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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 1950년】. 김규식(金奎植). 독립운동가. 정치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 집에 입양되어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았다. 언더우드 목사의 주선으로 독립신문사에 입사하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서재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1897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경신학교, Y.M.C.A 학관, 배재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에 전력하였다. 1913년 4월 중순 상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활동할 인물로 선발되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선생은 외무 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948년 1월 유엔한국위원단의 서울도착을 계기로 남북 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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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 1920년】. 정운복(鄭雲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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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경성일보 주필, 제국신문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생애 및 활동사항1870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했다.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1895년 오사카 상업학교에서 수학했고, 1897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유럽지역을 돌아보는 등 당시로서는 드문 경험을 한 1899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친일 개화파로 활동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3년간 귀양살이를 했으며, 1904년 사면 조치로 상경했다. 이때부터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도왔고, 공진회 회장,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회원 등으로 활발히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러일 전쟁 때의 공로는 통감부가 인정하여 1908년 은사금 30엔을 받았다. 1906년에는 이갑과 함께 서북학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경성일보』의 한글판 주필을 맡으며 언론계에 입문했다. 일본인이 사장을 맡은 이 신문은 일본의 순조로운 대한제국 합병을 위한 선전용 언론이었다. 이듬해 『제국신문』 주필이 되었고, 한일병합 조약 체결 전 공공연히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서양 강국에게 점령당하니 일본의 동정을 구해야 한다면서 한일 병합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한일병합 전부터 일본의 돈을 받는 정탐꾼이라는 세평이 있었는데, 1918년에는 정식으로 조선총독부의 경무부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매일신보 주최의 일본구주시찰단 부단장으로 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의 신사를 시찰한 뒤 연설을 통해 일선융화(日鮮融和)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논리를 그대로 홍보했다. 친일 활동에 대한 세평은 좋지 않아 3·1 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 김동순과 윤익중·김상옥 등이 친일파 밀정으로 이름이 알려져 민원식과 함께 친일 경찰 김태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을 조직했다가 살해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계획한 대동단의 전협을 의친왕과 연결시켜주었다가 발각되어 조사를 받았다. 수사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적극 협력했다. 정운복의 협조에 따라 전협·한기동·송세호 등 이 사건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복역하게 했다. 1920년 12월 5일 사망했다.정운복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38∼24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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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사회단체사론고』(조항래,형설출판사,1972)『한국신문사』(최준,일조각,1960)「대한협회에 관한 연구」(이현종,『아세아연구』39,1970)「한말관인의 경력일반」(최영희,『사학연구』21,1969)「대한자강회에 대하여」(이현종,『진단학보』29·30합병호,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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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운복(鄭雲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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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4일 (화) 01:55 판

Definition

【1870년 ~ 1920년】. 정운복(鄭雲復) 대한제국기 경성일보 주필, 제국신문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생애 및 활동사항1870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했다.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1895년 오사카 상업학교에서 수학했고, 1897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유럽지역을 돌아보는 등 당시로서는 드문 경험을 한 뒤 1899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친일 개화파로 활동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3년간 귀양살이를 했으며, 1904년 사면 조치로 상경했다. 이때부터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도왔고, 공진회 회장,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회원 등으로 활발히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러일 전쟁 때의 공로는 통감부가 인정하여 1908년 은사금 30엔을 받았다. 1906년에는 이갑과 함께 서북학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경성일보』의 한글판 주필을 맡으며 언론계에 입문했다. 일본인이 사장을 맡은 이 신문은 일본의 순조로운 대한제국 합병을 위한 선전용 언론이었다. 이듬해 『제국신문』 주필이 되었고, 한일병합 조약 체결 전 공공연히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서양 강국에게 점령당하니 일본의 동정을 구해야 한다면서 한일 병합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한일병합 전부터 일본의 돈을 받는 정탐꾼이라는 세평이 있었는데, 1918년에는 정식으로 조선총독부의 경무부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매일신보 주최의 일본구주시찰단 부단장으로 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의 신사를 시찰한 뒤 연설을 통해 일선융화(日鮮融和)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논리를 그대로 홍보했다. 친일 활동에 대한 세평은 좋지 않아 3·1 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 김동순과 윤익중·김상옥 등이 친일파 밀정으로 이름이 알려져 민원식과 함께 친일 경찰 김태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을 조직했다가 살해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계획한 대동단의 전협을 의친왕과 연결시켜주었다가 발각되어 조사를 받았다. 수사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적극 협력했다. 정운복의 협조에 따라 전협·한기동·송세호 등 이 사건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복역하게 했다. 1920년 12월 5일 사망했다.정운복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38∼24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운복(鄭雲復))]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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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복 Actor 인물 정운복(鄭雲復) 정운복 鄭雲復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정운복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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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복 [[ ]] isRelatedTo
김규식 독립협회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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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파리강화회의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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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배재학당 isRelatedTo
김규식 김일성 knows
김규식 김두봉 knows
김규식 통일독립촉성회 isRelatedTo
김규식 경신학교 isRelatedTo
김규식 Y.M.C.A 학관 isRelatedTo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caption URL
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규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781
해설 위키백과 김규식 https://ko.wikipedia.org/wiki/김규식
해설 두산백과 김규식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23844
해설 네이버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독립운동가 김규식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0195&cid=59011&categoryId=59011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한말사회단체사론고』(조항래,형설출판사,1972)『한국신문사』(최준,일조각,1960)「대한협회에 관한 연구」(이현종,『아세아연구』39,1970)「한말관인의 경력일반」(최영희,『사학연구』21,1969)「대한자강회에 대하여」(이현종,『진단학보』29·30합병호,196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운복(鄭雲復))]
type bibliographic index online resource url
논문 장회견. 「尤史 金奎植의 敎育 生涯와 韓國語學 硏究」, 『규장각』4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83193
논문 최덕규. 「파리강화회의(1919)와 김규식의 한국독립외교 -고종황제의 자주독립외교의 계보를 중심으로-」,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35, 2015.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12894
논문 윤경로. 「김규식의 신앙과 학문 그리고 항일민족운동」, 『한국 기독교와 역사』34,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11.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36428
논문 황의서. 「김구와 김규식의 정치노선 비교연구- 해방정국에서 통일민족국가수립문제를 중심으로 -」, 『윤리연구』54, 한국윤리학회, no.3 (2003.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864457
논문 황의서. 「해방 후 김규식의 정치적 행동 재평가」, 『윤리연구』50-2, 한국윤리학회, 2002.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864271
논문 정병준.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85472
논문 오일환. 「3·1운동 전후 시기 김규식의 독립 외교활동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13-2, 한국민족사상학회, 201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85472
논문 신효승. 「1919년 파리 강화회의와 김규식의 외교 독립운동」, 『역사와 실학』 69, 역사실학회, 201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99469
단행본 이준식, 『김규식-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바친 삶』, 역사공간, 2014.
단행본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통일, 독립의 길 가다 1, 2』, 논형, 2007.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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