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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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어극40년칭경비'이다. 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는 전액(篆額)을 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어극40년칭경비'이다. 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는 전액(篆額)을 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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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 기념비전(紀念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은2층의 받침돌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8각으로 다듬은 높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놓고서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차례로 얹어 맞춘 다음, 3출목(三出目)의 공포를 짜올리고 4모 지붕을 받친 다포(多包)식 가구(架構)로 결구(結構)하였다. 입구인 3문(三門)은 남향하고 있는데, 돌로 세운 기둥 사이에는 보기 드물게 철문(鐵門)을 달아 매었다. 문의 기둥에는 앞면에 식물 무늬를 얕게 돋을새김하였고, 윗부분에는 돌짐승을 하나씩 올려 놓았다. 가운데 문 위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었는데, 그 가운데에 얕게 판 감실 안에는‘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바로 윗부분에는 난간을 받치는 연잎 모양의 동자기둥을 본떠 만든 받침을 놓고서 남향을 상징하는 주작(朱雀)을 놓았다. 아래층 받침돌의 4면에 두른 난간에도 방위에 따라 4신(四神)과 함께 십이지(十二支)에 해당하는 동물상을 배열하였다. 받침돌의 남쪽에는 도로의 기점(起點)이나 종점(終點), 경과지를 표시하는 도로원표(道路元標)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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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기념비각(紀念碑閣)이 아닌 기념비전이라고 하여 품격을 높였고,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이나 경회루(慶會樓), 원구단(圜丘壇) 등과 같이 받침돌을 높이 쌓고 돌난간을 두른 다음 방위에 맞추어 동물 조각을 배치하였으며, 경복궁쪽에 자리하였던 기로소의 위치를 고려하여 경복궁 광화문 앞 대로와 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건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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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전(紀念碑殿) 내부에 세운 기념비(紀念碑)는 조선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고, 이에 더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즉 1863년, 11살에 임금이 된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1902년에 세웠다는 것이며, 그때 고종의 나이가 51세가 되어 육십을 바라본다는 망육(望六)으로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됨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기념비전(紀念碑殿) 내부에 세운 기념비(紀念碑)는 조선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고, 이에 더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즉 1863년, 11살에 임금이 된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1902년에 세웠다는 것이며, 그때 고종의 나이가 51세가 되어 육십을 바라본다는 망육(望六)으로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됨을 기념하는 것이다.

2021년 10월 16일 (토) 18:11 판

Definition

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어극40년칭경비'이다. 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는 전액(篆額)을 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 기념비전(紀念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은2층의 받침돌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8각으로 다듬은 높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놓고서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차례로 얹어 맞춘 다음, 3출목(三出目)의 공포를 짜올리고 4모 지붕을 받친 다포(多包)식 가구(架構)로 결구(結構)하였다. 입구인 3문(三門)은 남향하고 있는데, 돌로 세운 기둥 사이에는 보기 드물게 철문(鐵門)을 달아 매었다. 문의 기둥에는 앞면에 식물 무늬를 얕게 돋을새김하였고, 윗부분에는 돌짐승을 하나씩 올려 놓았다. 가운데 문 위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었는데, 그 가운데에 얕게 판 감실 안에는‘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바로 윗부분에는 난간을 받치는 연잎 모양의 동자기둥을 본떠 만든 받침을 놓고서 남향을 상징하는 주작(朱雀)을 놓았다. 아래층 받침돌의 4면에 두른 난간에도 방위에 따라 4신(四神)과 함께 십이지(十二支)에 해당하는 동물상을 배열하였다. 받침돌의 남쪽에는 도로의 기점(起點)이나 종점(終點), 경과지를 표시하는 도로원표(道路元標)가 놓여 있다. 이름을 기념비각(紀念碑閣)이 아닌 기념비전이라고 하여 품격을 높였고,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이나 경회루(慶會樓), 원구단(圜丘壇) 등과 같이 받침돌을 높이 쌓고 돌난간을 두른 다음 방위에 맞추어 동물 조각을 배치하였으며, 경복궁쪽에 자리하였던 기로소의 위치를 고려하여 경복궁 광화문 앞 대로와 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건립하였


