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기독교

Korea100
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9일 (토) 14: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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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최대의 종교
집필자 신현덕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



원고

기독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신교,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선교사가 입국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스페인인 종군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을 뿐이다.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조선 사신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스스로 접근했다. 선교사들도 스스로 찾아온 사신들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는 가장 훌륭한 선교의 대상이었으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신도가 되지 못했다. 학자들이기도 했던 사신들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서적을 국내로 들려왔고, 종교보다는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고, 5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로마 교황청은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에 이어 2014년 8월 16일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

이렇게 실학이란 명분으로 초기 도입된 가톨릭교는 피를 흘리며 조선에 정착,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알렌이었지만 그는 외교관 신분이었고,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됐다. 이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 신교는 이를 기준으로 하여 두 해의 중간인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종교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교는 동포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2,600여명의 순교자 중 600여명이 헌정되어 있다.

신교는 한국에서 신도의 수가 967만 여명으로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대형교회는 신도가 10만 명을 넘는 곳도 있다.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통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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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출처 및 근거자료가 통계청만 제시되어 있다. 이 글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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