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3-009"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tory) |
|||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 | ||
+ | #Links | ||
+ | E3-009 환구단 hasContextualElement | ||
+ | E3-009 조선호텔 hasContextualElement | ||
+ | E3-009 남별궁 hasContextualElement | ||
+ | |||
+ | #End | ||
+ | --> | ||
=''' 환구단을 차지한 조선호텔 '''= | =''' 환구단을 차지한 조선호텔 '''= | ||
− | |||
− | |||
− | |||
==Story== | ==Story== | ||
− | 환구단은 고종황제와 함께 태어났다. 환구단에서 천제를 | + | 환구단은 고종황제와 함께 태어났다. 황제인 이상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내야 하므로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가 되는 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도구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3008_001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윤5월 20일 : 원구단을 건축하도록 명하다]</ref><br/>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환구단은 고종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이 되었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호텔도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의 증가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무엇보다 총독부가 환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ref>[정영효, 「조선호텔’ - 제국의 이상과 식민지 조선의 표상」, 『동악어문학』 55, 동악어문학회, 2010.]</ref><br/>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400300&code=kc_age_40 우리역사넷> 환구단: 고종,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ref><br/> 더욱이 이 호텔 자리는 환구단이 건립되기 이전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 자리였다. <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352&docId=1804351&categoryId=49352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 남별궁 터]</ref><br/> |
− | |||
− |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 ||
− | |||
− | |||
− | <ref>[http:// | ||
− | |||
− | |||
− | |||
68번째 줄: | 65번째 줄: | ||
<references/> | <references/> | ||
− | == | + | ==Story Network Graph== |
+ | |||
+ | {{StoryGraph | key=E3-009}} | ||
− | [[분류:한양도성타임머신 2021]] | + | [[분류:한양도성타임머신 2021]] [[분류:Story]] [[분류:김혁]] |
− | [[분류:Story]] | ||
− | [[분류:김혁]] |
2023년 5월 11일 (목) 01:06 기준 최신판
목차
환구단을 차지한 조선호텔
Story
환구단은 고종황제와 함께 태어났다. 황제인 이상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내야 하므로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가 되는 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도구였다.[1]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환구단은 고종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이 되었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호텔도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의 증가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무엇보다 총독부가 환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2]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3]
더욱이 이 호텔 자리는 환구단이 건립되기 이전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 자리였다. [4]
Node Description
id | class | groupName | partName | label | hangeul | hanja | english | infoUrl | iconUrl | |
---|---|---|---|---|---|---|---|---|---|---|
E3-009 | Story | Episode | 환구단을 차지한 조선호텔 | 환구단을 차지한 조선호텔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3-009 |
Contextu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note |
---|---|---|---|---|
E3-009 | 환구단 | isRelatedTo | ||
E3-009 | 조선호텔 | isRelatedTo | ||
E3-009 | 물산공진회 | isRelatedTo | ||
E3-009 | 남별궁 | isRelatedTo |
Web Resource
type | resource | title | description/caption | URL |
---|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type | bibliographic index | online resource | url |
논문 | 정영효, 「조선호텔’ - 제국의 이상과 식민지 조선의 표상」, 『동악어문학』 55, 동악어문학회, 2010.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73854 |
논문 | 김정선. 「조선호텔 벽화와 식민지 근대 벽화의 公的 기능」, 『미술사학연구』 290291, 한국미술사학회, 2016.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52570 |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 ↑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윤5월 20일 : 원구단을 건축하도록 명하다
- ↑ [정영효, 「조선호텔’ - 제국의 이상과 식민지 조선의 표상」, 『동악어문학』 55, 동악어문학회, 2010.]
- ↑ 우리역사넷> 환구단: 고종,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 ↑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 남별궁 터
Story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