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오례의 변

hanyang
박수정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5일 (월) 09:49 판 (새 문서: __NOTOC__ ==Definition== 의(扆)는 조선시대에 왕실의 제사 때 사용하는 병풍(屛風)이다. <ref>[http://www.koreantk.com/ktkp2014/craft/craft-view.view?craftCd=ktc0...)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Definition

의(扆)는 조선시대에 왕실의 제사 때 사용하는 병풍(屛風)이다. [1] 세종실록오례 ◎ 의(扆) :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의(扆)는 궤연(几筵)을 맡아 보(黼)를 설치하니, 도끼[斧]모양을 한 것을 보(黼)라 한다. 그 수(繡)는 백흑(白黑)의 문채로 하고, 붉은 비단으로써 바탕을 삼는데, 제도는 병풍(屛風)과 같이 한다."하고, 《시경(詩經)》의 공유장(公劉章)에, "이미 연(筵)에 오르고 이미 궤(几)에 의지하였다."고 하였으며, 사우례(士虞禮:《의례(儀禮)》의 篇名)에 "좌식(佐食:음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아무 일 없이 지게문[戶]을 나와서 등에 의지하여 남면(南面)한다."하였으니, 대개 제후(諸侯)로부터 사(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지한 것이 있었다. 혹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혹은 그림을 그리지 않기도 하였으나, 상고할 수가 없다. ◎ 扆 : 《禮書》云: "扆, 司几筵設黼, 依斧謂之黼。 其繡白黑文, 以絳帛爲質, 依制如屛風。" 《詩》 《公劉》曰: "旣登乃依。" 《士虞禮》: "佐食無事, 出戶負依南面。" 蓋諸侯至士, 皆有依焉, 或畫或否, 不可考也。[2]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class groupName partName label hangeul hanja english infoUrl iconUrl
Object 물품 제기 의(扆) ritual vessel http://dh.aks.ac.kr/hanyang/wiki/index.php/의


국사편찬위원회[1]

