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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부터 시작된 구화폐의 정리사업. 화폐정리, 즉 화폐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구백동화의 정리작업이었다.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통되고 있던 구백동화의 유통량은 전환국 주조발행액 약 1700만원(元), 기타 사주(私鑄)나 위조된 것이 600만원으로, 도합 2300만원으로서, 통화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화폐정리의 성공여부는 구백동화의 정리 여하에 달려 있었다.이에 한국정부는 1905년 6월 초에 탁지부령(度支部令)으로 ‘구백동화 교환에 관한 건’ 및 ‘구백동화 교환 처리순서’를 공포하고, 7월 초부터는 구백동화의 교환이 시작되었다.1908년 1월 탁지부령으로써 그 해 12월 말까지는 구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한이 끝난 뒤 6개월 동안에 한해 그것을 공용(公用)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정부당국은 각 농공은행(農工銀行) 및 지방 금융조합을 통해 구화를 매수하고, 또 상인들데게 교환조합을 결성시키고 수수료를 지급, 구화폐를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그러나 정부당국의 화폐정리에 대한 취지가 각 지방까지 충분히 주지, 선전되지 못해기 때문에 1909년 5월에 칙령으로써 구화폐의 공납 기한을 12월 말까지 연기하였다. 구백동화 교환을 개시해 기한이 끝날 때까지 회수된 총액수는 960만 8636환 64전이었다.상평통보[엽전]는 1678년(숙종 4) 이래 법화로 통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그것은 구백동화와는 달리 급격히 정리하려 하지 않고 1905년 7월 탁지부대신령으로 국고수납을 통해 환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1901년 이래로 다이이치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이 화폐정리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본다. 1905년의 「화폐조례」에서는 일본화폐의 국내 통용은 무조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 또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중앙금융기관으로서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은 공사 유통거래에서의 통용이 공인되었다.1909년 11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업무 일체가 인계되어 은행권도 계승되었다. 한국은행권이 발행될 때까지 다이이치은행권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이이치은행권은 시장의 유통계에서 경화(硬貨)의 유통량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이상과 같이, 한국정부가 일본세력의 적극 개입하에 추진한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는 창설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화폐제도 창설로 말미암아 농촌의 자연경제는 분해가 더욱 촉진되어 농민은 토지와 생활재료 및 노동수단으로부터 축출되고,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1904년 이래로 실시된 화폐정리, 즉 화폐제도 개혁과정에서 초래된 특이한 사태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상인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나타나는 금융상의 핍박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특히, 서울 종로의 상인들 사이에는 금융상의 혼란, 즉 전황(錢荒)이 일어나 경제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상인이 상점문을 닫고 도망가거나 혹은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한편, 정부당국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품질을 갑·을·병으로 구분해 갑종과 을종의 것은 매수하고, 품질이 나쁜 병종의 것은 매수하지 않았다. 당시 관주(官鑄) 백동화도 그러하였지만, 사주(私鑄) 또는 위조된 백동화의 수량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당국이 품질이 나쁜 백동화에 대해 무가치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 가운데에는 도산하거나 탕업(蕩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가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변화를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침략의 기반을 다지려는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 하에 추진되어 한국정부의 화폐에 대한 지배권이 사실상 일제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49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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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정리, 즉 화폐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구백동화의 정리작업이었다.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통되고 있던 구백동화의 유통량은 전환국 주조발행액 약 1700만원(元), 기타 사주(私鑄)나 위조된 것이 600만원으로, 도합 2300만원으로서, 통화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화폐정리의 성공여부는 구백동화의 정리 여하에 달려 있었다.이에 한국정부는 1905년 6월 초에 탁지부령(度支部令)으로 ‘구백동화 교환에 관한 건’ 및 ‘구백동화 교환 처리순서’를 공포하고, 7월 초부터는 구백동화의 교환이 시작되었다.1908년 1월 탁지부령으로써 그 해 12월 말까지는 구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한이 끝난 뒤 6개월 동안에 한해 그것을 공용(公用)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정부당국은 각 농공은행(農工銀行) 및 지방 금융조합을 통해 구화를 매수하고, 또 상인들데게 교환조합을 결성시키고 수수료를 지급, 구화폐를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그러나 정부당국의 화폐정리에 대한 취지가 각 지방까지 충분히 주지, 선전되지 못해기 때문에 1909년 5월에 칙령으로써 구화폐의 공납 기한을 12월 말까지 연기하였다. 구백동화 교환을 개시해 기한이 끝날 때까지 회수된 총액수는 960만 8636환 64전이었다.상평통보[엽전]는 1678년(숙종 4) 이래 법화로 통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그것은 구백동화와는 달리 급격히 정리하려 하지 않고 1905년 7월 탁지부대신령으로 국고수납을 통해 환수하기로 결정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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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1년 이래로 일본의 제일은행(다이이치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이 화폐정리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본다. 1905년의 「화폐조례」에서는 일본화폐의 국내 통용은 무조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 또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중앙금융기관으로서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은 공사 유통거래에서의 통용이 공인되었다.1909년 11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업무 일체가 인계되어 은행권도 계승되었다. 한국은행권이 발행될 때까지 다이이치은행권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이이치은행권은 시장의 유통계에서 경화(硬貨)의 유통량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한국정부가 일본세력의 적극 개입하에 추진한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는 창설될 수 있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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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근대화폐제도 창설로 말미암아 농촌의 자연경제는 분해가 더욱 촉진되어 농민은 토지와 생활재료 및 노동수단으로부터 축출되고,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1904년 이래로 실시된 화폐정리, 즉 화폐제도 개혁과정에서 초래된 특이한 사태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상인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나타나는 금융상의 핍박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특히, 서울 종로의 상인들 사이에는 금융상의 혼란, 즉 전황(錢荒)이 일어나 경제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상인이 상점문을 닫고 도망가거나 혹은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한편, 정부당국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품질을 갑·을·병으로 구분해 갑종과 을종의 것은 매수하고, 품질이 나쁜 병종의 것은 매수하지 않았다. 당시 관주(官鑄) 백동화도 그러하였지만, 사주(私鑄) 또는 위조된 백동화의 수량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당국이 품질이 나쁜 백동화에 대해 무가치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 가운데에는 도산하거나 탕업(蕩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가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변화를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침략의 기반을 다지려는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 하에 추진되어 한국정부의 화폐에 대한 지배권이 사실상 일제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49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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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6일 (금) 11:48 기준 최신판

