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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 한국 최대의 종교<br/> 2. 자벌적으로 받아들인 기독교<br/>  3. 피로 정착된 한국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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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의 기독교
|집필자= 신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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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현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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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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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교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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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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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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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오던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기독교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보다 더 늦게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중국,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선교의 역사가 한국에서 전개되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 선비들의 학구적인 호기심과 자발적인 수용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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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1636~1637) 이후부터 수시로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의 관원들과 그 수행원들은 당시 청에 소개되었던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서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책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소개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기독교를 학술 이론으로 바라보고,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논평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생적인 기독교인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신앙 조직을 만들고 포교 활동을 벌였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이곳에서 예수회 출신 그라몽(Grammont, Jean Joseph de,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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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기독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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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또 조선 국왕과 정부가 이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이들의 기독교가 유교적 사고와의 타협을 추구한 예수회 교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하고, 교조적인 선교 시책을 지시하면서 조선에서도 기독교와 유교적 규범 사이의 갈등이 노정되었다. 기독교인 중에 제사와 같은 유교적 의례를 중단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자 조선 정부는 기독교를 국가기강을 문란시키는 해악으로 지목하고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기독교 박해는 1791년 이후 조선이 서양 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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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제국과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었고, 암묵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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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선교 계몽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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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호개방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의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법으로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알렌(Allen, Horace Newton, 1858~193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웠고(1885),  감리회 목사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1885), 스크랜튼(Scranton, Mary 1832~1909년)은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열었고(1886), 장로회 목사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세워(1915) 교육계몽 활동을 펼쳤다. 이어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인을 억압하고 수탈할 때에 다수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 섰으며, 교육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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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종교일 뿐 아니라 근대적인 서양 문명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한 인식을 배경으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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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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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교인을 보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온 나라에서 짧은 기간에 이렇듯 기독교 교세가 확장된 것은 최근 수십년간 한국인들이 치열하게 추구해 온 근대화, 산업화의 동반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기독교는 한국 사회가 서구 문명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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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의 시기에 기독교는 노동자와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개신교회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고 남한으로 근거지를 옮겨 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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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23:02 기준 최신판

제목 한국의 기독교
집필자 김현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



1차 원고

기독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신교,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선교사가 입국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스페인인 종군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을 뿐이다.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조선 사신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스스로 접근했다. 선교사들도 스스로 찾아온 사신들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는 가장 훌륭한 선교의 대상이었으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신도가 되지 못했다. 학자들이기도 했던 사신들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서적을 국내로 들려왔고, 종교보다는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고, 5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로마 교황청은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에 이어 2014년 8월 16일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

이렇게 실학이란 명분으로 초기 도입된 가톨릭교는 피를 흘리며 조선에 정착,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알렌이었지만 그는 외교관 신분이었고,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됐다. 이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 신교는 이를 기준으로 하여 두 해의 중간인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종교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교는 동포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2,600여명의 순교자 중 600여명이 헌정되어 있다.

신교는 한국에서 신도의 수가 967만 여명으로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대형교회는 신도가 10만 명을 넘는 곳도 있다.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


수정 원고

기독교[1]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가톨릭교회, 신교,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

기독교 중 가톨릭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세기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가톨릭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조선인 신도들의 안내로 선교사가 입국하여 가톨릭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한국에 온 스페인인 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다.[2]

그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을 통해서였다. 조선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간 조선인들은 그곳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서양문물에 관한 관심을 가졌든 이들은 종교라기보다는 지식습득을 위해서 관련서적을 구해 읽으면서 천주교를 접했다. 그중 대표로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1612~1645년)가 베이징에 머물던 선교사로부터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등을 선물로 받았다고 전한다. 소현세자는 서학보급에 큰 관심을 가졌으나, 귀국한 그 해 급작스런 죽음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곧이어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최초로 파견되었다.

