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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중전이자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는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순정효황후는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ref>지두환, 『순종황제와 친인척』, 역사문화, 2009, 241쪽.</ref> 이후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머물렀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조선의 마지막 중전이자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는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순정효황후는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ref>지두환, 『순종황제와 친인척』, 역사문화, 2009, 241쪽.</ref> 이후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머물렀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47년 제헌 헌법에 따라 군주제가 폐지되고 1950년 4월 8일 <구왕궁재산처분법> 시행에 따라 중요한 궁전의 건물과 대지가 국가 소유가 되면서 윤황후는 낙선재를 지키기 위해 이승만 정부와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ref>이승만 정부 수립 후 구황실 재산은 1950년 4월 8일 제정된 <구왕궁재산처분법>에 적용받게 되었고, 또한 구왕궁 재산의 관리와 처분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결정하기 위해 국무총리의 감독하에 ‘임시 구왕궁 재산관리 위원회’를 설치하였다.</ref>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범어사와 부산 구포의 민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인민군이 낙선재 뜰 앞까지 와서 “누가 임금의 부인이냐!”고 협박을 하는 상황에서도 정좌한 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하며,<ref>1966년 2월 3일자 한국일보 〈윤비의 생애〉 기사 참조.</ref> 1950년 9월 29일, 이승만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순정효황후 역시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승만은 ‘창덕궁은 국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지내도록 하였다.<ref>1966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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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헌 헌법에 따라 군주제가 폐지되고 1950년 4월 8일 <구왕궁재산처분법> 시행에 따라 중요한 궁전의 건물과 대지가 국가 소유가 되면서 윤황후는 낙선재를 지키기 위해 이승만 정부와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ref>이승만 정부 수립 후 구황실 재산은 1950년 4월 8일 제정된 <구왕궁재산처분법>에 적용받게 되었고, 또한 구왕궁 재산의 관리와 처분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결정하기 위해 국무총리의 감독하에 ‘임시 구왕궁 재산관리 위원회’를 설치하였다.</ref>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범어사와 부산 구포의 민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인민군이 낙선재 뜰 앞까지 와서 “누가 임금의 부인이냐!”고 협박을 하는 상황에서도 정좌한 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하며,<ref>1966년 2월 3일자 한국일보 〈윤비의 생애〉 기사 참조.</ref> 1950년 9월 29일, 이승만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순정효황후 역시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승만은 ‘창덕궁은 국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에 있는 수인재(修仁齋)에서 지내도록 하였다.<ref>1966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참조.</ref>  
  
이후 윤비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4.19가 일어나기 몇 달 전, 구황실 사무총국장 오재경이 정릉으로 윤비를 찾아왔고, 5월 4일에 허정내각수반의 허가를 얻은 오재경 국장이 윤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6.25 이후 10년 만에 윤비는 낙선재로 올 수 있었다. 지금은 전소되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오재경 국장이 작성했던 구황실 재산목록에 의하면 구황실의 동산과 임야, 토지 등 막대한 부동산이 권력가들의 손에 다 들어갔다고 한다.<ref>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48-249쪽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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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윤비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4.19가 일어나기 몇 달 전, 구황실 사무총국장 오재경이 정릉으로 윤비를 찾아왔고, 5월 4일에 허정(許政) 내각수반(內閣首班)의 허가를 얻은 오재경 국장이 윤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6.25 이후 10년 만에 윤비는 낙선재로 올 수 있었다. 지금은 전소되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오재경 국장이 작성했던 구황실 재산목록에 의하면 구황실의 동산과 임야, 토지 등 막대한 부동산이 권력가들의 손에 다 들어갔다고 한다.<ref>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48-249쪽 참조.</ref>   
  
우여곡절 끝에 낙선재를 되찾은 윤비는 황실 일가를 불러들였다. 1962년에는 덕혜옹주가 귀국하였고, 1963년에는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부부가 귀국하면서 낙선재에서 머물렀다. 낙선재에 머물던 시절 윤비는 매일 좌선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깊은 불심으로 일과를 보냈으며, 처소에는 용성 스님의 한글 번역 경전과 작은 탱화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ref>2017년 6월 7일자 법보신문 〈순정효황후 대지월보살〉 기사 참조.</ref> 이후 윤비는 1966년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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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낙선재를 되찾은 윤비는 황실 일가를 불러들였다. 1962년에는 덕혜옹주가 귀국하였고, 1963년에는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부부가 귀국하면서 낙선재에서 머물렀다. 낙선재에 머물던 시절 윤비는 매일 좌선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깊은 불심으로 일과를 보냈으며, 처소에는 용성 스님의 한글 번역 경전과 작은 탱화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ref>이병두, <순정효황후 대지월보살>, 법보신문 2017년 6월 7일자 기사 참조.</ref> 이후 윤비는 1966년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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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구왕궁재산처분법> 시행에 따라 자산관리공사와 숙명여대 간 소송이 일기도 하였다. 2012년 4월, 자산관리공사는 숙명여대가 국유지 2만 평을 권한 없이 점유하고 있다며 73억원의 변상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숙명여대 측은 대한제국 당시 황실 재산 관리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이 1938년 교부한 무상사용승낙서를 근거로 들어 2012년 5월 서울행정법원에 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변상금 부과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한다.<ref>숙명여자대학교의 연혁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6년 5월, 조선황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慶善宮)로부터 용동궁지(龍洞宮趾, 구 교사 대지)와 경비보조를 받아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설립하고 5월 22일,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李貞淑) 여사가 취임하였다. 1911년 11월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로 개칭하였고, 1938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부터 학교 부지 6,471평을 무상임대 승낙을 받았다. 1948년 5월,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로 승격되었다."</ref> 2013년 1월,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3차례에 걸쳐 양측 주장과 변론을 청취하였고, 2018년 6월, 숙명여대가 구한말부터 사용하고 있던 국유지에 대해 자산관리공사가 부과한 변상금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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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2일 (목) 13:54 기준 최신판

