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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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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파일:한국의 전통혼례 장면.png|섬네일|한국의 전통 혼례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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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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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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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로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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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인(仁)’이라고 하는 덕목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확장해 나아가는 것을 인간의 도덕 규범으로 가르치는 종교이다. ‘인’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연민의 마음이다. 기독교와 달리 ‘신’이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나 ‘천국’과 같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태생적 도덕 가치와 그것을 실현한 성현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기조로 하는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종교’의 하나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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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교의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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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이자, 철학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외래 종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유교가 언제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상징적인 이야기로, 중국 은나라(慇, B.C.1600년경~B.C.1046년경)가 멸망할 때 기자라는 인물이 고조선에 망명하면서 유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고조선으로 불리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중국문명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기록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유교 발전의 뿌리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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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유교적인 사고와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세 나라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 사이에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일을 완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교 경전에 기록된 규범들이 국가 운영의 모델로 응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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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교는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술로서의 기능을 굳건히 하였다. 국정을 담당할 관인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논어(論語)』, 『효경(孝經)』, 『예기(禮記)』 등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의례도 국가 행사로 치뤄졌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유교보다 불교가 더 널리 신앙되는 종교였기 때문에 유교의 종교적 기능은 제한적이었다. 종교로서의 역할보다는 지배계급의 통치술과 통치사상, 즉 ‘현실 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지혜와 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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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국 유교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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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1392~1910)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지식인이 주축이 된 새로운 지배계층은 유교를 국가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천명하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생활 양식까지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수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두고,  모든 고을에 ‘항교(鄕校)’라는 지역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모든 학교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성현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각 지역의 유교 지식인들이 사립학교 성격의 ‘서원(書院)’을 설립하였다. 향교보다 더 많이 세워진 이곳 서원에는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배 학자들을 제향하는 사당이 설치되어, 그들을 숭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크고 작은 제향 의식이 끊임없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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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시스템 위에서 조선은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예법과 풍속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시책을 펼쳤으며, 그것을 통해 5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국가의 통치 기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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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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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를 이끈 수많은 유교적 지식인 가운데 이황(李滉, 1502~1571)과 이이(李珥, 1537~1584)라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현대 한국의 화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 지성사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이황과 이이는 모두 우주의 원리인 리(理)가 인간의 도덕성인 인(仁)의 원천이라는 ‘성리학(性理學)’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황은 모든 인간이 주체적으로 그 인을 실천하고 확장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이는 그 인의 실현이 물질적인 기(氣)의 세계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가 도덕적 행위의 주체이고, 또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하였다. 이것은 유교 윤리로 사회를 이끌고자 했던 조선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는 교설이었고, 그 때문에 이들은 국가적 스승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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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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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서원, 향교 등 한국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기록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유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유교 국가였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인들 가운데 유교를 자신이 믿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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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유교가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의 유교는 현세중심적인 종교로서, 그 사회의 통치제제나 예속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사회적 성취의 기준이 달라진 상황에서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었고, 외형적으로 유교를 신앙하는 모습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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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가정생활과 학교교육의 곳곳에서 이들이 전통적인 규범에 영향받는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족, 친지, 사제, 직장 상사‧동료 사이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예의와 염치는 다분히 유교적 전통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 교사의 자세, 심지어는 정치인의 인격까지도 유교적 인간관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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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적 전통이자 국민들 대다수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삶의 규범으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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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원고검토용]]

2017년 11월 19일 (일) 23:01 기준 최신판

제목 한국의 유교
집필자 김현
인물/기관/단체 성균관, 공자, 소수림왕
장소/공간 성균관, 향교, 서원
개념용어 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



1차 원고

성균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유교의 사랑이란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모두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과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하며 ‘예’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모두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룬다.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유교가 이미 자리 잡은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다만 유교를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 그중 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도덕과 예의이다.

이는 유교가 종교의 개념보다는 일반 실생활속의 의례의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도 상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상례에는 상주가 특별한 복장을 착용하는 상복제도가 있다. 흔히 오복제도라고 부르는 격식은 촌수의 가깝고, 멀고에 따라 복식의 형태와 복식을 갖추는 기간이 각각 달랐다. 오죽하면 조선에서는 상복을 입는 격식과 기간을 얼마로 해야 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달라지자 정치세력이 갈라지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상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복식제도의 전통이 일부 가문에서는 옛 제도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유교뿐만 아니라 각 집안의 각종 종교와 절도에 접목하여 각각 다르게 행하고 있다. 한국 속담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것이 있다. 남의 일에 공연히 간섭하고 나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그 만큼 상례의 모든 것이 집집마다 다 다르니 참견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기간 상주는 먹는 음식도 평소와 달라야했다. 상주는 부모를 돌아가시게 만든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으로 좋은 음식과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상중인 임금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을 단축하라고 상소하고, 임금이 신하인 상주에게 상례에 따르지 말고 일찍 고기를 먹으라고 권(명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인간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는 데도 법도가 있다. 관례(남)와 계례(여)를 지나야 어른이 된다. 관례가 행해지는 날 남자는 여자처럼 길게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틀며, 관을 쓴다. 남자 나이 15살부터 20살 사이에 정월달 중에서 날을 받아서 한다. 계례가 행해지는 날 여자는 댕기 맺던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현재는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에 그 해 만 19살이 되는 성년을 대상으로 ‘성년의 날’ 행사를 연다.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에 합당한 몸가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었다.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수정 원고

