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태양이 비추는 나라,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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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ghkw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17일 (수) 12:17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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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태양이 비추는 나라, 신라

박·석·김의 연맹체

신라는 오늘날 경주 일대에서 진한연맹체에 속한 성읍국가로 출발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건국설화에 따르면 신라박혁거세(朴赫居世, 기원전 69~기원후 4)가 세웠으나, 동시에 석탈해(昔脫解, ?~80)김알지(金閼智, 65~?) 등의 출현을 전하는 설화가 있고, 이후 이들은 신라의 왕위를 번갈아 이어 받는 존재들, 또는 그 조상이 된다. 따라서 신라의 통치는 당시 경주의 주도 세력이었던 박씨와 석씨, 그리고 김씨의 연합으로 운영되었으며, 그들 일족이 번갈아가며 왕위에 올라 통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신라의 발전단계가 연맹체 단계의 국가임을 말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경주에서 벗어나 낙동강을 따라 경상도 전역으로 지역 세력을 통합해 가던 신라는 대략 4세기경부터 왕권을 바탕으로 통치제도를 정비해가며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신라는 진한의 여러 소국들을 복속시키며 진한연맹체의 전 영역을 통합할 수 있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백제가야의 압박에 신라고구려와 연합하여 대외적 안정을 꾀하였다. 대규모 군을 파견하여 백제·가야·왜 동맹군을 물리친 고구려군 일부는 신라에 계속 주둔하며 내정을 간섭하였다.

최종적 승리

그러나 5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차츰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6세기 접어들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어느덧 고구려백제를 압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532년에는 강력한 이웃 세력이었던 가야연맹을 복속시켜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낙동강 하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연합해 한강유역 전체를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 시기 신라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성공적으로 고대국가 단계에 올라선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발전이 늦었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당전쟁 승리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다

신라는 중국의 분열을 통일하고 등장한 당나라와 연합하여 나당동맹을 체결한다. 6세기 후반 이후 신라가 전성기를 맞아 위세를 떨치자 고구려백제는 서로 동맹을 체결하고 외부의 돌궐과 일본까지 연계해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들에 맞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었고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당초 대동강을 기준으로 그 남북을 당나라와 신라가 각각 분할하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신라는 당나라와도 일전을 치룬다. 영토와 인구의 규모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제국 당나라를 상대로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마침내 당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 3/4에 달하는 넓은 영역을 차지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신라만의 신분제, 골품제도

삼국을 통일한 8세기 이후 통일신라로서 발전해간 신라와 이후 대동강 이북에서부터 만주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면서 등장한 발해는 한반도에서 남북국시대를 이끌었다. 10세기 초 쇠락해진 끝에 고려로 계승될 때까지 신라는 성숙하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을 누렸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로 인해 자신만의 독특한 통치 체제와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고유한 제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골품제도이다. 크게 ‘골’과 ‘품’계급으로 구성되는 이 제도는 왕위 계승이 가능한 ‘성골’과 최상층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진골’ 이외에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순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계급 간 이동이 불가능하며 복식과 주택의 규모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이처럼 지배계급 안에서 그들끼리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마련해 운영하였다는 점은 고구려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흥미로운 모습이다. 아마도 골품제도(骨品制度)는 신라가 정복전쟁으로 주변 나라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그 대상의 지위에 따라 신라 내 지배계층으로 차등 편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분제도인 것으로 보인다.

화랑 정신

또 하나는 바로 화랑도(花郎徒)이다. 귀족 청년들이 모여 무예와 풍류, 그리고 불교를 수련하던 화랑도는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골품제도의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도 신라의 청년들은 신분의 제약을 넘어 함께 화랑으로 묶일 수 있었으며, 화랑을 통해 강조된 국가관과 상무정신은 곧바로 통일 전쟁에서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1천년의 역사를 거치며 발전했던 신라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불국사석굴암을 비롯한 숱한 불교문화유산 뿐 아니라 수도였던 경주 주변에 산재된 상당한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과 기타 다양한 유물들 또한 신라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신라 사상과 불교 수용의 특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김복순, 『신라 사상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6.
김재경, 『신라 토착신앙과 불교의 융합사상사 연구』, 민족사, 2007.
김두진, 『신라하대 선종사상사 연구』, 일조각, 2007.


