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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김홍륙의 황제 독살 미수사건'''= ==Story== 1906년 4월 25일, 경운궁중건도감 의궤당상 이재극(李載克)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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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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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25일, [[경운궁중건도감]] 의궤당상 [[이재극|이재극(李載克)]]이 [[조선_고종|고종]]에게  “경운궁(慶運宮) [[대안문|대안문(大安門)]]의 수리를 음력 4월 12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고 함으로써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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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륙은 함경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천민 출신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내왕하며 러시아어를 익혀 역관으로 특채되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의 [[대한문_상량문|대한문(大漢門) 상량문(上樑文)]]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漢陽)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하였다. <ref>[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 대한문 상량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ref> [[대한문|대한문(大漢門)]]이라는 이름은 한양(漢陽)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임을 알 수 있다.<ref>[http://www.deoksugung.go.kr/board/view?no=533&board_id=FAQ 대한문 명칭에 대하여, 덕수궁소식]</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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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간에는 일이 [[배정자|배정자(裵貞子)]]라는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의 내연녀와 관련이 있다는 속설이 돌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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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부터 이듬해 사이에 이범진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유일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서 활약하였다. 1895년에는 임최수·안경수 등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다.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비서원승으로 있으면서 고종과 러시아공사 베베르 사이에 통역을 맡아보았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서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대한문’ 관련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ref>[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이기환,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경향신문 2020-04-08]</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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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이 실각한 [[흥선대원군_이하응|흥선대원군]]의 추종세력이란 이유로 처형당한 후 1885년에 일본으로 보내졌다. 1887년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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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고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면서 권세를 함부로 행사하고, 뇌물을 탈취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윤용선 내각에서 학부협판으로 승진되고, 1898년 친러파의 몰락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온갖 전횡을 자행하는 한편, 궁궐을 무상 출입하고 독립협회를 헐뜯었다. 그러나 동년 1898년 8월 2일, 지난날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서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배정자 이외에도 러시아공사 [[카를_베베르|베베르]]의 부인과 그의 언니 [[앙트와네트_손탁|앙트와네트 손탁]]도 이 시절 대안문을 자주 드나들던, 모자 쓴 양장의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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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떠나기 직전에 원한을 품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독약(아편)을 넣어 살해하려고 한 독살사건이 발각되자,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고종은 커피 애호가였으므로 커피에 독약을 탄 것을 바로 간파해서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았으나 문제는 순종이 이를 마시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틀니를 착용해야 했을 정도로 치아가 모두 결손되는 등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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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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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대한민국 부통령 직책을 지낸 함태영이 남긴 회고 및 증언에 의하면 그가 고종, 순종의 커피에 독을 탔다는 증거가 없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1898년(광무 1년) 7월 26일 김홍륙이 황태자의 커피에 독을 타서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는데,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했다. 김홍륙에 대한 재판을 평리원 판사 함태영이 맡게 되었다. 7월 25일 고종 탄신 다음 날에 발생한 것으로 김홍륙은 아는 사람인 공홍식과 시베리아에서 서양 요리사 김종화(아명은 김종호)를 궁중 요리사로 추천하여 고종과 황태자의 수라상을 차리고 있었다. 수라상은 궁궐내 소주방에서 접시와 음식을 먼저 검사하고 맛보고 올리는데, 그 커피를 맛본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함태영은 일단 김홍륙에게 증거 불충분 이란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 하였다.[1] 그 후 1898년 9월 8일을 기하여 민씨 가문에서는 민영찬이 대표로 나서면서 함태영에게 차라리 김홍륙을 극형에 처하라고 계속 압력을 보냈다. 그러나 함태영은 일주일만인 1898년 9월 15일을 기하여 민영찬 가문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결국 1898년 10월 10일을 기하여 김홍륙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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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김홍륙의 먼 일가 후손인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만년의 함태영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물어보았다. 함태영은 사태 및 사건은 민씨네(주로 민영찬 일가)가 조작한 음모 섞인 추태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어떠한 밀지가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끝내 함구하였다.[1] 재판은 다른 판사에게 넘겨지고 김홍륙 등은 사형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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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고설이 신빙성이 없는 이유가 바로 순종의 몸 상태였는데 순종은 이 시해 미수 사건으로 인해 치아가 모두 결손되어 어린 나이에 틀니를 착용하고 대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등 평생을 걸쳐 엄청나게 고생했다. 일국의 국왕이 신하 하나를 모함하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자의 몸을 그지경으로 만들 리는 없기 때문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김홍륙 김홍륙,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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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조선왕조실록 || 고종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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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홍륙독차사건(金鴻陸毒茶事件)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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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위키백과 || 김홍륙 ||  || https://ko.wikipedia.org/wiki/김홍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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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덕수궁관리사무소 > 덕수궁소식 || 대한문 명칭에 대하여 ||   || http://www.deoksugung.go.kr/board/view?no=533&board_id=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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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네이버블로그 히스토리의 역사산책 || 영화 가비"의 실제사건 "김홍륙의 고종 독살사건" (2018-11-28, History2)|| ||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140785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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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경향신문 ||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2020-04-08, 이가환 기자 ||  ||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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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경향신문 ||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2020-04-08, 이가환 기자) ||  ||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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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연합뉴스 || 현판이 전하는 덕수궁 역사…대한문은 대안문이었다 (2017-04-24, 박상현 기자) || 경운궁 정문인 대안문을 지나는 어가행렬. [국립고궁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 https://img0.yna.co.kr/photo/yna/YH/2010/06/25/PYH2010062501860000501_P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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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 장경호, 「아관파천 전후(1896~1898) 정치권력 변화와 김홍륙 독차사건 재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81,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37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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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 이차원, 「백년전 이달 : 무슨일이 있었나 : 생신날 고종황제 코피에 독약 / 김홍륙일당의 『 독차사건 』 발생」, 『한국논단』 109, 한국논단, 1998. || KISS || 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179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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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6일 (토) 16:27 기준 최신판

