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순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고종과 순종의 황제 호칭을 깎아내리려 했던 일제의 조사 검토에 관한 사실. 고종실록의 편찬과정에서 실록의 권두에 실릴 고종의 시호가 일본황실의 한 왕가로서의 지위에 저촉되면서, 이를 문제삼아 감수보조위원이었던 에하라 젠쓰이가 그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총독부의 입장과 이해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는 실록 권두에 황제의 시호를 기술하는 것은 일본 황실에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시호와 묘호, 존호의 뜻을 명확히 분간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조사 결과, 그는 일제의 한일합방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황권만을 인정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고종순종황제실록 편찬 당시에 이런 논의가 제기된 것은 아마도 대한제국황제가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한국인들이 여전히 황실을 식민지 조선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배경하에 계속해서 복벽운동도 일어났다. 일제는 이러한 국내외의 상황을 간과할 수 없었다. 대한제국 고유의 황통이 일제가 강요한 지위와는 관계없이 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위와 같은 논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국내외의 일부 독립운동세력이 복벽운동을 지속하고 1926년의 순종황제 인산 때,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대체로 순종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인식하고 애도하였다.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망하였다고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황통의 단절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였다. 그리하여 고종순종실록에서도 에하라의 위와 같은 논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권두에는 황제의 시호를 사용하고 본문에서는 왕으로 낮추었다. 그러나 순종 사후 왕위를 계승한 왕세자 은의 칭호는 '창덕궁 이왕 은전하'로 제정되었다. 그 이후 이왕 은은 복권의 기회를 갖지 못함으로써, 이때를 대한제국황제의 정통성의 단절 시기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