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즉위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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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양위 사건(高宗讓位事件)이라고도 하는데,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제위를 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고종_양위_사건 고종 양위 사건, 위키백과]</ref>
 
고종 양위 사건(高宗讓位事件)이라고도 하는데,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제위를 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고종_양위_사건 고종 양위 사건, 위키백과]</ref>
  
1907년 伊잡지에 실린 日帝 ‘순종 대리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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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시대는 억지스럽게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시절 일제가 대리인을 내세워 열었던 순종황제 즉위식 모습을 생생히 담은 그림이 발견돼 11일 공개됐다. 1907년 7월 20일 서울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중화전에서 열렸던 순종황제의 즉위식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7년 8월 4일자 표지에 실렸던 것. 순종황제가 아버지인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항의해 불참하자 일제가 대리인을 앉혀 놓고 즉위식을 열었음을 그림 속 황제 자리에 앉은 녹색 복장의 환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순종황제의 강제 즉위식 등 대한제국 시절 전후의 모습을 보여 주는 희귀한 그림들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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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 --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7월 19일
서울대 이태진(李泰鎭·한국사) 교수는 11일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인 캐럴 쇼 씨가 최근 미국에서 찾아내 기탁한 그림들을 공개했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7년 8월 4일자 표지에 실린 순종황제 즉위식 그림. 일제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뒤 1907년 7월 20일 병력을 동원해 서울 경운궁(慶運宮·현재의 덕수궁)을 포위한 채 [[중화전]]에서 순종황제의 즉위식을 가졌다. 그러나 순종황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즉위를 받아들일 없다는 이유에서 참석을 거부한 것이다. 일제는 순종황제 대신 어좌(御座)에 대리인을 앉혀 즉위식을 강행했다. 이런 사실은 그간 사료를 통해 알려져 온 바이지만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확인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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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 첫번째 기사이다. 고종은 대리청정에 대한 조칙을 내렸을뿐 선위(양위)는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기록했다. 훗날 '순종실록'편찬할 때 일본의 강압에 의해 '선위'라는 단어를 끼어 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밖에 없는 부분이다.
  
