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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2-28 | 헤경궁의 선택, 가효당(嘉孝堂) 현판을 받다]] 》혜경궁과 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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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친영이란 혼인 육례의 하나로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자신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조선은 초기부터 친영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때까지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는 남귀여가혼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 때 양녕대군이 처음으로 김한로 집에 가서 친영을 했다고 하는데 격식이 제대로 갖추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후에 친영의주를 다시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이후 왕실에서 친영을 행한 기록이 간간히 나오지만 중종 문정왕후의 친영까지 제대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정왕후 친영을 기점으로 친영의례가 갖추어지고, 왕비나 세자빈의 혼례는 친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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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한은 임오화변 당시 좌의정으로 현장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여러차례 왕에게 중단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에서 혜경궁이 아버지 홍봉한을 비호하기 위해 현장에 없었다고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762년 5월에 해직되어 잠시 동교에 나가 있던 것은 사실이나 곧 복직되어 윤5월 사건 당시에는 관직생활 중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 혜경궁과 세손 정조가 사가에 나가 있을 때 홍봉한이 바쁜 관직생활로 세손을 돌봐줄 수 없었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홍봉한은 사위 사도세자가 의대증으로 힘들어 할 옷을 계속 보내주는 등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다만 사도세자의 병이 극에 달했을 때는 혜경궁과 함께 세손의 앞날을 더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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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8일 (수) 02:05 기준 최신판


혜경궁의 선택, 가효당(嘉孝堂) 현판을 받다 》혜경궁과 홍봉한

Story

홍봉한은 임오화변 당시 좌의정으로 현장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여러차례 왕에게 중단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에서 혜경궁이 아버지 홍봉한을 비호하기 위해 현장에 없었다고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762년 5월에 해직되어 잠시 동교에 나가 있던 것은 사실이나 곧 복직되어 윤5월 사건 당시에는 관직생활 중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 혜경궁과 세손 정조가 사가에 나가 있을 때 홍봉한이 바쁜 관직생활로 세손을 돌봐줄 수 없었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홍봉한은 사위 사도세자가 의대증으로 힘들어 할 때 옷을 계속 보내주는 등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다만 사도세자의 병이 극에 달했을 때는 혜경궁과 함께 세손의 앞날을 더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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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R2-28A Story Storyline 혜경궁과 홍봉한 혜경궁과 홍봉한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0-R2-28A 2022: 이순구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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