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몽골과 고려(몽골 고려 지배의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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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5일 (수) 10:23 판 (교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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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골제국의 침략 속에서 자주성을 지켜낸 고려
집필자 남정란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징기즈칸, 오고타이, 쿠빌라이, 살리타이, 기황후, 공민왕, 김윤후
장소/공간 중국, 개성, 강화도, 제주도
사건 몽골의 고려침략, 처인성전투, 충주전투, 삼별초의 항쟁, 팔만대장경 제작
개념용어 무신정권, 공녀, 정동행성
물품/도구/유물 팔만대장경



1차 원고

13세기초, 동아시아에는 몽골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은 중앙아사아의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다. 순식간에 중앙이사아를 휩쓸고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를 정복하였고, 금나라와 남송을 무너뜨려 중국을 차지하였다. 유럽까지 쳐들어간 몽고군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짓밟았다. 세계를 휩쓰는 몽골의 폭풍에서 고려도 벗어날 수 없었다.

몽골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218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충돌없이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돌아갔으나 1231년 8월, 징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장군 살리타이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국경 근처 몇 개의 성에서 살리타이의 공격을 버텨내자 살리타이는 성을 우회하여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였다. 당시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은 몽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로 수도를 강화도라는 섬으로 옮기고 계속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약 40년 가까이 고려는 몽골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

고려의 민중들은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처인성과 충주에서는 평민과 노비로 구성된 민중군이 몽골군대를 물리쳐 철수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40년 가까운 전쟁 기간동안 고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노비로 끌려갔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지로 주둔지를 옮기며 끝까지 몽골군에게 저항하였다.

고려는 몽골에게 결국 항복하였으나, 유래없는 저항의 댓가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으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고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몽골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려는 몽골제국의 간접 지배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몽골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하고 고려영토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몽골황제의 말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말 산업이 발달해있다. 또한 공녀라는 이름으로 고려의 젊은 여성을 몽골에 보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중 ‘기황후’라고 불리는 한 여성은 원제국의 황후가 되었는데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 한편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겠다는 몽골의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를 몽골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거나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계속되었다.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1356년 마지막 몽골세력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그 고난으로 인해 남겨진 것도 있다.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8만 1천개가 넘은 경판의 규모도 놀랍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의 아름다움과 정확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목판인쇄물은 그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인은 수십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연이은 수난으로 고통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이라는 다른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우리’라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고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한반도의 첫 지배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을 그 시조로 보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멸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나라의 아름을 ‘조선’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제국의 침략을 받아 항복을 했고, 100여년간 그 지배권 내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기황후’라고 불리는 한 여성은 원제국의 황후가 되었는데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를 “원제국의 황후 중 기황후는 고려에서 보내진 공녀 중 한 명으로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로 수정할 수 있다.
- 몽골과 원의 관계 서술할 것 → 몽고가 중국을 정복하고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바꾸고...

- ‘기황후’에 대한 서술 - “공녀로 보내진 여성 중 기씨 성을 가진 여성이 원제국의 황후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녀를 ‘기황후’라고 불렀다.”
-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계속되었다. → 원 정부의 결정에 따라 고려왕이 실제로 바뀐 적이 있지 않았나요?

-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고, 공민왕대에 이르러 몽골이 불법적으로 ~~.



수정 원고

13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몽골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은 중앙아사아의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다. 순식간에 중앙이사아를 휩쓸고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를 정복하였고, 금나라와 남송을 무너뜨려 중국을 차지하였다. 유럽까지 쳐들어간 몽고군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짓밟았다. 세계를 휩쓰는 몽골의 폭풍에서 고려도 벗어날 수 없었다.

몽골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218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충돌없이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돌아갔으나 1231년 8월,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장군 살리타이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국경 근처 몇 개의 성에서 살리타이의 공격을 버텨내자 살리타이는 성을 우회하여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였다. 당시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은 몽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로 수도를 강화도라는 섬으로 옮기고 계속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약 40년 가까이 고려는 몽골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

고려의 민중들은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처인성과 충주에서는 평민과 노비로 구성된 민중군이 몽골군대를 물리쳐 철수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40년 가까운 전쟁 기간동안 고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노비로 끌려갔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지로 주둔지를 옮기며 끝까지 몽골군에게 저항하였다.

고려는 몽골에게 결국 항복하였으나, 유래없는 저항의 대가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으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고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몽골은 결국 중국의 지배자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을 차지하였다. 오늘날의 서아시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아우르게 되었는데, 각각 일한국, 킵차크한국, 오고타이한국, 차가타이한국, 원나라의 다섯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중국을 지배하는 원나라가 몽골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비록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하고 고려영토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원 황제의 말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말 산업이 발달해있다. 또한 공녀라는 이름으로 고려의 젊은 여성을 원나라에 보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공녀로 보내진 여성 중 기씨 성을 가진 여인은 원의 황후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녀의 아들이 원의 황제가 되었다. 보통 ‘기황후’로 불리고 있는데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 한편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겠다는 몽골의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를 몽골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거나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계속되었다.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1356년 마지막 몽골세력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그 고난으로 인해 남겨진 것도 있다.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8만 1천개가 넘은 경판의 규모도 놀랍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의 아름다움과 정확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목판인쇄물은 그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인은 수십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연이은 수난으로 고통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이라는 다른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우리’라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고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한반도의 첫 지배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을 그 시조로 보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멸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나라의 아름을 ‘조선’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제국의 침략을 받아 항복을 했고, 100여 년간 그 지배권 내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열본

