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고종 1) ~ 1930년】. 이승훈(李昇薰). 독립운동가. 오산학교 교장, 민족대표 33인, 평안북도 정주 출신. 여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나 1874년 유기상(鍮器商)의 사환으로 들어가서 이후 보부상으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웠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무역업에 손을 대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사업에 실패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들은 후 금연·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고, 이 해 11월 24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1911년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이승훈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가 1915년 가출옥하여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였다. 그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오산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