이 기념비전(紀念碑殿) 내부에 세운 기념비(紀念碑)는 조선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고, 이에 더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즉 1863년, 11살에 임금이 된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1902년에 세웠다는 것이며, 그때 고종의 나이가 51세가 되어 육십을 바라본다는 망육(望六)으로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됨을 기념하는 것이다. 기로소(耆老所)의 위치는 지금의 기념비전과 가까운 교보빌딩과 KT 건물쯤으로 보인다. 기로소(耆老所)는 나이 일흔이 넘은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원을 예우하기 위해 경로(敬老)의 예로 모셨던 관청이다. 고려 기영회(耆英會)를 계승한 관제로 임금도 나이가 들면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다. 조선시대 왕 대부분이 장수하지 못하여 그 예가 드물었으며 그러다 보니 나이를 앞당겨 들어갔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가 60세가 되자 기영회(耆英會)에 들어갔고, 숙종이 59세에 망육(望六),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기로소에 적을 올렸으며, 영조는 51세에 망육으로 이름을 얹었기에 이 전례에 따라 고종도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간 것이다.

즉, 고종이 임금이 된 지 40년을 기념하고 나이 51세가 되어 육십을 바라보게 되니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을 기념함과 동시에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이를 보호하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을 세운 것이다. 또 기념비전 남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고 상단에는 '만세문(萬歲門)'이라고 씌어 있다. 이 글씨는 영친왕이 6살에 썼다고 하니 순종과 영친왕의 친필 글씨가 있는 귀한 문화재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쪽 철문의 오른쪽 돌기둥 안에는 표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도로원표(道路元標)'라고 쓰여 있다.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477km라고 할 때, 그 기준으로 삼는 지점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계시는 창덕궁 앞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1914년 4월 세종로 네거리(충무공 이순신 동상 자리)로 기점을 바꾸어 가로 90cm, 세로 30cm, 높이 70cm의 원표를 설치하였다. 이후 세종로 도로를 확장함에 따라 1935년에 기념비전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광화문 사거리 동북쪽, 거대한 교보빌딩 앞에 위치한 비각. 정식 명칭은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이지만 밖에 내걸린 현판에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고 씌어있다.

기념비전(紀念碑殿)은 기념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을 말한다. 통상 부르는 비각(碑閣)이라 하지 않고 비전(碑殿)이라 함은 각(閣)보다는 전(殿)으로 불러 건물의 격(格)을 보다 높인 것이다. 궁궐 건물의 명칭에도 뚜렷한 서열이 있어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의 순서로 이름 짓는바, 그중 가장 상위에 있는 명칭이 전(殿)으로 왕이나 왕비와 관련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기념비전(紀念碑殿) 편액, 오른쪽에 예필(睿筆)이라 하여 왕세자가 쓴 것임을 나타내니 순종이 세자 때 쓴 현판 글씨이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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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전 Architecture 건축 궁궐건축 기념비전(紀念碑殿) 기념비전 紀念碑殿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기념비전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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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전 조선_고종 commemorates
기념비전 어극40년칭경기념비 isRelatedTo
기념비전 어극40년칭경예식 isDerivative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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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caption URL
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高宗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945
해설 위키실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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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두산백과
참고 민족문화연구소 도로원표는 왜 칭경기념비전 앞에 놓여 있을까? https://www.minjok.or.kr/archives/117388
참고 시니어조선>명예기자 [한양 답사기] [1]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12/2018031201806.html
사진 다음>블러그 1910년대 서울의 궁궐과 평양의 성곽 https://blog.daum.net/osowny/15971384
동영상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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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이성준,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동물상에 대한 연구」,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54), 2014.02, pp.1~34.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49569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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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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