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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Definition== 김주국(金柱國, 1710-1771)은 학봉 김성일의 7세손으로 자는 원석(元石),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상정의 대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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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국|김주국(金柱國, 1710-1771)]]은 학봉 [[김성일]]의 7세손으로 자는 원석(元石),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상정의 [[대산집|『대산집(大山集)』]]에 따르면 김주국은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뜻이 컸으며, 박학하고 글을 잘 지었고, 세속의 흐름이 휩쓸리지 않는 성품을 지녔으며, 좋은 벗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ref>이원배,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710_1_0026045 김주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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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는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난 후 55일만에 사망을 발표하고 빈전을 경복궁 태원전으로 정하고 혼전을 문정전으로 정하고서 상례를 치렀다. 그 와중에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이 단행되면서 중단되었다가 9월 4일에 황후의 시신을 경운궁 경효전으로 옮겼다. 대한제국이 탄생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상장레를 거행하여 11월 21일에 발인하였다. 능지는 청량리 홍릉으로 결정되어 장사를 치렀으나, 풍수상의 문제로 1919년의 고종 국장 때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고 고종과 합장하였다. 5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발인반차도와 빈전이봉경운궁시반차도가 실려 있다. <ref>.</ref>

2020년 10월 5일 (월) 12:20 판

Definition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는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난 후 55일만에 사망을 발표하고 빈전을 경복궁 태원전으로 정하고 혼전을 문정전으로 정하고서 상례를 치렀다. 그 와중에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이 단행되면서 중단되었다가 9월 4일에 황후의 시신을 경운궁 경효전으로 옮겼다. 대한제국이 탄생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상장레를 거행하여 11월 21일에 발인하였다. 능지는 청량리 홍릉으로 결정되어 장사를 치렀으나, 풍수상의 문제로 1919년의 고종 국장 때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고 고종과 합장하였다. 5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발인반차도와 빈전이봉경운궁시반차도가 실려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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