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22-R3-15A"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anyang2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1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4번째 줄: 4번째 줄:
 
E2022-R3-15A 삼척 hasContextualElement
 
E2022-R3-15A 삼척 hasContextualElement
 
E2022-R3-15A 경흥 hasContextualElement
 
E2022-R3-15A 경흥 hasContextualElement
E2022-R3-15A 덕릉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덕릉-德陵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조선_목조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종묘제례악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용비어천가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gkagmd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전주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이행리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다루가치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알동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적도설화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적지전설 hasContextualElement
 +
E2022-R3-15A 북도능전지 hasContextualElement
 +
 
  
 
#End
 
#End
11번째 줄: 23번째 줄:
  
 
==Story==
 
==Story==
기명은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악장명이다. 가사의 내용은 “아! 위대하고 거룩한 목조시여,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시도다. 귀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 우리 영원한 천명으로 터잡았도다.” 하였다. 목조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이 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린(李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로 보이므로, 전주 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 이의방이 피살되자 이인은 낙향했는데, 손자 이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
기명은 목조가 경흥으로 옮길 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아 천명으로 터 잡게 되었음을 칭송한 악장이다. 가사의 내용은 “아! 위대하고 거룩한 목조시여,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시도다. 귀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 우리 영원한 천명으로 터잡았도다.” 하였다. 목조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이 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린(李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로 보이므로, 전주 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 이의방이 피살되자 이인은 낙향했는데, 손자 이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 山城防護別監의 약칭)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 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다. 이에 1253년(고종 40)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 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다.
+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 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다. 이에 1253년(고종 40)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 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다.
 
고려 정부는 이안사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병마에 임명하고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의주(宜州)에서 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쌍성(쌍성: 지금의 永興)에 원(元)의 침략군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1254년 산길은 이 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해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다.
 
고려 정부는 이안사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병마에 임명하고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의주(宜州)에서 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쌍성(쌍성: 지금의 永興)에 원(元)의 침략군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1254년 산길은 이 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해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다.
 
그 뒤 1258년에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해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이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결국 이안사는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겼다.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그 뒤 1258년에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해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이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결국 이안사는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겼다.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41번째 줄: 53번째 줄:
 
| [[E2022-R3-15A]] || [[경흥]] || [[isRelatedTo]] || ||  
 
| [[E2022-R3-15A]] || [[경흥]] || [[isRelatedTo]] || ||  
 
|-
 
|-
| [[E2022-R3-15A]] || [[덕릉]] || [[isRelatedTo]] || ||  
+
| [[E2022-R3-15A]] || [[적도설화]] || [[isRelatedTo]] || ||
 +
|-
 +
| [[E2022-R3-15A]] || [[적지전설]] || [[isRelatedTo]] || ||
 +
|-
 +
| [[E2022-R3-15A]] || [[북도능전지]] || [[isRelatedTo]] || ||
 +
|-
 +
| [[E2022-R3-15A]] || [[덕릉-德陵]] || [[isRelatedTo]] || ||
 +
|-
 +
| [[이안사]] || [[삼척]] || [[livesIn]] || ||
 +
|-
 +
| [[이안사]] || [[덕릉-德陵]] || [[wasBuriedIn]] || ||
 +
|-
 +
| [[덕릉]] || [[경흥]] || [[formerLocation]] || ||
 +
|-
 +
| [[이안사]] || [[조선_목조]] || [[hasNewName]] || ||
 +
|-
 +
| [[이안사]] || [[조선_익조]] || [[hasDescendant]] || ||
 +
|-
 +
| [[이성계]] || [[적지전설]] || [[appearsIn]] || ||
 +
|-
 +
| [[이안사]] || [[이성계]] || [[hasDescendant]] || ||
 +
|-
 +
| [[조선_익조]] || [[적도설화]] || [[appearsIn]] || ||
 +
|-
 +
| [[적도설화]] || [[북도능전지]] || [[isDepictedin]] || ||
 +
|-
 +
| [[덕릉-德陵]] || [[북도능전지]]|| [[isDepictedin]] || ||
 +
|-
 +
| [[이안사]] || [[전주]] || [[livesIn]] || ||
 +
|-
 +
| [[조선_목조]] || [[종묘제례악]] || [[isDepictedin]] || ||
 +
|-
 +
| [[조선_목조]] || [[용비어천가]]|| [[isDepictedin]] || ||
 +
|-
 +
| [[이안사]] || [[이행리]] || [[hasSon]] || ||
 +
|-
 +
| [[이안사]] || [[다루가치]] || [[servesAs]] || ||
 +
|-
 +
| [[덕릉]] || [[함흥]] || [[currentLocation]] || ||  
 
|-
 
|-
| [[E2022-R3-15A]] || [[]]   || [[isRelatedTo]] || ||  
+
| [[이안사]] || [[알동]] || [[livesIn]] || ||
 
|-
 
|-
| [[]] || [[]] || [[]] || ||  
+
| [[이성계]] || [[적도설화]] || [[appearsIn]] || ||  
 
|-
 
|-
 
|}
 
|}
56번째 줄: 106번째 줄:
 
! type || resource || title || description/caption || URL
 
! type || resource || title || description/caption || URL
 
|-
 
|-
|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 서울지명사전 || 거둥고개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06348&cid=43722&categoryId=43722
 
 
|}
 
|}
  

2022년 12월 21일 (수) 04:23 기준 최신판

종묘제례악에 가수가 있었다 》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기명

Story

기명은 목조가 경흥으로 옮길 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아 천명으로 터 잡게 되었음을 칭송한 악장이다. 가사의 내용은 “아! 위대하고 거룩한 목조시여,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시도다. 귀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 우리 영원한 천명으로 터잡았도다.” 하였다. 목조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이 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린(李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로 보이므로, 전주 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 이의방이 피살되자 이인은 낙향했는데, 손자 이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 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다. 이에 1253년(고종 40)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 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다. 고려 정부는 이안사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병마에 임명하고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의주(宜州)에서 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쌍성(쌍성: 지금의 永興)에 원(元)의 침략군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1254년 산길은 이 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해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다. 그 뒤 1258년에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해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이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결국 이안사는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겼다.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class groupName partName label hangeul hanja english infoUrl iconUrl note
E2022-R3-15A Story Episode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기명 목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기명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3-15A 2022:임민혁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note
E2022-R3-15A 이안사 isRelatedTo
E2022-R3-15A 삼척 isRelatedTo
E2022-R3-15A 경흥 isRelatedTo
E2022-R3-15A 적도설화 isRelatedTo
E2022-R3-15A 적지전설 isRelatedTo
E2022-R3-15A 북도능전지 isRelatedTo
E2022-R3-15A 덕릉-德陵 isRelatedTo
이안사 삼척 livesIn
이안사 덕릉-德陵 wasBuriedIn
덕릉 경흥 formerLocation
이안사 조선_목조 hasNewName
이안사 조선_익조 hasDescendant
이성계 적지전설 appearsIn
이안사 이성계 hasDescendant
조선_익조 적도설화 appearsIn
적도설화 북도능전지 isDepictedin
덕릉-德陵 북도능전지 isDepictedin
이안사 전주 livesIn
조선_목조 종묘제례악 isDepictedin
조선_목조 용비어천가 isDepictedin
이안사 이행리 hasSon
이안사 다루가치 servesAs
덕릉 함흥 currentLocation
이안사 알동 livesIn
이성계 적도설화 appearsIn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caption URL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id type bibliographic index online resource url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Story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