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과 1894년의 치도사업에 이어 1896년에서 1897년에 걸쳐 본격적인 치도사업이 시행되었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도 서울 건설의 일환으로 진행된 도시개조사업이었던 이 치도사업의 주역은 이채연과 박정양이었다. 한성도시개조사업은 개항 이후 서구식 도로관이 축적되고, 갑오개혁기 대내외적으로 개혁 요구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ʻ문명개화국ʼ이 되고자 한 조선정부의 의도와 한성에 체류 중이던 외국인의 요구가 함께 작용한 것이다. 도로정비사업은 도시의 경관은 진전시켰지만, 일상의 상업침탈을 가속화하고 소규모 조선 상인들에게는 피해를 입혔다. 또한 사업의 대상이 서남부지역에 치중되면서, 그 혜택이 한성부민에게는 잘 미치지 않았다. 한성부민은 도로정비사업이 정동지역에 치중된 것을 비판하며,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