Additional Attributes

propertyName value
id
이칭/별칭
재질
색상
사용 신분 국가제사, 왕실제사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image
『세종실록오례』 documents <세종실록오례 권128, 길례서례(吉禮序例), 제기도설(祭器圖說)>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의(扆)는 궤연(几筵)을 맡아 보(黼)를 설치하니, 도끼[斧] 모양을 한 것을 보(黼)라 한다. 그 수(繡)는 백흑(白黑)의 문채로 하고, 강백(絳帛)으로써 바탕을 삼는데, 제도는 병풍(屛風)과 같이 한다.”하고, 『시경(詩經)』의 공유장(公劉章)에, “이미 연(筵)에 오르고 이미 궤(几)에 의지하였다.”고 하였으며, 사우례(士虞禮)에 “좌식(佐食)이 아무 일 없이 지게문[戶]을 나와서 등에 의지하여 남면(南面)한다.”고 하였다. “대개 제후(諸侯)로부터 사(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지한 것이 있었다. 혹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혹은 그림을 그리지 않기도 하였으나, 상고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禮書云扆司几筵設黼依斧謂之黼其繡白黑文以絳帛爲質依制如屛風詩公劉曰旣登乃依士虞禮佐食無事出戶負依南面蓋諸侯至士皆有依焉或畫或否不可考也 [3]
국사편찬위원회[2]
『국조오례의』 documents <국조오례의서례 권1, 길례(吉禮), 제기도설(祭器圖說)> 『예서(禮書)』에 말하기를, “의(扆)는 사궤연(司几筵)에 ‘보의(黼依)를 설치한다.’ 하였고 부(斧)는 보(黼)를 말하는 것이다. 그 수(繡)는 희고 검은 무늬로, 바탕은 강백(絳帛)으로 한다. 의(扆)의 제도는 병풍(屛風)과 같다.” 하였다. 『시경(詩經)』의 공유(公劉)에 말하기를, “올라가 의지한다.” 했으니, 선비들의 예(禮)로 먹을 것을 돕는 것을 근심하여 일 없이 문에 나가 병풍을 지고 의지하여 남쪽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는 대개 제후(諸侯)로부터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지 할 데가 있다는 것이다. 혹 그림을 그리고 혹 그리지 않기도 하는 것은 상고할 수가 없다. 禮書云扆司几筵設黼依斧謂之黼其繡白黑文以絳帛爲質依制如屛風詩公劉曰旣登乃依士虞禮?食無事出戶員依南面盖諸侯至士皆有依焉或畫或否不可考也 [4]
『국조상례보편』 난도 documents <국조상례보편 도설(圖說), 반우(返虞)> 항목없음. [5] 조선후기 1758년(영조 34)에 영조(英祖)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하고 그중 흉례(凶禮)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편찬하였다.
『춘관통고』 난도 documents <춘관통고 권86, 흉례(凶禮)> 항목없음. [6] 조선후기 1788년(정조 12)에 정조(正祖)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의 내용을 모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오례(五禮)를 상세하게 기록한 『춘관통고(春官通考)』를 편찬하였다.</html>
『대한예전』 신의 documents <대한예전 권3, 길례(吉禮), 제기도설(祭器圖說)> 『대명회전(大明會典)』 환구편(圜丘篇)에 이르기를, “신의(神扆)의 제도는 주칠(朱漆)을 하고, 도금(鍍金) 장식을 한다. 용을 아로새겨 그림을 그린다. 높이는 4尺 3分, 너비는 4尺 4寸이다. 아래에는 층대(層臺)가 있고, 신탑(神榻) 위에 안치하고, 신좌(神座)를 기대는 병풍[倚屛]이 된다.”라고 하였다. 大明會典圜丘篇云神扆之制朱漆鍍金爲餙鏤龍起畫髙四尺三分濶四尺四寸下有層臺安于神榻以爲神座之倚屛 [7]
『종묘의궤』 난도 documents <종묘의궤 권1, 종묘제기도설(宗廟祭器圖說)> 『성송반악도(聖宋頒樂圖)』에 따르면 “『예기』에서는 난도(鸞刀)를 옛날 칼이라고 하였으니, 종묘에서 사용한다. 종묘에서 지금의 칼을 사용하지 않고 옛날 칼을 사용하는 것은 옛것을 닦기 위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시경』의 「신남산(信南山)」에 의하면, “난도(鸞刀)를 들어 희생의 털을 헤쳐 보이네.”라고 하였다.『예기절해(禮記節解)』에 따르면 “반드시 난도(鸞刀)를 사용하는 것은 난령(鸞鈴)의 소리를 취하여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이 조화(調和)를 이룬 뒤에 희생(犧牲)을 자르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따르면 “선공(宣公) 12년조 정백(鄭伯)이 오른손에 난도(鸞刀)를 들었다. 그 주에 “난도는 종묘에서 희생을 자를 때 사용하는 칼이다. 고리[鐶]에 화(和)라는 방울이 있고, 칼끝[鋒]에 난(鸞)이라는 방울이 있다. 칼 끝에 있는 난은 소리가 궁성과 상성에 알맞고, 고리에 있는 세 개의 화는 소리가 각성(角聲), 치성(徴聲), 우성(羽聲)에 알맞다.” 하였다. 聖宋頒樂圖云禮記鸞刀古刀也用於宗廟宗廟不用今刀而用古刀修古之故詩信南山曰執其鸞刀以啓其毛禮記節解曰必用鑾刀者取其鑾鈴之聲宮商調和而後斷割也春秋公羊傳宣十二年鄭伯右執鑾刀注云鑾刀宗廟割切之刀鐶有和鋒有鑾鑾在鋒聲中宮商三和在鐶聲中角徵羽 [8]
규장각한국학연구원[3]
『사직서의궤』[9] 난도 documents <사직서의궤 권1, 제기도설(祭器圖說)>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할도(割刀)를 쓰되 귀한 난도(鑾刀)를 쓰는 것은 그 뜻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양전(公羊傳)』의 주(註)의 “난도는 베고 자르는 칼이다. 고리[鐶]에는 화(和)라는 방울이 있고 칼끝[鋒]에는 난(鑾)이라는 방울이 있다. 송(宋)나라 호원(胡瑗) 난령(鑾鈴)은 칼 끝에 있어서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에 합하니, 방울 2개를 쓰고, 화령(和鈴)은 고리에 있어서 소리가 치성(徵聲), 각성(角聲), 우성(羽聲)에 합하니, 방울 3개를 쓴다. 郊特牲云割刀之用鑾刀之貴貴其義也公羊傳註云鑾刀割切之刀鐶有和鋒有鑾宋胡瑗言鑾鈴在鋒聲合宮商用鈴二和鈴在鐶聲合微角羽用鈴三 [10] 1783년(정조 7) 1월 8일에 사직서(社稷署)의 제례의식[祭儀]제식(祭式)·단(壇)·유(壝)·관사(館舍) 등을 참고하고자 작성된 5권 3책의 의궤가 편찬되어, 1804년(순조 4) 1차 증보되고, 1842년(현종 8) 2차 증보됨./ 조선후기 정조나 순조 때 사직에서 왕실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이다. 난도(鑾刀)는 희생을 베는데 사용하는 칼이다.</html>
『제기도감의궤』[11] 난도 documents <제기도감의궤 권1, 도감(都監)> 주조하며 2개이다. 칼의 길이는 1尺 3寸 8分, 너비는 2寸 6分이다. 자루의 머리까지 합한 자루의 길이는 6寸 6分이다. 백금(白金)으로 장식하고 5개의 방울[鈴]이 있으며, 날[刃] 위에다 은(銀)으로 전자(篆字)를 새긴다. 영녕전(永寧殿) 1개, 종묘(宗廟) 1개이다. 鐵二刃長一尺三寸八分廣二寸六分柄長通柄頭鐵六寸六分餙以白金有五鈴刃上以銀篆刻永寧殿一宗廟一 [12] 『제기도감의궤』는 1611년(광해군 3) 8월 24일 건원릉(健元陵)과 현릉(顯陵)에 친제(親祭)를 거행하기 위해 제기가 부족하자, 그해 9월 9일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이듬해까지 제기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제기를 만든 전말을 기록하고 있음./ 난도(鸞刀)는 영녕전(永寧殿)에 1개, 종묘(宗廟)에 1개를 만들어 사용한다.
『경모궁의궤』 난도 documents <경모궁의궤 권1, 제기도설(祭器圖說)>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할도(割刀)를 쓰되 귀한 난도(鑾刀)를 쓰는 것은 그 뜻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양전(公羊傳)』의 주(註)의 “난도는 베고 자르는 칼이다. 고리[鐶]에는 화(和)라는 방울이 있고 칼끝[鋒]에는 난(鑾)이라는 방울이 있다. 송(宋)나라 호원(胡瑗) 난령(鑾鈴)은 칼 끝에 있어서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에 합하니, 방울 2개를 쓰고, 화령(和鈴)은 고리에 있어서 소리가 치성(徵聲), 각성(角聲), 우성(羽聲)에 합하니, 방울 3개를 쓴다. 이는 대개 방울 소리를 취하여 소리가 조화(調和)를 이룬 뒤에 희생(犧牲)을 베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郊特牲云割刀之用鑾刀之貴貴其義也公羊傳註云鑾刀割切之刀鐶有和鋒有鑾宋胡瑗言鑾鈴在鋒聲合宮商用鈴二和鈴在鐶聲合徵角羽用鈴三蓋取聲和而后斷也 [1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난도(鑾刀) 『종묘의궤(宗廟儀軌)』 B는 A에 그려져 있다 B ekc:isDepictedIn A
난도(鑾刀)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 B는 A에 그려져 있다 B ekc:isDepictedIn A
난도(鑾刀) 제례(祭禮) A는 B에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Spatial Data