조선황실의 마지막 공간 낙선재(樂善齋) 》 낙선재를 되찾기 위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비(尹妃)의 투쟁

Story

조선의 마지막 중전이자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는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순정효황후는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1] 이후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머물렀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47년 제헌 헌법에 따라 군주제가 폐지되고 1950년 4월 8일 <구왕궁재산처분법> 시행에 따라 중요한 궁전의 건물과 대지가 국가 소유가 되면서 윤황후는 낙선재를 지키기 위해 이승만 정부와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2]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범어사와 부산 구포의 민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인민군이 낙선재 뜰 앞까지 와서 “누가 임금의 부인이냐!”고 협박을 하는 상황에서도 정좌한 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하며,[3] 1950년 9월 29일, 이승만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순정효황후 역시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승만은 ‘창덕궁은 국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에 있는 수인재(修仁齋)에서 지내도록 하였다.[4]

이후 윤비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4.19가 일어나기 몇 달 전, 구황실 사무총국장 오재경이 정릉으로 윤비를 찾아왔고, 5월 4일에 허정(許政) 내각수반(內閣首班)의 허가를 얻은 오재경 국장이 윤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6.25 이후 10년 만에 윤비는 낙선재로 올 수 있었다. 지금은 전소되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오재경 국장이 작성했던 구황실 재산목록에 의하면 구황실의 동산과 임야, 토지 등 막대한 부동산이 권력가들의 손에 다 들어갔다고 한다.[5]

우여곡절 끝에 낙선재를 되찾은 윤비는 황실 일가를 불러들였다. 1962년에는 덕혜옹주가 귀국하였고, 1963년에는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부부가 귀국하면서 낙선재에서 머물렀다. 낙선재에 머물던 시절 윤비는 매일 좌선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깊은 불심으로 일과를 보냈으며, 처소에는 용성 스님의 한글 번역 경전과 작은 탱화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6] 이후 윤비는 1966년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한편, <구왕궁재산처분법> 시행에 따라 자산관리공사와 숙명여대 간 소송이 일기도 하였다. 2012년 4월, 자산관리공사는 숙명여대가 국유지 2만 평을 권한 없이 점유하고 있다며 73억원의 변상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숙명여대 측은 대한제국 당시 황실 재산 관리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이 1938년 교부한 무상사용승낙서를 근거로 들어 2012년 5월 서울행정법원에 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변상금 부과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한다.[7] 2013년 1월,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3차례에 걸쳐 양측 주장과 변론을 청취하였고, 2018년 6월, 숙명여대가 구한말부터 사용하고 있던 국유지에 대해 자산관리공사가 부과한 변상금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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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1-08A Story Episode 낙선재를 되찾기 위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비(尹妃)의 투쟁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1-08A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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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1-08A 순정효황후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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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Data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낙선재



서울 성북동 정릉



숙명여자대학교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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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국가법령정보센터 구왕궁재산처분법 https://www.law.go.kr/LSW/lsInfoP.do?lsiSeq=2620&_국가법령정보센터_구왕궁재산처분법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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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1. 지두환, 『순종황제와 친인척』, 역사문화, 2009, 241쪽.
  2. 이승만 정부 수립 후 구황실 재산은 1950년 4월 8일 제정된 <구왕궁재산처분법>에 적용받게 되었고, 또한 구왕궁 재산의 관리와 처분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결정하기 위해 국무총리의 감독하에 ‘임시 구왕궁 재산관리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3. 1966년 2월 3일자 한국일보 〈윤비의 생애〉 기사 참조.
  4. 1966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참조.
  5.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정음사, 1985, 248-249쪽 참조.
  6. 이병두, <순정효황후 대지월보살>, 법보신문 2017년 6월 7일자 기사 참조.
  7. 숙명여자대학교의 연혁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6년 5월, 조선황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慶善宮)로부터 용동궁지(龍洞宮趾, 구 교사 대지)와 경비보조를 받아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설립하고 5월 22일,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李貞淑) 여사가 취임하였다. 1911년 11월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로 개칭하였고, 1938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부터 학교 부지 6,471평을 무상임대 승낙을 받았다. 1948년 5월,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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