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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태조 5) 9월 24일에 태조는 약 18km 둘레의 도성을 상틑 역사를 끝마치고 인정(人丁)을 돌려보냈다. 이곳 저곳을 수리한 뒤 각 문의 월단누합을 지었다. 그리고 각 문에 이름을 붙였다. 4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사덕(四德)인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한 글자씩을 따서 붙였다. 동쪽은 인()을 상징하는 흥인문이다. 서쪽은 의()를 상징하는 돈의문이다. 남쪽은 예(禮)를 상징하는 숭례문이다. 단지 북쪽은 지(智)자가 아닌 꾀 정(靖)자를 써서 숙정문이라고 이름붙였다. 두 글자가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에 변화를 준 듯하다. 그리고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한다.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한다.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한다.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9024_002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9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ref><br/> 이 중 숭례문은 국보 1호이다. "숭례문을 국보 1호를 지정한 것은 공교롭게도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조일전쟁(1592년) 당시 왜병이 이 숭례문을 통해 조선의 도성에 입성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미를 두고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했다. 국보의 번호는 유물의 가치 여부에 따라 붙여진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순서에 따라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숭례문은 국보 1호가 되었고, 그 후에 순서대로 국보로 지정할 때마다 번호가 붙여져 오늘의 국보 체계에 이르게 되었다. <ref>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0794.html#csidx66299d41440459a82858ccb21e4445d , [필진] 숭례문이 왜 국보 1호일까, 한겨레신문 2020-04-08] </ref><br/>
1906년 4월 25일, [[경운궁중건도감]] 의궤당상 [[이재극|이재극(李載克)]]이 [[조선_고종|고종]]에게  “경운궁(慶運宮) [[대안문|대안문(大安門)]]수리를 음력 4월 12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고 함으로써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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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문 가운데 현판이 세로로 쓰여져 있는 것은 숭례문이 유일하다. 이성계가 서울로 천도하기 위해 도성을 정하고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남향으로 안치하려다 보니,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관악산은 마치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부터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보았다.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방책이 필요했다. 풍수에서 화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지만 관악산에서 뿜어내는 화기를 한강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다. 그리고 문의 현판을 종서(縱書)로 써 세로로 세우게 하였다. 현판 이름도 화기를 누르라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원래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숭례문의 례() 자는 오행으로 볼 때 불()에 해당된다. 여기에 '높인다', '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진 '숭()' 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 되도록 했다.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화재방지책인 셈이다. <ref> https://www.breaknews.com/266055, 정명훈,  숭례문 현판, 왜 세로로 걸었을까, BreakNews 2013-05-06] </ref><br/>
[[경운궁중건도감의궤|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의 [[대한문_상량문|대한문(大漢門)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漢陽)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하였다. <ref>[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 대한문 상량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ref> [[대한문|대한문(大漢門)]]이라는 이름은 한양(漢陽)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임을 알 수 있다.<ref>[http://www.deoksugung.go.kr/board/view?no=533&board_id=FAQ 대한문 명칭에 대하여, 덕수궁소식]</ref><br/>
 
그런데, 세간에는 일이 [[배정자|배정자(裵貞子)]]라는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의 내연녀와 관련이 있다는 속설이 돌았다.<br/>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서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대한문’ 관련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자가 계집 녀()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ref>[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이기환,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경향신문 2020-04-08]</ref><br/>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이 실각한 [[흥선대원군_이하응|흥선대원군]]의 추종세력이란 이유로 처형당한 후 1885년에 일본으로 보내졌다. 1887년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br/>
 
배정자 이외에도 러시아공사 [[카를_베베르|베베르]]의 부인과 그의 언니 [[앙트와네트_손탁|앙트와네트 손탁]]도 이 시절 대안문을 자주 드나들던, 모자 쓴 양장의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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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6일 (금) 23:24 기준 최신판

숭례문의 역사 》숭례문 현판의 글자가 세로쓰기로 된 까닭

Story

1396년(태조 5) 9월 24일에 태조는 약 18km 둘레의 도성을 상틑 역사를 끝마치고 인정(人丁)을 돌려보냈다. 이곳 저곳을 수리한 뒤 각 문의 월단누합을 지었다. 그리고 각 문에 이름을 붙였다. 4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사덕(四德)인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한 글자씩을 따서 붙였다. 동쪽은 인(仁)을 상징하는 흥인문이다. 서쪽은 의(義)를 상징하는 돈의문이다. 남쪽은 예(禮)를 상징하는 숭례문이다. 단지 북쪽은 지(智)자가 아닌 꾀 정(靖)자를 써서 숙정문이라고 이름붙였다. 두 글자가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에 변화를 준 듯하다. 그리고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한다.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한다.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한다.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1]
이 중 숭례문은 국보 1호이다. "숭례문을 국보 1호를 지정한 것은 공교롭게도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조일전쟁(1592년) 당시 왜병이 이 숭례문을 통해 조선의 도성에 입성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미를 두고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했다. 국보의 번호는 유물의 가치 여부에 따라 붙여진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순서에 따라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숭례문은 국보 1호가 되었고, 그 후에 순서대로 국보로 지정할 때마다 번호가 붙여져 오늘의 국보 체계에 이르게 되었다. [2]
8개의 문 가운데 현판이 세로로 쓰여져 있는 것은 숭례문이 유일하다. 이성계가 서울로 천도하기 위해 도성을 정하고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남향으로 안치하려다 보니,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관악산은 마치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부터 이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보았다.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방책이 필요했다. 풍수에서 화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지만 관악산에서 뿜어내는 화기를 한강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다. 그리고 문의 현판을 종서(縱書)로 써 세로로 세우게 하였다. 현판 이름도 화기를 누르라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원래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숭례문의 례(禮) 자는 오행으로 볼 때 불(火)에 해당된다. 여기에 '높인다', '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진 '숭(崇)' 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 되도록 했다.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화재방지책인 셈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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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4-002 Story Episode 숭례문 현판의 글자가 세로쓰기로 된 까닭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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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1.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9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
  2. , [필진 숭례문이 왜 국보 1호일까, 한겨레신문 2020-04-08]
  3. https://www.breaknews.com/266055, 정명훈, 숭례문 현판, 왜 세로로 걸었을까, BreakNews 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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