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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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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학운동. 일제는 정치적, 사회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못지않게 문화면에 있어서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통제 정책을 폈다. 먼저, 교육에서는 우민화 교육을 통하여 한국인의 황국 신민화를 꾀하였다. 이와 같은 목표에 따라, 우리 민족은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배우도록 강요당하였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는 그들의 침략 정책에 맞도록 편찬되었다. 그들은 사립 학교나 서당 등 민족주의 교육 기관을 억압하였고, 식민지 통치에 유용한 실업 기술 교육을 강요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더욱 혹독한 식민지 교육 정책이 실시되었다. , 일제가 내세운 내선 일체, 일선 동조론, 황국 신민화와 같은 허황된 구호 아래 우리말 교육과 우리의 역사 교육은 일체 금지되었으며, 이에 항거하는 학교는 폐쇄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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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학운동. 국학이란 용어는 19세기 후반에 밀어닥친 외세의 충격적인 자극에 대응하여 나타났다. 국학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애국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되었다. 그 연구자들은 현실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꾀하였고, 민족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다시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 발전시켜서 한국의 얼을 고취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학자로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이 있었다. 특히, 정인보는 국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사람이었다.
한편, 한국인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신문이 모두 폐간되었으나,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에 의해 조선 일보, 동아 일보의 발행이 허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족지들은 일제에 의해 기사가 삭제되거나, 정간, 폐간되고 언론인들이 구속을 당하는 등 온갖 박해를 받았다. , 우리의 민족사도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변조되어 갔다. 특히, 민족사의 근원이 되는 고대사 부문의 왜곡이 가장 심하여 단군 조선이 부정되었고, 한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이 강조되어,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 등이 완전히 외면당하였다. 종교 활동도 온갖 탄압을 당하였다. 일제의 크리스트 교 세력 분쇄 음모에 의해 소위 안악 사건, 105인 사건이 날조되었고, 3⋅1 운동 이후에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고 하여 체포, 투옥되었다. 불교에 있어서도 사찰령, 승려법 등이 제정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다. 천도교와 대종교 등의 민족 종교는, 일제의 간섭이 특히 심하여 활동의 자유가 크게 제한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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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사상체계에는 조선후기의 국학정신이 직간접으로 계승되었다. 박규수(朴珪壽)와 개화파에 해당하는 김옥균(金玉均) 등의 계열이 박지원·박제가 계통의 사상체계와 연결되고, 위정척사의 허전(許傳)이 이익 계열의 인물임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역사상 민족, 동포라는 용어가 최초로 표명된 시기이고 종래의 유학자들이 서양학문의 수용을 하여야 한다고 인식한 1890년대 말 애국계몽운동으로 교육열이 고조되고 민족국가의 실현을 위한 문화, 정치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국학운동은 나라 안과 나라 밖에서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주시경이 우리의 말과 글을 비로소 근대적인 어학으로 정립하기 시작했고, 장지연이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과 『일사유사(逸士遺事)』 등 새로운 시각에서 저술을 냈다. 또한 신채호에 의해서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와 같은 민족주의사학이 개척되었고 최남선이 주재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고운동(國故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애국 지사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대항하여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3⋅1 운동 이후 이윤재, 최현배 등은 국문 연구소의 전통을 이어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고, 국어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한글의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 강연회를 통하여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한글이란 잡지를 간행하여 그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면서 그 연구도 더욱 심화되었다. 이 학회는, 한글 교육에 힘써 한글 교재를 출판하기도 했으며, 회원들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글을 보급하는 데 앞장 섰다. 조선어 학회가 이룩한 큰 성과 중의 하나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한편,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일제에 의해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되어 회원들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마침내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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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신문과 학회지를 통한 활발한 민중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 무렵은 전통적인 학문연구방법이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으로 바뀌고 있던 상황에서, 국학에 일본의 어용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던 시기였다. 일본 학자들에 의한 관심은 한국의 침략을 위한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뿐만 아니라 침략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을 가진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의 역사·고고학·어학·역사지리·민속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사·연구가 진척되고, 한국연구의 편익을 위하여 조선고서간행회를 조직하여 많은 희귀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가 많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국학은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인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주시경·장지연·신채호의 학문이 더욱 그러하였다. 그 뒤 이러한 국학의 정신은 발전되어 황의돈(黃義敦)·권덕규(權悳奎)·최남선 등에 의하여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가 저술되고, 오세창(吳世昌)·이능화(李能和)·안확(安廓) 등에 의해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각 분야의 연구저술이 나오게 되었다.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는 노력은 한국사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즉, 일제에 의해 우리 민족사가 왜곡되고 부정적인 면만이 강조되자,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일련의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박은식은 상하이에서 한국 통사(韓國痛史)를 저술하여 근대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을 밝혔으며, 한국 독립 운동지 혈사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한민족의 독립 운동을 서술하였다 그는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채호는 주로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등을 저술하여, 주체적인 한국사를 정리함으로써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 밖에, 정인보는 조선사 연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식민 사관에 대항하였고, 문일평, 안재홍, 장도빈 등도 민족주의 역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한편, 청구 학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 어용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학 연구에 반발하여, 이윤재, 손진태 등이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면서 한국학 연구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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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8일 (수) 21:34 판

