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조계조약"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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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 1914년 4월】.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조선 정부가 인천의 개항장 내에 조계를 설정하기 위해 체약국 대표들과 조인한 조약. 조계는 외국인의 거주 및 무역을 위해 일정의 경계 내에 설치된 공간이다. 조선의 세 번째 개항장인 인천에는 1883년과 84년에 일본전관조계[일본전관거류지], 청국전관조계, 각국공동조계가 차례로 설치되었는데, 이상의 조계들은 각각 「인천구조계조약(仁川口租界條約)」·「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 Land Regulations for the General Foreign Settlement at Chemulpo)」 등의 인천조계조약에 근거하여 설립된 것이다. 인천 최초의 조계는 「인천구조계조약」(1883년 9월 체결)에 근거하여 설치된 일본전관조계이다. 같은 일본전관조계라 하더라도 부산 및 원산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대해 지조(地租) 명목으로 매년 금 50원을 납부할 뿐이었으나, 인천의 일본전관조계는 개인들이 경매를 통해 택지를 대부받아 그 등급에 따라 정해진 액수를 조선 정부에 직접 납부하였다. 이는 다른 외국인들의 도래를 예상하여 청국 및 일본 등 동아시아에 설치된 조계들의 일반적 형태를 취한 결과였다.이듬해 4월에는 조선과 청국 사이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체결되었다. 청국은 조선과 무역장정을 체결할 당시 ‘조약’과 ‘장정’을 구분하고는, 전자는 대등 관계, 후자는 상하 관계에서 체결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우월적 지위를 강조하려 했으나, 청국전관조계의 설정을 위한 이 장정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일본조계의 선례를 따르는 데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같은 해 11월에는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각국공동조계의 설정 근거가 되었다. 이 장정은 일본 고베(神戶)에 주재하던 영국영사 애스턴이 작성한 것으로, 각국 대표가 거류지회를 구성하여 통치하되 그에 일본 측 대표의 참여도 허용하였던 고베의 외국인거류지를 모델로 삼았다. 이후 한국 측 관리인 감리와 체약국 대표들의 발의로 인천각국조계의 거류지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장정 체결로부터 이미 4년이 지난 1888년 12월의 일이었다.1887년에는 인천 삼리채 지방에 청국확충조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 근거가 된 것은 「삼리채확충화계장정(三里寨擴充華界章程)」이다. 이 장정은 다른 조계조약과 달리 제한적이나마 조선인의 거주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국 간의 소유권 분쟁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1899년부터는 조계가 아니라 조계 밖 10리 이내의 잡거지로 취급되었다.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조청 간 모든 조약이 폐기됨에 따라 청국조계는 법적 근거를 상실하였으나 기왕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꾀하고 있던 일본은 청국조계의 철폐를 염두에 두고 청국과의 협의 끝에 ‘한국 병합’ 직전인 1910년 3월 「인천, 부산 및 원산 청국거류지 규정」을 공포하여 그 지위를 명확히 하였다. 같은 해 8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제령 제2호로써 청국조계 및 각국조계의 행정은 경찰권을 제외하고는 종전의 예에 따른다고 공포하였으나, 1914년 4월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의 실시와 함께 조계는 모두 철폐되었다. 인천의 조계들 또한 이때 사라지게 되었다. 시가지가 형성된 조계와 그 주변 일대는 인천부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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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3일 (월) 18:32 판