개항기의 신식 화폐 》 화폐정리사업과 폐해

Story

화폐정리, 즉 화폐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구백동화의 정리작업이었다.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통되고 있던 구백동화의 유통량은 전환국 주조발행액 약 1700만원(元), 기타 사주(私鑄)나 위조된 것이 600만원으로, 도합 2300만원으로서, 통화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화폐정리의 성공여부는 구백동화의 정리 여하에 달려 있었다.이에 한국정부는 1905년 6월 초에 탁지부령(度支部令)으로 ‘구백동화 교환에 관한 건’ 및 ‘구백동화 교환 처리순서’를 공포하고, 7월 초부터는 구백동화의 교환이 시작되었다.1908년 1월 탁지부령으로써 그 해 12월 말까지는 구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한이 끝난 뒤 6개월 동안에 한해 그것을 공용(公用)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정부당국은 각 농공은행(農工銀行) 및 지방 금융조합을 통해 구화를 매수하고, 또 상인들데게 교환조합을 결성시키고 수수료를 지급, 구화폐를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그러나 정부당국의 화폐정리에 대한 취지가 각 지방까지 충분히 주지, 선전되지 못해기 때문에 1909년 5월에 칙령으로써 구화폐의 공납 기한을 12월 말까지 연기하였다. 구백동화 교환을 개시해 기한이 끝날 때까지 회수된 총액수는 960만 8636환 64전이었다.상평통보[엽전]는 1678년(숙종 4) 이래 법화로 통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그것은 구백동화와는 달리 급격히 정리하려 하지 않고 1905년 7월 탁지부대신령으로 국고수납을 통해 환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1901년 이래로 일본의 제일은행(다이이치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이 화폐정리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본다. 1905년의 「화폐조례」에서는 일본화폐의 국내 통용은 무조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 또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중앙금융기관으로서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은 공사 유통거래에서의 통용이 공인되었다.1909년 11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업무 일체가 인계되어 은행권도 계승되었다. 한국은행권이 발행될 때까지 다이이치은행권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이이치은행권은 시장의 유통계에서 경화(硬貨)의 유통량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한국정부가 일본세력의 적극 개입하에 추진한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는 창설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화폐제도 창설로 말미암아 농촌의 자연경제는 분해가 더욱 촉진되어 농민은 토지와 생활재료 및 노동수단으로부터 축출되고,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1904년 이래로 실시된 화폐정리, 즉 화폐제도 개혁과정에서 초래된 특이한 사태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상인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나타나는 금융상의 핍박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특히, 서울 종로의 상인들 사이에는 금융상의 혼란, 즉 전황(錢荒)이 일어나 경제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상인이 상점문을 닫고 도망가거나 혹은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한편, 정부당국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품질을 갑·을·병으로 구분해 갑종과 을종의 것은 매수하고, 품질이 나쁜 병종의 것은 매수하지 않았다. 당시 관주(官鑄) 백동화도 그러하였지만, 사주(私鑄) 또는 위조된 백동화의 수량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당국이 품질이 나쁜 백동화에 대해 무가치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 가운데에는 도산하거나 탕업(蕩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가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변화를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침략의 기반을 다지려는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 하에 추진되어 한국정부의 화폐에 대한 지배권이 사실상 일제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1]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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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1-R0-02E Story Episode 화폐정리사업과 폐해 화폐정리사업과 폐해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1-R0-0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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