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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1-41 | 단명한 정조의 늦둥이, 문효세자의 창덕궁]] 》 정조의 늦둥이 문효세자, 만 3세에 단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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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1-41 | 단명한 어린 세자, 문효세자의 창덕궁]] 》 정조의 기쁨, 문효세자의 탄생'''=
  
 
==Story==
 
==Story==
  
정조 임금에게는 아들이 2명 있었는데, 둘째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이고 첫째는 만 3세에 단명한 문효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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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다.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정조실록』 정조 6년 9월 7일)
 
 
문효세자가 태어날 당시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정조실록』 정조 6년 9월 7일)
 
 
 
문효세자가 탄생하자 정조는 창덕궁 희정당 동쪽에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왕세자궁인 중희당을 짓고 직접 현판을 썼다. 현판의 좌측에는 ‘홍재(弘齋, 정조의 호)’, ‘만기지가(萬機之暇, 임금의 온갖 정무 속에서도 잠시 여가를 즐긴다라는 뜻)’라는 음각∙양각의 낙관이 있다. 중희당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되어 있으며,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희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왕의 편전인 희정당과 대내의 정전인 대조전(大造殿)과 매우 가까웠고 창덕궁의 대비전인 통명전(通明殿)과도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였다. 또한 1785년(정조 9)에는 중희당의 동남쪽에 수강재(壽康齋)를 건립하였다.(『정조실록』 9년 8월 27일) 이는 왕의 서재이자 장차 왕세자의 학문과 관련한 장소로 염두에 두고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는 왕과 왕세자의 학문 공간을 가까이 두어 정치적 사상의 기반을 동일하게 하고자 하는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786년 문효세자는 홍역에 걸려서 5세(만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더불어 같은 해 9월 의빈 성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9월 14일)
 
  
이에 정조는 궁궐 가까운 곳에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원소를 조성하며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효창묘'라고 명명하였다. 효창묘의 묘소 조성에 관해서는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효창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기 때문에 그 고개는 ‘거둥 고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효창원의 아기 석호는 정조의 애달픔이 들어있는 것으로 앙증맞고 귀엽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조가 쓴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에는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며 사랑하는 문효세자를 잃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애통한 심경을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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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의빈성씨가 죽자 손수 지은 《어제의빈묘지명》과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등에서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문효세자는 늦은 나이에 얻게된 아들이기도 하지만, 의빈성씨의 소생이기 때문에 정조에게 더욱 의미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빈성씨와 정조의 사랑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2022)에도 그려져 있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효창공원으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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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 희정당 동쪽에 새로운 왕세자궁인 중희당(重熙堂)을 짓고 직접 현판을 썼다. 현판의 좌측에는 ‘홍재(弘齋, 정조의 호)’, ‘만기지가(萬機之暇, 임금의 온갖 정무 속에서도 잠시 여가를 즐긴다라는 뜻)’라는 음각∙양각의 낙관이 있는데, 이를 통해 늦둥이 문효세자에 대한 정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중희당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되어 있으며,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희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왕의 편전인 희정당과 대내의 정전인 대조전(大造殿)과 매우 가까웠고 창덕궁의 대비전인 통명전(通明殿)과도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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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785년(정조 9)에는 중희당의 동남쪽에 왕과 왕세자의 학문 장소인 수강재(壽康齋)를 건립하였다. 정조가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어제수강재상량문(御製壽康齋上樑文)」에는 태조대의 수강궁 옛터에 강학을 위한 집을 짓는다고 뜻을 밝히고, 왕세자가 주연(冑筵)을 하고 학문의 기쁨을 맛보기를 원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왕과 왕세자의 학문 공간을 가까이 두어 정치적 사상의 기반을 동일하게 하고자 하는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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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6일 (금) 04:06 기준 최신판

단명한 어린 세자, 문효세자의 창덕궁 》 정조의 기쁨, 문효세자의 탄생

Story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다.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정조실록』 정조 6년 9월 7일)

정조가 의빈성씨가 죽자 손수 지은 《어제의빈묘지명》과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등에서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문효세자는 늦은 나이에 얻게된 아들이기도 하지만, 의빈성씨의 소생이기 때문에 정조에게 더욱 그 의미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빈성씨와 정조의 사랑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2022)에도 그려져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 희정당 동쪽에 새로운 왕세자궁인 중희당(重熙堂)을 짓고 직접 현판을 썼다. 현판의 좌측에는 ‘홍재(弘齋, 정조의 호)’, ‘만기지가(萬機之暇, 임금의 온갖 정무 속에서도 잠시 여가를 즐긴다라는 뜻)’라는 음각∙양각의 낙관이 있는데, 이를 통해 늦둥이 문효세자에 대한 정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중희당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되어 있으며,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희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왕의 편전인 희정당과 대내의 정전인 대조전(大造殿)과 매우 가까웠고 창덕궁의 대비전인 통명전(通明殿)과도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였다.

또한 1785년(정조 9)에는 중희당의 동남쪽에 왕과 왕세자의 학문 장소인 수강재(壽康齋)를 건립하였다. 정조가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어제수강재상량문(御製壽康齋上樑文)」에는 태조대의 수강궁 옛터에 강학을 위한 집을 짓는다고 뜻을 밝히고, 왕세자가 주연(冑筵)을 하고 학문의 기쁨을 맛보기를 원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왕과 왕세자의 학문 공간을 가까이 두어 정치적 사상의 기반을 동일하게 하고자 하는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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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1-41A Story Episode 정조의 기쁨, 문효세자의 탄생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1-41A 2022:이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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