성균관[1] 홈페이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즉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나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주요덕목이다.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이들 모두가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에서는 특히 군왕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다.

지금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인의예지이며, 많은 한국인은 과거 군왕의 덕치 개념을 현대의 위정자들도 발휘하기를 바란다. 유교는 그러나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종교로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6천여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

그 예로 가정에서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의 근본도리로써 가례를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성균관 전례위원회에 따르면 관혼상제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인간)이 되고(관례), 결혼하고(혼례), 죽으며(상례), 그 후에 행하는 제사(제례)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종묘 제례 때 사용되는 제례악은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교에 따르는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교가 어느 종교보다도 더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로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육되었다.

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

최종 원고

종교로서의 유교

유교는 ‘인(仁)’이라고 하는 덕목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확장해 나아가는 것을 인간의 도덕 규범으로 가르치는 종교이다. ‘인’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연민의 마음이다. 기독교와 달리 ‘신’이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나 ‘천국’과 같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태생적 도덕 가치와 그것을 실현한 성현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기조로 하는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종교’의 하나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유교의 기원과 발전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이자, 철학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외래 종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유교가 언제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상징적인 이야기로, 중국 은나라(慇, B.C.1600년경~B.C.1046년경)가 멸망할 때 기자라는 인물이 고조선에 망명하면서 유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고조선으로 불리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중국문명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기록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유교 발전의 뿌리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유교적인 사고와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세 나라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 사이에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일을 완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교 경전에 기록된 규범들이 국가 운영의 모델로 응용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교는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술로서의 기능을 굳건히 하였다. 국정을 담당할 관인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논어(論語)』, 『효경(孝經)』, 『예기(禮記)』 등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의례도 국가 행사로 치뤄졌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유교보다 불교가 더 널리 신앙되는 종교였기 때문에 유교의 종교적 기능은 제한적이었다. 종교로서의 역할보다는 지배계급의 통치술과 통치사상, 즉 ‘현실 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지혜와 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국 유교의 전성기

조선시대(1392~1910)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지식인이 주축이 된 새로운 지배계층은 유교를 국가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천명하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생활 양식까지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수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두고, 모든 고을에 ‘항교(鄕校)’라는 지역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모든 학교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성현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각 지역의 유교 지식인들이 사립학교 성격의 ‘서원(書院)’을 설립하였다. 향교보다 더 많이 세워진 이곳 서원에는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배 학자들을 제향하는 사당이 설치되어, 그들을 숭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크고 작은 제향 의식이 끊임없이 행해졌다.

이와 같은 시스템 위에서 조선은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예법과 풍속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시책을 펼쳤으며, 그것을 통해 5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국가의 통치 기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

조선 사회를 이끈 수많은 유교적 지식인 가운데 이황(李滉, 1502~1571)과 이이(李珥, 1537~1584)라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현대 한국의 화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 지성사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이황과 이이는 모두 우주의 원리인 리(理)가 인간의 도덕성인 인(仁)의 원천이라는 ‘성리학(性理學)’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황은 모든 인간이 주체적으로 그 인을 실천하고 확장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이는 그 인의 실현이 물질적인 기(氣)의 세계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가 도덕적 행위의 주체이고, 또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하였다. 이것은 유교 윤리로 사회를 이끌고자 했던 조선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는 교설이었고, 그 때문에 이들은 국가적 스승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현대 한국의 유교

종묘, 서원, 향교 등 한국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기록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유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유교 국가였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인들 가운데 유교를 자신이 믿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유교가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의 유교는 현세중심적인 종교로서, 그 사회의 통치제제나 예속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사회적 성취의 기준이 달라진 상황에서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었고, 외형적으로 유교를 신앙하는 모습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가정생활과 학교교육의 곳곳에서 이들이 전통적인 규범에 영향받는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족, 친지, 사제, 직장 상사‧동료 사이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예의와 염치는 다분히 유교적 전통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 교사의 자세, 심지어는 정치인의 인격까지도 유교적 인간관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적 전통이자 국민들 대다수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삶의 규범으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