계속된 7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주문모 등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가톨릭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3] 박해의 주요 이유로는 아버지와 왕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유교의 교리 중 하나인 삼강오륜을 크게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조선 개화기에 이르러 가톨릭교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1984년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거행했고, 2014년 8월 16일에는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전쟁이후 무자비한 경제발전 시기에 명동성당 등 가톨릭교회는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국의 가톨릭교는 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정착,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줄곧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판에도 참여했다.[4] 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

신교의 늦었으나, 19세기 말의 혼란한 극동지역 정세를 타파하기 위한 조선 왕실의 묵인 아래 선교가 이루어졌다.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미국인 알렌(1884년)이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은 위험했기 때문에 외교관 신분으로 입국했다.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목사는 언더우드(1885년)였으며, 같은 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희전문(언더우드가 세운 학당을 모태로 함[5]) 이화여대(메리 f.스크랜튼이 설립한 이화학당이 모태[6]) 배재학당(아펜젤러 설립[7]) 등 한국의 초기 교육기관과 왕립병원인 광혜원(알렌 설립)으로 출발한 세브란스병원 등의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에는 이승훈 길선주 등 16명이 포함돼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8]에서는 무고한 신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2,600명 중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 600여 명이 헌정되어 있다.

새문안교회 등이 민주화 운동이 기여했으며, 한국의 CBS라디오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간 방송으로 독재정권과 맞서 공정보도를 했고, 극동방송은 선교사 파견이 불가능한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선교를 위해 설립돼 현재도 방송중이다.

신교는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년이 되는 1984년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한국의 신교 신도 수는 967만 여명으로 한국의 종교 중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신도 수가 10만 명을 넘는 대형교회도 있다.

주석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
  2. 2017.6.29. 창원 시청 시민홀. 박철 한국외국어대학교 전 총장의 ‘역사 바로알기’ 특강. 세스페데스가 일본군 종군신부였는가에 대한 논란과 관련한 내용이다.
  3. 명동대성당 홈페이지 「한국천주교 교회사」
  4.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인 18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
  5.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http://www.yonsei.ac.kr/sc/intro/history1.jsp
  6. 이화여자대학교 홈페이지 http://www.ewha.ac.kr/mbs/ewhakr/subview.jsp?id=ewhakr_010601010000
  7. 배재고등학교 홈페이지 http://www.paichai.hs.kr/?c=1/11
  8. 문화재청 홈페이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2990000,31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1919년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최종 원고

기독교의 수용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오던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기독교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보다 더 늦게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중국,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선교의 역사가 한국에서 전개되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 선비들의 학구적인 호기심과 자발적인 수용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소개되었다.

병자호란(1636~1637) 이후부터 수시로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의 관원들과 그 수행원들은 당시 청에 소개되었던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서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책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소개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기독교를 학술 이론으로 바라보고,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논평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생적인 기독교인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신앙 조직을 만들고 포교 활동을 벌였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이곳에서 예수회 출신 그라몽(Grammont, Jean Joseph de,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조선의 기독교 박해

조선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또 조선 국왕과 정부가 이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이들의 기독교가 유교적 사고와의 타협을 추구한 예수회 교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하고, 교조적인 선교 시책을 지시하면서 조선에서도 기독교와 유교적 규범 사이의 갈등이 노정되었다. 기독교인 중에 제사와 같은 유교적 의례를 중단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자 조선 정부는 기독교를 국가기강을 문란시키는 해악으로 지목하고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기독교 박해는 1791년 이후 조선이 서양 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교하였다.

1876년부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제국과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었고, 암묵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개신교의 선교 계몽 활동

조선의 문호개방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의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법으로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알렌(Allen, Horace Newton, 1858~193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웠고(1885), 감리회 목사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1885), 스크랜튼(Scranton, Mary 1832~1909년)은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열었고(1886), 장로회 목사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세워(1915) 교육계몽 활동을 펼쳤다. 이어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인을 억압하고 수탈할 때에 다수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 섰으며, 교육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종교일 뿐 아니라 근대적인 서양 문명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한 인식을 배경으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

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교인을 보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온 나라에서 짧은 기간에 이렇듯 기독교 교세가 확장된 것은 최근 수십년간 한국인들이 치열하게 추구해 온 근대화, 산업화의 동반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기독교는 한국 사회가 서구 문명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의 시기에 기독교는 노동자와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개신교회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고 남한으로 근거지를 옮겨 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