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의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곧바로 중건사업이 시행되었다.
1900년 화재의 경우, 10월 14일 밤 진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은 물론 숙종 이하 일곱 왕의 어진이 소실되었다. 이에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과 영정모사도감(影幀模寫都監)을 설치하고 새로운 건물 자리를 정하여 확대된 규모로 진전을 늘려 지었다. 10월 24일에는 영성문(永成門) 안 서쪽이 부지로 결정되었고 10월 30일에 치목(治木)이 시작되었으며 다음 해 7월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때 세워진 건물이 이안청 등 모두 228칸이었다.
1904년 4월 14일에는 함녕전 온돌 아궁이를 수리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때 함녕전은 물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 등 궁궐 중심부의 전각들과 관아 및 궁성문마저 모두 타 버리고 말았다. 화재 이튿날 경운궁중건도감(慶運宮重建都監)을 설치하고 곧바로 중건작업에 착수했다. 1904년 5월 14일부터 1906년(광무 10) 5월 17일 사이에 즉조당, 대한문 등이 차례로 중건되었다. 이때 중층이던 중화전은 단층으로 재건되었고, 대안문(大安門)은 수리 후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며 발전된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궁궐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건설 이후부터 약 10년에 걸쳐 소실과 재건을 거듭한 황궁은 아쉽게도 국가와 역사 발전의 중추에서 멀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