), 관세(盥洗), 뢰(罍), 가작비(加勺篚), 영친왕의 지영위(祗迎位)와 수제안(受制案), 관석(冠席), 빈석(賓席), 유악(帷幄), 유(帷), 욕석(褥席), 관면상(冠冕箱), 예존탁(醴尊卓), 교마(驕馬), 의장(儀仗), 고락(鼓樂) 등을 설치하거나 진설하는 절차를 세세히 적고 있다. 관례 시간이 되면 조복(朝服)을 입은 왕부관(王府官)이 궁문 밖에 좌우로 늘어서고 절(節)과 제서(制書)가 장차 이르려할 때 영친왕이 출차(出次)하고 음악이 연주된다. 영친왕은 지영위(祗迎位)에 나아가고 절과 제서가 도착하면 국궁(鞠躬)한다. 집절자(執節者)와 빈(賓)이 각각 절(節)과 제서(制書)를 안(案) 위에 올려놓고 영친왕은 수제위(受制位)에 올라 북향으로 선다. 동시에 음악이 그친다. 영친왕은 왕부관의 요청에 따라 국궁사배흥평신(鞠躬四拜興平身)한 후 무릎 꿇는다. 빈(賓)은 제서를 선포한다. 영친왕은 왕부관의 요청을 받으며 부복흥사배흥평신(俯伏興四拜興平身)한다. 그리고 빈(賓)에게 제서(制書)를 받아 왕부관에게 주고 왕부관은 다시 봉제관(捧制官)에게 준다. 영친왕은 동서(東序)의 유(帷)에 들어가 서 있고 빈(賓)은 서쪽 계단에 서 있는다. 음악이 연주되면 영친왕은 관석(冠席)의 동서향에 서고 다시 음악이 멈춘다.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집관(執冠)들이 왕친왕에게 나아가 축문(祝文)을 읽는다. 첫 번째 축문을 들은 후 영친왕은 곤룡포(袞龍袍)로 갈아입는다. 그 후 강사포(絳紗袍)와 면복(冕服)을 각각 착용하고 홀을 손에 쥔다. 영친왕은 예석(醴席)에서 다시 축문(祝文)을 듣고 홀을 대대(大帶)에 꽂은 채 예주(醴酒)를 담은 술잔을 받는다. 장악과(掌樂課)에서 수천춘곡(壽千春曲)을 연주하면 영친왕은 제예(祭醴)하고 쵀예(啐醴)한다. 그리고 전선사(典膳司)에서 진찬(進饌)하고 자(字)를 주는 절차가 진행된다. 영친왕은 재배(再拜)하며 “내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감히 공경히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말한다. 집절자는 절(節)을 받들어 나가고 주사(主事)는 빈(賓)과 찬(贊)을 인도하여 나간다. 영친왕은 문외(門外)까지 전송하고 유(帷)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로 갈아입고 환내(還內)한다. 빈과 찬은 대궐에 도착한 후 절(節)을 가지고 복명(復命)한다. 본 홀기에 적힌 관례의 절차는 대략 이상과 같은데, 관례의 절차를 미리 정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목적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