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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원년에 이르러 황제국의 7묘제(廟制)에 따른 황제로서의 묘호추봉이 완성되어 황권의 정통성은 확립되었다. 황권은 이렇게 조상의 정통 계승에 근원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선원전의 어진 또한 중시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출범 준비과정에서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을 경운궁으로 이봉하였다. 이때 태조의 영정이 빠져있었다. 이를 이모하기 위해 1900년 4월에 준원전의 영정을 옮겨왔다. 이모 장소는 흥덕전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선원전 정전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7개 실의 어진을 꺼내지 못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고종은 어진모사도감과 증건도감 설치하였다. 다시 흥덕전에서 이모작업에 들어가 완성한 초본을 고종이 직접 봉심하고 초본을 모사하여 정본을 완성한 다음, 장축하고 이를 봉심하고 나서 고종이 직접 표제를 썼다. 이를 중화전에 임시 봉안하고, 증건된 선원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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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원년에 이르러 황제국의 7묘제(廟制)에 따른 황제로서의 묘호추봉이 완성되어 황권의 정통성은 확립되었다. 황권은 이렇게 조상의 정통 계승에 근원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선원전의 어진 또한 중시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출범 준비과정에서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을 경운궁으로 이봉하였다. 이때 태조의 영정이 빠져있었다. 이를 이모하기 위해 1900년 4월에 준원전의 영정을 옮겨왔다. 이모 장소는 흥덕전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선원전 정전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7개 실의 어진을 꺼내지 못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고종은 어진모사도감과 증건도감을 설치하였다. 다시 흥덕전에서 이모작업에 들어가 완성한 초본을 고종이 직접 봉심하고 초본을 모사하여 정본을 완성한 다음, 장축하고 이를 봉심하고 나서 고종이 직접 표제를 썼다. 이를 중화전에 임시 봉안하고, 증건된 선원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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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2일 (수) 23:53 기준 최신판

고종 7대조의 황제 추봉과 어진 모사 》 어진 모사와 선원전

Story

순종 원년에 이르러 황제국의 7묘제(廟制)에 따른 황제로서의 묘호추봉이 완성되어 황권의 정통성은 확립되었다. 황권은 이렇게 조상의 정통 계승에 근원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선원전의 어진 또한 중시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출범 준비과정에서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을 경운궁으로 이봉하였다. 이때 태조의 영정이 빠져있었다. 이를 이모하기 위해 1900년 4월에 준원전의 영정을 옮겨왔다. 이모 장소는 흥덕전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선원전 정전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7개 실의 어진을 꺼내지 못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고종은 어진모사도감과 증건도감을 설치하였다. 다시 흥덕전에서 이모작업에 들어가 완성한 초본을 고종이 직접 봉심하고 초본을 모사하여 정본을 완성한 다음, 장축하고 이를 봉심하고 나서 고종이 직접 표제를 썼다. 이를 중화전에 임시 봉안하고, 증건된 선원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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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1-50C Story Episode 어진 모사와 선원전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1-5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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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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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ART001109214 논문 신명호, 「대한제국기의 어진(御眞) 제작」, 『조선시대사학보』33, 조선시대사학회, 2005.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109214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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