Definition

【1883년 9월 ~ 1914년 4월】.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조선 정부가 인천의 개항장 내에 조계를 설정하기 위해 체약국 대표들과 조인한 조약. 조계는 외국인의 거주 및 무역을 위해 일정의 경계 내에 설치된 공간이다. 조선의 세 번째 개항장인 인천에는 1883년과 84년에 일본전관조계[일본전관거류지], 청국전관조계, 각국공동조계가 차례로 설치되었는데, 이상의 조계들은 각각 「인천구조계조약(仁川口租界條約)」·「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 Land Regulations for the General Foreign Settlement at Chemulpo)」 등의 인천조계조약에 근거하여 설립된 것이다. 인천 최초의 조계는 「인천구조계조약」(1883년 9월 체결)에 근거하여 설치된 일본전관조계이다. 같은 일본전관조계라 하더라도 부산 및 원산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대해 지조(地租) 명목으로 매년 금 50원을 납부할 뿐이었으나, 인천의 일본전관조계는 개인들이 경매를 통해 택지를 대부받아 그 등급에 따라 정해진 액수를 조선 정부에 직접 납부하였다. 이는 다른 외국인들의 도래를 예상하여 청국 및 일본 등 동아시아에 설치된 조계들의 일반적 형태를 취한 결과였다.이듬해 4월에는 조선과 청국 사이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체결되었다. 청국은 조선과 무역장정을 체결할 당시 ‘조약’과 ‘장정’을 구분하고는, 전자는 대등 관계, 후자는 상하 관계에서 체결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우월적 지위를 강조하려 했으나, 청국전관조계의 설정을 위한 이 장정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일본조계의 선례를 따르는 데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같은 해 11월에는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각국공동조계의 설정 근거가 되었다. 이 장정은 일본 고베(神戶)에 주재하던 영국영사 애스턴이 작성한 것으로, 각국 대표가 거류지회를 구성하여 통치하되 그에 일본 측 대표의 참여도 허용하였던 고베의 외국인거류지를 모델로 삼았다. 이후 한국 측 관리인 감리와 체약국 대표들의 발의로 인천각국조계의 거류지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장정 체결로부터 이미 4년이 지난 1888년 12월의 일이었다.1887년에는 인천 삼리채 지방에 청국확충조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 근거가 된 것은 「삼리채확충화계장정(三里寨擴充華界章程)」이다. 이 장정은 다른 조계조약과 달리 제한적이나마 조선인의 거주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국 간의 소유권 분쟁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1899년부터는 조계가 아니라 조계 밖 10리 이내의 잡거지로 취급되었다.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조청 간 모든 조약이 폐기됨에 따라 청국조계는 법적 근거를 상실하였으나 기왕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꾀하고 있던 일본은 청국조계의 철폐를 염두에 두고 청국과의 협의 끝에 ‘한국 병합’ 직전인 1910년 3월 「인천, 부산 및 원산 청국거류지 규정」을 공포하여 그 지위를 명확히 하였다. 같은 해 8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제령 제2호로써 청국조계 및 각국조계의 행정은 경찰권을 제외하고는 종전의 예에 따른다고 공포하였으나, 1914년 4월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의 실시와 함께 조계는 모두 철폐되었다. 인천의 조계들 또한 이때 사라지게 되었다. 시가지가 형성된 조계와 그 주변 일대는 인천부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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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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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조계조약 Event 사건 인천조계조약(仁川租界條約) 인천조계조약 仁川租界條約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인천조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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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조계조약 [[]]

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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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천조계조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164
해설 위키백과 명성황후 https://ko.wikipedia.org/wiki/명성황후
해설 두산백과 명성황후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3683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 문화원형백과 > e조선궁중여성 명성황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70841&cid=49236&categoryId=49236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 네이버캐스트 > 인물한국사 명성황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1412&cid=59015&categoryId=59015
참고 국가문화유산포털 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100460000
참고 한국민속대백과 > 한국민속신앙사전 인왕산국사당(仁王山國師堂)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2674
원문 디지털 장서각 명성황후홍릉비(明成皇后洪陵碑) http://jsg.aks.ac.kr/dir/view?dataId=ROY_G002%2BJSK%2BKSM-WH.1897.4136-20160515.25316
그림 서울신문 권오창 화백의 명성황후 영정 https://img.seoul.co.kr/img/upload/2017/08/14/SSI_20170814154630_O2.jpg

Bibliography

type bibliographic index online resource url
논문 이희환,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조규-조약체제와 인천의 청·일 전관조계」,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3,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2015. KCI
논문 박찬승, 「租界制度와 仁川의 租界」, 『仁川文化硏究』 1,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논문 이영호, 「개항기 仁川租界의 문화유적과 그 특성」, 『인하사학』 10, 인하역사학회, 2003.
논문 박준형, 「일본전관조계 내 잡거문제와 공간재편 논의의 전개」, 『도시연구』 12, 도시사학회, 2014.
논문 박준형, 「청일전쟁 이후 인천 청국조계의 법적 지위와 조계 내 조선인 거주문제」, 『한국학연구』 22,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10.
단행본 이연세·남동걸·안정헌 번역, 『역주 구한국외교문서<청안(淸案)> 1 (1책~4책)』,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7.
단행본 『한국조약류찬』, 국학자료원, 1995.
단행본 최덕수 외,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열린책들, 2010.
단행본 손정목, 『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 -개항장,개시장,조계,거류지-』, 일지사, 1982.
단행본 高秉雲, 『近代朝鮮租界史の硏究』, 雄山閣出版,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