교수는 “초록색 관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어좌에 앉은 사람은 환관(宦官)으로 추정된다”면서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에 의한 강제 즉위식 상황을 보여 주는 귀중한 그림 사료”라고 평가했다.<ref>[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이광표, 日帝, 순종 항의에 환관 대신 앉혀, 동아일보 2005-08-1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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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양위'를 끼워 넣었다는 정황은 일본 황제의 축하 전보 날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 황제는 7월 19일이 아니라 다음날인 7월 20일에야 "황제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해 충심으로 경하한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외교전보를 받은 후, 그의 보고대로 대리청정을 양위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느라 전보를 하루 늦게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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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순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도 7월 19일부터가 아니라 7월 22일부터다. 고종을 '태황제'로 봉존하는 절차를 밟아야 순종을 황제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절차를 거꾸로 끼워 맞추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먼저 이완용이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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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이번에 왕위를 주고받은 예전(禮典)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에 말미암은 것이니... -- 순종실록 즉위년(1907)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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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민심은 흉흉했다. 성난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친일 대신들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내부 대신(內部大臣) 임선준(任善準)은 “도성 안의 민심이 동요하고, 심지어는 대신에게 돌을 던지고 집을 불살라버리는 일이 날마다 발생" 한다며 서울의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윤을 해임하라는 건의를 했다.(실록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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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서도 친일대신들은 순종을 확실한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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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조서, 칙서, 아뢰는 글들에 ‘대리(代理)’라는 칭호는 ‘황제(皇帝)’라는 대호(大號)로 높여 부르는 것이 실로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되므로 신들은 같은 말로 호소합니다.”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을 받들어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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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윤비'도 황후로 진봉(進封)했다. 그런데도 순종은 고종때 사용하던 '광무' 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시대의 연호 사용이 훗날 '역사적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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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개정할 연호(年號)의 망단자(望單子)를 융희(隆熙)와 태시(太始)를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받든 주권(硃圈)에 융희 두 글자로 하라고 하였다.--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8월 2일 (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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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시대의 연호인 '융희'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 1907년 8월 3일부터 '순종실록'에 사용되었다. 같은 날, 고종이 태황제가 되는 절차가 끝났으니 거처하는 경운궁의 이름도 바뀌어야 한다며 덕수궁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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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은 '일그러진 절치 끼워 맞추기'의 마지막 절차인 즉위식 날자를 8월 27일로 정한다. 그리고 장소는, 대리청정 의식을 권정례로 거행했던 덕수궁 중화전이 아니라 외국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장소인 돈덕전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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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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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짐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임금 노릇하는 것만 어려울 뿐 아니라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이완용(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순종실록' 즉위년(1907, 대한 융희 1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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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이왕 외에 각부 대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나라만 생각하라"고 당부한 후,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복으로 갈아 입고 어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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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절 임금의 행사를 기록한 <일성록>에는 즉위식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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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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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복을 갖추고 나아가 탑(평어좌)에 앉았다. 총리대신(이완용)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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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이토 히로부미)이 하례사를 낭독하고 외국영사관 총대표가 하례사를 낭독하고 총리대신이 탑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서자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총리대신이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만세 삼창을 하자 문무백관도 일제히 따라서 삼창을 하였다.--<일성록> 1907년 8월 27일 (한국고전번역원 오세옥 연구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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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청정'과 '대리 양위' 를 앞세운 고종과 순종의 '항거'는 이렇게 끝났다.<ref>[http://www.sunjooschool.com/class_published_ModernPainting/7818, 순종은 즉위식을 두번 한 것일까?, 김선주학교 2010-11-25]</ref>
  
 
==Semantic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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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8일 (목) 09:13 판

Definition

【1907년】. 순종(純宗)은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정객의 매국 행위로 왕위를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4년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기간(재위:1907∼1910)에 국권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강점 공작으로 제약을 받았다.[1] 고종 양위 사건(高宗讓位事件)이라고도 하는데,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제위를 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2]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시대는 억지스럽게 시작되었다.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 --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7월 19일

'순종실록' 첫번째 기사이다. 고종은 대리청정에 대한 조칙을 내렸을뿐 선위(양위)는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기록했다. 훗날 '순종실록'을 편찬할 때 일본의 강압에 의해 '선위'라는 단어를 끼어 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양위'를 끼워 넣었다는 정황은 일본 황제의 축하 전보 날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 황제는 7월 19일이 아니라 다음날인 7월 20일에야 "황제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해 충심으로 경하한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외교전보를 받은 후, 그의 보고대로 대리청정을 양위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느라 전보를 하루 늦게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신하들이 순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도 7월 19일부터가 아니라 7월 22일부터다. 고종을 '태황제'로 봉존하는 절차를 밟아야 순종을 황제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절차를 거꾸로 끼워 맞추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먼저 이완용이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이번에 왕위를 주고받은 예전(禮典)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에 말미암은 것이니... -- 순종실록 즉위년(1907) 7월 21일

당시 민심은 흉흉했다. 성난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친일 대신들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내부 대신(內部大臣) 임선준(任善準)은 “도성 안의 민심이 동요하고, 심지어는 대신에게 돌을 던지고 집을 불살라버리는 일이 날마다 발생" 한다며 서울의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윤을 해임하라는 건의를 했다.(실록 7월 21일)

이런 와중에서도 친일대신들은 순종을 확실한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추진한다.

