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즉위 이래로 국가의 경사나 난국수습, 선대왕의 기일, 탄일 등을 맞이하여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행사를 빈번하게 벌였다. 존호의 추상은 선대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조상을 받들어 교화의 최고 덕목인 효를 솔선수범함으로써 왕의 도덕적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고종은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차자였으나,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고종은 익종에 대한 존호 추상을 가장 중시하여 적극 추진하였다. 환갑, 익종과 대왕대비의 혼인 60주년, 대왕대비의 왕비 책봉 50주년, 대리청정 60주년, 부모에 대한 추모의 정 등을 명분으로 한 존호 가상(加上)의 전례행위는 익종의 왕비이면서 고종의 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와 왕대비, 대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또한 고종 9년(1872)은 조선이 건국된 지 480년이 되는 갑자가 같은 해로서, 이를 기념하여 태조와 태종의 존호를 정하여 올렸다. 이를 통해 유구한 왕실의 역사와 존엄을 드러내어 고종이 조선의 건국과 그 근원을 함께 하는 역사적 정통군주임을 상징적으로 천명하였다. 고종29년(1892)에는 선조에게 존호를 추상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를 칭송하였는데, 이는 난국 타개와 관련한 정치적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존호의 가상 뿐 아니라 묘호(廟號)의 개상(改上)을 통해서도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였는데, 고종의 5대조인 영종을 영조로 개상한 것은 조(祖)가 종(宗)보다 비중이 큰 것으로 인식해온 당시에 그 정치적 의미가 고종에게 권위와 존엄을 더해줄 수 있었다.
이밖에 고종은 자신에게 존호를 봉책하는 일은 왕세자와 신하들의 건의를 고종이 수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신하들의 왕권에 대한 충성 다짐 성격으로 왕과 신하의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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