김홍륙의 황제 독살 미수사건

Story

김홍륙은 함경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천민 출신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내왕하며 러시아어를 익혀 역관으로 특채되었다.

1894년부터 이듬해 사이에 이범진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유일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서 활약하였다. 1895년에는 임최수·안경수 등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다.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비서원승으로 있으면서 고종과 러시아공사 베베르 사이에 통역을 맡아보았다.

그 뒤 고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면서 권세를 함부로 행사하고, 뇌물을 탈취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윤용선 내각에서 학부협판으로 승진되고, 1898년 친러파의 몰락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온갖 전횡을 자행하는 한편, 궁궐을 무상 출입하고 독립협회를 헐뜯었다. 그러나 동년 1898년 8월 2일, 지난날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서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에 원한을 품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독약(아편)을 넣어 살해하려고 한 독살사건이 발각되자,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고종은 커피 애호가였으므로 이 커피에 독약을 탄 것을 바로 간파해서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았으나 문제는 순종이 이를 마시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틀니를 착용해야 했을 정도로 치아가 모두 결손되는 등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

무고설

훗날 대한민국 부통령 직책을 지낸 함태영이 남긴 회고 및 증언에 의하면 그가 고종, 순종의 커피에 독을 탔다는 증거가 없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1898년(광무 1년) 7월 26일 김홍륙이 황태자의 커피에 독을 타서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는데,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했다. 김홍륙에 대한 재판을 평리원 판사 함태영이 맡게 되었다. 7월 25일 고종 탄신 다음 날에 발생한 것으로 김홍륙은 아는 사람인 공홍식과 시베리아에서 서양 요리사 김종화(아명은 김종호)를 궁중 요리사로 추천하여 고종과 황태자의 수라상을 차리고 있었다. 수라상은 궁궐내 소주방에서 접시와 음식을 먼저 검사하고 맛보고 올리는데, 그 커피를 맛본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함태영은 일단 김홍륙에게 증거 불충분 이란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 하였다.[1] 그 후 1898년 9월 8일을 기하여 민씨 가문에서는 민영찬이 대표로 나서면서 함태영에게 차라리 김홍륙을 극형에 처하라고 계속 압력을 보냈다. 그러나 함태영은 일주일만인 1898년 9월 15일을 기하여 민영찬 가문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결국 1898년 10월 10일을 기하여 김홍륙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훗날 김홍륙의 먼 일가 후손인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만년의 함태영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물어보았다. 함태영은 이 사태 및 사건은 민씨네(주로 민영찬 일가)가 조작한 음모 섞인 추태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어떠한 밀지가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끝내 함구하였다.[1] 재판은 다른 판사에게 넘겨지고 김홍륙 등은 사형 집행되었다.

하지만 무고설이 신빙성이 없는 이유가 바로 순종의 몸 상태였는데 순종은 이 시해 미수 사건으로 인해 치아가 모두 결손되어 어린 나이에 틀니를 착용하고 대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등 평생을 걸쳐 엄청나게 고생했다. 일국의 국왕이 신하 하나를 모함하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자의 몸을 그지경으로 만들 리는 없기 때문이다.[1]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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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44 Story Episode 김홍륙의 황제 독살 미수사건 김홍륙의 황제 독살 미수사건 金鴻陸의 皇帝 毒殺 未遂事件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1-044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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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44 김홍륙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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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44 배정자 isRelatedTo
E1-044 덕수궁_정관헌 isRelatedTo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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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홍륙독차사건(金鴻陸毒茶事件)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083
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홍륙(金鴻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082
해설 위키백과 김홍륙 https://ko.wikipedia.org/wiki/김홍륙
참고 네이버블로그 히스토리의 역사산책 영화 가비"의 실제사건 "김홍륙의 고종 독살사건" (2018-11-28, History2)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1407852852
참고 경향신문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2020-04-08, 이가환 기자)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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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장경호, 「아관파천 전후(1896~1898) 정치권력 변화와 김홍륙 독차사건 재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81,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37366
논문 이차원, 「백년전 이달 : 무슨일이 있었나 : 생신날 고종황제 코피에 독약 / 김홍륙일당의 『 독차사건 』 발생」, 『한국논단』 109, 한국논단, 1998. KISS 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1790094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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