『신라 사상사 연구』는 신라의 정신세계에 절대적 위치에 놓여 있는 불교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연구의 성과를 모아 정리한 책이다. 신라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중고기 이후 시기별 불교의 유형과 내용, 그리고 국가가 불교를 어떻게 육성하고 활용하는지 여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제3부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신라의 유교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어 신라 시대 사상의 흐름을 균형감 있게 검토하고 있다.

『신라 토착신앙과 불교의 융합사상사 연구』는 신라의 불교 수용과정이 뿌리 깊었던 토착신앙의 반발과 저항으로 인해 늦어졌다는 측면에서 토착신앙과의 융합과정을 살펴보고 그 수용의 양상을 정밀하게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에 저자는 신라 토착신앙이 어떤 것인지 그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불교와 어떻게 융합해 갔는지 과정을 정밀히 살피고 있다. 이 책은 불교와 토착신앙의 관계뿐만 아니라 왕대별 신라 불교의 내용과 특징을 살피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하대 선종사상사 연구』는 신라 하대 사상사적 흐름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선종에 대해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통일 이후 고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신라 불교가 교종 중심에서 선종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대한 접근과 신라 사회에서의 새로운 지배계층 출현에 선종이 미치는 영향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5장에서는 신라 하대에서 작동한 또 하나의 사상적 축인 풍수지리사상에 대한 접근도 시도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 7세기 신라 정치와 골품제도 및 화랑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박명호, 『7세기 신라 정치사의 이해』, 경인문화사, 2016.
박남수,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 2013.
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일조각, 1999.


『7세기 신라 정치사의 이해』는 삼국통일을 주도했던 7세기 신라 내부의 정치적 흐름과 동향을 정밀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통일전쟁을 주도하면서 강력해진 신라 전제왕권의 출현과 이에 대해 반발하던 진골 귀족세력의 움직임 등을 살펴보면서 당대 삼국 통일이 가능했던 배경과 원동력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통일 이후 신라의 하대 사회에서 다시 약화되는 왕권과 이로 말미암은 신라의 정치적 지형을 소개하고 결국 신라 사회 전체가 혼란에 접어들어 후삼국으로 재차 분열되는 배경과 원인도 함께 분석하고 있다.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는 신라시대 화랑도의 실체와 그 세부적인 내용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화랑의 기원과 출신 가계, 그 운영의 내용과 변화의 양상을 충실하게 정리하였다. 또 부록에서는 최근 발견돼 큰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화랑세기』의 진위 문제에 대한 분석도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신라골품제연구』는 골품제도 연구에 대한 집대성의 성격을 지니는 책이다. 골품제도의 개념과 기원, 그 구조 등 골품제도의 실체를 매우 정밀하게 규명해내고 있다. 또 골품제도가 일종의 신분제도로서 상고시대 사로국의 신분제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분석한 내용은 골품제 이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겠다. 특히 골계급 및 품계급과는 별개로 골품 이외 집단에 대한 분석 내용도 함께 제시하고 있어 신라시대 신분제도와 사회구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 나당전쟁과 삼국의 통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상훈,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2012.
구대열, 『삼국통일의 정치학』, 까치글방, 2010.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나당전쟁 연구』는 나당전쟁과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집대성한 성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나당전쟁의 인식과 관련해 당이 한반도를 방기한 결과로 신라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기존의 의견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원인과 역사적 의의를 세밀하게 분석해냈다. 나당전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삼국통일의 정치학』은 삼국통일이라는 사건을 역사학의 시선이 아닌 정치학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해보고자 한 책이다. 신라에 의한 한민족이라는 민족 개념이 형성되고 성장한 그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보고 그 통합을 위한 정책들의 정치학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다. 또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이 국제지정학적 활동의 결과라고 보고 국제외교적 관점에서 삼국과 당나라 및 일본과의 관계에 접근하여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삼국통일전쟁사』는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라에 의한 통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저자는 삼국의 통일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있는지 여부에 의문을 던지면서 삼국시대 당시 민족의식과 동질성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 통일 이후의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학설과 의견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통일신라로 지칭되는 이 시기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