근대 국학운동

Story

근대 국학운동. 국학이란 용어는 19세기 후반에 밀어닥친 외세의 충격적인 자극에 대응하여 나타났다. 국학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애국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되었다. 그 연구자들은 현실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꾀하였고, 민족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다시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 발전시켜서 한국의 얼을 고취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학자로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이 있었다. 특히, 정인보는 국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사람이었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사상체계에는 조선후기의 국학정신이 직간접으로 계승되었다. 박규수(朴珪壽)와 개화파에 해당하는 김옥균(金玉均) 등의 계열이 박지원·박제가 계통의 사상체계와 연결되고, 위정척사의 허전(許傳)이 이익 계열의 인물임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역사상 민족, 동포라는 용어가 최초로 표명된 시기이고 종래의 유학자들이 서양학문의 수용을 하여야 한다고 인식한 1890년대 말 애국계몽운동으로 교육열이 고조되고 민족국가의 실현을 위한 문화, 정치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국학운동은 나라 안과 나라 밖에서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주시경이 우리의 말과 글을 비로소 근대적인 어학으로 정립하기 시작했고, 장지연이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과 『일사유사(逸士遺事)』 등 새로운 시각에서 저술을 냈다. 또한 신채호에 의해서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와 같은 민족주의사학이 개척되었고 최남선이 주재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고운동(國故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신문과 학회지를 통한 활발한 민중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 무렵은 전통적인 학문연구방법이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으로 바뀌고 있던 상황에서, 국학에 일본의 어용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던 시기였다. 일본 학자들에 의한 관심은 한국의 침략을 위한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뿐만 아니라 침략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을 가진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의 역사·고고학·어학·역사지리·민속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사·연구가 진척되고, 한국연구의 편익을 위하여 조선고서간행회를 조직하여 많은 희귀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가 많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국학은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인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주시경·장지연·신채호의 학문이 더욱 그러하였다. 그 뒤 이러한 국학의 정신은 발전되어 황의돈(黃義敦)·권덕규(權悳奎)·최남선 등에 의하여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가 저술되고, 오세창(吳世昌)·이능화(李能和)·안확(安廓) 등에 의해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각 분야의 연구저술이 나오게 되었다.

Semantic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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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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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정영훈, 「항일독립운동과 단군민족주의」, 『단군학연구』 43, 단군학회, 2020.
논문 김봉희, 「개화기 지식보급의 확대와 출판·인쇄의 기능」, 『성곡논총』 27-3, 성곡학술문화재단, 1996.
단행본 권두연, 『신문관의 출판 기획과 문화운동』,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6.
단행본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세기 전반기 한국사회의 연구』, 백산자료원, 1999.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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