Spactial Information Nodes

gid region label hanja latitude longitude altitue description

Spati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Temporal Data

Temporal Information Nodes

tid timeSpan label hanja lunarDate solarDate indexDate description

Tempor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Online Reference

type resource title desctription/caption URL
도설 세종실록오례 길례 서례 / 제기도설 / 난도 http://sillok.history.go.kr/id/kda_20002008_032#
도설 국조오례의 鸞刀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00185_00&vol_no=0001
참고 조선시대 왕실문화 도해사전 난도鸞刀 http://kyujanggak.snu.ac.kr/dohae/sub/schDetail.jsp?no=D1651&category=A&sWord=확
참고 한국전통지식포탈 난도 국조오례의 난도 http://www.cbd-chm.go.kr/home/rsc/rsc01003p_6.do?dt_gbn=TC&data_gbn_cd=BIO&cls_no=120000023992&cls_id=13392&pageIndex=132
참고 조선왕조실록사전 난도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451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기 부 항목없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제기&ridx=0&tot=296
참고 위키 실록사전 난도(鸞刀)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난도(鸞刀)
참고 위키 Encyves 한국 기록유산 난도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난도
도해 세종실록 오례 난도 http://sillok.history.go.kr/images/slkimg/ida_040009b04.jpg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title publication edition URL
박봉주, 「조선시대 국가 제례(祭禮)와 변두(豆)의 사용」, 『동방학지』15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2.
하은미, 「종묘제기와 조선시대 제기도설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최순권, 「종묘제기고(宗廟祭器考)」, 『종묘대제문물』60, 궁중유물전시관, 2004.
정소라, 「조선전기 길례용 분청사기 연구 -충효동요지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223, 조선시대사학회, 1999.
김종일, 「조선후기 종묘제기와 유기장의 제작기술 연구」, 한서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김종임, 「조선왕실 금속제기 연구 : 종묘제기를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제277호, 한국미술사학회, 2013.
손명희, 「조선의 국가 제사를 위한 그릇과 도구」,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 국립고궁박물관, 2015, 85~136쪽.
이귀영, 「종묘제례의 제기와 제수의 진설 원리」, 『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제27호,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3.

,

Notes

Semantic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