이제부터 조서, 칙서, 아뢰는 글들에 ‘대리(代理)’라는 칭호는 ‘황제(皇帝)’라는 대호(大號)로 높여 부르는 것이 실로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되므로 신들은 같은 말로 호소합니다.”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을 받들어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7월 22일

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윤비'도 황후로 진봉(進封)했다. 그런데도 순종은 고종때 사용하던 '광무' 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시대의 연호 사용이 훗날 '역사적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개정할 연호(年號)의 망단자(望單子)를 융희(隆熙)와 태시(太始)를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받든 주권(硃圈)에 융희 두 글자로 하라고 하였다.--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8월 2일 (양력)

순종 시대의 연호인 '융희'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 1907년 8월 3일부터 '순종실록'에 사용되었다. 같은 날, 고종이 태황제가 되는 절차가 끝났으니 거처하는 경운궁의 이름도 바뀌어야 한다며 덕수궁으로 바꿨다.

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은 '일그러진 절치 끼워 맞추기'의 마지막 절차인 즉위식 날자를 8월 27일로 정한다. 그리고 장소는, 대리청정 의식을 권정례로 거행했던 덕수궁 중화전이 아니라 외국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장소인 돈덕전으로 정했다.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중략 -- 아! 짐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임금 노릇하는 것만 어려울 뿐 아니라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이완용(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순종실록' 즉위년(1907, 대한 융희 1년) 8월 27일

순종은 이왕 외에 각부 대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나라만 생각하라"고 당부한 후,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복으로 갈아 입고 어좌에 앉았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절 임금의 행사를 기록한 <일성록>에는 즉위식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대례복을 갖추고 나아가 탑(평어좌)에 앉았다. 총리대신(이완용)이 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

통감(이토 히로부미)이 하례사를 낭독하고 외국영사관 총대표가 하례사를 낭독하고 총리대신이 탑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서자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총리대신이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만세 삼창을 하자 문무백관도 일제히 따라서 삼창을 하였다.--<일성록> 1907년 8월 27일 (한국고전번역원 오세옥 연구원 번역)

'대리청정'과 '대리 양위' 를 앞세운 고종과 순종의 '항거'는 이렇게 끝났다.[3]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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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_즉위식 Event 사건 순종 즉위식 1907 순종 즉위식 純宗 卽位式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순종_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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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La Tribuna Illustrata 1907년 8월 4일호 제15권 제31호 1면 순종의 즉위식을 그린 일러스트 http://archive.much.go.kr/archive/nrms/view.do?idnbr=PS01002025008-005798-00000
참고 동아일보 日帝, 순종 항의에 환관 대신 앉혀 (2005-08-12, 이광표 기자)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050812/8218504/1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 네이버캐스트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순종황제 즉위식 광경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59020&docId=3575313&categoryId=59034
참고 김선주 학교 >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근대 순종은 즉위식을 두번 한 것일까? http://www.sunjooschool.com/class_published_ModernPainting/7818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일제침략기 한국관련 사진그림엽서 DB 황태자전하 한국황제 즉위 / 한국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덕수궁 중명전에서 행차를 준비하는 가마를 인쇄한 엽서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7-KFR-1230003&callType=srch&dataID=AKS-2017-KFR-1230003_TEXT@0019
삽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http://archive.much.go.kr/nrms/pur005/2018/0716170014194/pur005798-00000-00001.jpg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type bibliographic index online resource url
논문 신동규, 「일제침략기 한국 사진그림엽서의 탄생과 엽서의 분류 및 시대구분법에 대한 소고」, 『일본문화연구』 71, 동아시아일본학회, 2019.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87391
논문 이정희, 「대한제국기 순종황제 즉위 행사와 음악」, 『한국음악사학회』 47, 2011.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17576
단행본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태학사, 2005. RISS http://www.riss.kr/link?id=M10091366
단행본 고연희·김동준·정민 외,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 읽기, 문화 그리기』, 태학사, 2013. RISS http://www.riss.kr/link?id=M13326174
단행본 정민·김동준 외,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태학사, 2016. RISS http://www.riss.kr/link?id=M12316603
단행본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총서 17), 2017.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archive/report/article_13768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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