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22-R1-0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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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yu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4일 (일) 20:32 판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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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황실의 마지막 공간 낙선재(樂善齋) 》 덕혜옹주(德惠翁主), 낙선재에서 보낸 회한의 27년

Story

덕혜옹주는 고종은 뒤늦게 얻게 된 고명딸로 어머니 양씨(梁氏)는 상궁 출신이다. 엄비(嚴妃)의 승하 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옹주를 낳았고 이후 귀인으로 책봉돼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를 얻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에 황실 유치원을 특별히 설립하고 바로 앞의 거리인데도 사인교에 태워 유모를 딸려 보냈으며 수시로 유치원에 들러 옹주가 노는 것을 보면서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1]

고종은 영친왕처럼 덕혜옹주도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될까 몹시 근심하였고, 이에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인 시종 김황진의 조카와 극비리에 혼사를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어느 날, 김시종은 경무 총감부로 끌려가 자취를 감추었고 덕혜옹주의 혼사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2]

덕혜옹주가 일출 국민학교 5학년 때인 1925년 정월, 이왕직 차관(李王職次官)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가 순종 황제에게 덕혜옹주의 일본행이 결정되었음을 통보해왔고 순종은 왜 어린 옹주까지 데려가야 하느냐고 반대를 했지만 이를 저지할 수 있는 권력은 없었다. 이 때 창덕궁은 개방되어 동물원이 되어있었고 광화문 자리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조선 총독부의 석조 건물이 솟아오르고 있었으므로 순종은 한 나라의 황제가 아닌, 동물원으로 개방되어 있는 고궁이나 돌보는 주인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25일, 서울을 출발하여 3월 30일 동경역에 도착했다. 이방자 여사는 이 때 덕혜옹주의 얼굴을 보고 순진하게 미소 짓던 총명한 눈매가 피로에 지친 듯 흐려져 있고 얼굴도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고 회상한다.[3]

이후 1929년 5월 30일, 덕혜옹주의 생모 양귀인(梁貴人)이 별세한다. 이 때, 덕혜옹주는 불과 17세였는데 모친의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 덕혜옹주는 한밤중에 정원에서 거니는 등 몽유병 증세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조발성치매증(早發性痴症)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덕혜옹주는 날로 증세가 악화되었지만 1930년 가을, 이왕직 장관이 대마도 백작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옹주의 결혼을 서둘렀다.[4] 1931년, 덕혜옹주가 20세가 되는 해에 병환은 차도가 있었고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지고 사람을 알아보고 식욕도 좋아졌다. 이에 같은 해, 5월 8일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와 결혼식을 올린다. 1932년에는 딸 소마사에를 낳았지만 이즈음 조울증과 우울증, 조현병이 악화되어 1946년 마쓰자와 도립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입원이 장기화 되자 다케유키는 영친왕 부부와의 합의를 통해 1955년 덕혜옹주와 이혼한다. 그러나 다시 1956년에 딸이 실종되는 불행을 겪게 되고, 이 일로 덕혜옹주의 정신적 병환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1962년 6월 16일, 당시 이방자 여사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 십수년이나 동경의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아무것도 모르고 누워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5]

이에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16일, 박찬주 여사와 제2공자 종(宗)의 부축을 받으며 귀국 절차를 밟게 된다. 덕혜옹주의 이혼은 본인도 모른 채, 1955년에 이루어졌는데 여러 복잡한 절차와 까다로운 수속을 마치고 1월 26일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6] 이후 덕혜옹주는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이어갔는데 어려서 배운 한글로 윤비와 영친왕에게 문안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1962년 2월 8일 덕혜옹주는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 3월 28일에 국가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의 생계비 지급을 위해 <구황실재산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1968년 가을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 후 창덕궁 수강재(壽康齋)로 옮겨 기거하였다. 전 남편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의 면담을 위해 낙선재에 방문했지만 관계자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 격랑의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한 채,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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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Daehan Imperial Household) 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06.php_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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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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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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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119쪽.
  2. 김을한, <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1970년 5월 20일자 기사 참조.
  3.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121쪽 참고.
  4.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170쪽 참조.
  5.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41쪽 참조.
  6. 이방자 여사는 낙선재에서 지내고 있던 윤비와 운현궁의 노공비, 무엇보다 옹주의 유모였던 변복동(卞福童)씨가 덕혜옹주가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 실성한 사람같이 기뻐해서 공항에 나왔던 이들이 모두 따라 울었다고 회상한다.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5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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