몽골, 세계를 휩쓸다

13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몽골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은 중앙아사아의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다. 순식간에 중앙이사아를 휩쓸고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를 정복하였고, 금나라와 남송을 무너뜨려 중국을 차지하였다. 유럽까지 쳐들어간 몽고군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짓밟았다. 고려 또한 세계를 휩쓰는 몽골의 폭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몽골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218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충돌 없이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돌아갔으나 1231년 8월,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장군 살리타이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한다. 고려가 국경 근처에서 공격을 버텨내자 살리타이는 성을 우회하여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였다. 당시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은 몽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계속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약 40년 가까이 고려는 몽골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 몽골은 1260년 국호를 대원대몽골국으로 바꾸면서 원나라가 되었다.

고려, 몽골에 굴복

고려의 민중들은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처인성과 충주에서는 평민과 노비로 구성된 민군이 몽골군대를 물리쳐 철수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고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노비로 끌려갔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는 무신들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뭉쳤다. 그들은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지로 주둔지를 옮기며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게 진압될 때까지 몽골군에게 저항하였다.

고려는 몽골에게 결국 항복하였으나, 유례없는 저항의 대가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으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고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가 당한 굴욕

비록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몽골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려는 몽골제국의 간접 지배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고려왕들은 몽골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왕의 이름을 ‘충(忠)’으로 시작해야 했고, 몽골의 왕족들을 왕비로 맞아 사위 나라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 몽골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하고 고려영토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몽골황제의 말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말 산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고려의 젊은 여성을 공녀라는 이름으로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공녀 중 한 사람은 원나라 ‘기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였다.

한편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겠다는 몽골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를 몽골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거나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거듭되었다. 충선왕은 나라를 떠나 티벳 등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충렬왕은 강제로 왕위를 양도해야 했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문화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1356년 몽골이 불법 점유해오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마지막 몽골세력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그 고난으로 인해 남겨진 것도 있다.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8만 1천개가 넘는 경판의 규모도 놀랍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의 아름다움과 정확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목판인쇄물은 그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인은 수십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연이은 수난으로 고통 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이라는 다른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우리’라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고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한반도의 첫 지배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을 그 시조로 보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멸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나라의 아름을 ‘조선’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침략을 받아 항복을 했고, 100여 년간 그 지배권 내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차 교열본

몽골, 세계를 휩쓸다

13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몽골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은 중앙아사아의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다. 순식간에 중앙이사아를 휩쓸고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를 정복하였고, 금나라와 남송을 무너뜨려 중국을 차지하였다. 유럽까지 쳐들어간 몽고군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짓밟았다. 고려 또한 세계를 휩쓰는 몽골의 폭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몽골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218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충돌 없이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돌아갔으나 1231년 8월,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장군 살리타이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한다. 고려가 국경 근처에서 공격을 버텨내자 살리타이는 성을 우회하여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였다. 당시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은 몽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계속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약 40년 가까이 고려는 몽골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 몽골은 1260년 국호를 대원대몽골국으로 바꾸면서 원나라가 되었다.

고려, 몽골에 굴복

고려의 민중들은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처인성과 충주에서는 평민과 노비로 구성된 민군이 몽골군대를 물리쳐 철수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고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노비로 끌려갔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는 무신들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뭉쳤다. 그들은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지로 주둔지를 옮기며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게 진압될 때까지 몽골군에게 저항하였다.

고려는 몽골에게 결국 항복하였으나, 유례없는 저항의 대가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으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고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가 당한 굴욕

비록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몽골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려는 몽골제국의 간접 지배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고려왕들은 몽골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왕의 이름을 ‘충(忠)’으로 시작해야 했고, 몽골의 왕족들을 왕비로 맞아 사위 나라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 몽골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하고 고려영토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몽골황제의 말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말 산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고려의 젊은 여성을 공녀라는 이름으로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공녀 중 한 사람은 원나라 ‘기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였다.

한편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겠다는 몽골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를 몽골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거나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거듭되었다. 충선왕은 나라를 떠나 티벳 등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충렬왕은 강제로 왕위를 양도해야 했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문화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1356년 몽골이 불법 점유해오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마지막 몽골세력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그 고난으로 인해 얻은 것도 있다.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8만 1천개가 넘는 경판의 규모도 놀랍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의 아름다움과 정확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목판인쇄물은 그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인은 수십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연이은 수난으로 고통 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이라는 다른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우리’라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고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한반도의 첫 지배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을 그 시조로 보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멸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나라의 아름을 ‘조선’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침략을 받아 항복을 했고, 100여 년간 그 지배권 내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
    • 전국역사교사모임, 『제대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