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금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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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일 (월) 01: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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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금산전투(錦山戰鬪)
대표명칭 2차 금산전투
한자표기 錦山戰鬪
이칭 2차 금산싸움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 9월 23일-24일
관련인물 조헌, 영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관련장소 금산,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관련유물유적 금산 종용사, 금산 칠백의총


정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9월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의병장 조헌이 지휘한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전투.

내용

같은 해 8월 1일 조헌은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한 뒤 금산을 점거하고 전라도를 침범하려는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순찰사(巡察使)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수가 700명으로 줄었다.


승병장 영규(靈圭)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 싸움에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였다. 이에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했다. 이 보다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금산에서 전사하고, 남평현감(南平縣監) 한순(韓楯)의 군사 500명도 패퇴, 전사하였다.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한 채 단독으로 700의사(義士)와 함께 금산으로 진격하였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왜군은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간파하고 군대를 몰래 뒤로 보내어 퇴각할 길을 차단한 뒤 앞뒤로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의병과 승병들은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물리쳤으며, 화살이 다한 뒤에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육박전으로 맞서다가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전원이 순절하였다. 이때 순절한 700의사의 유골을 수습하여 합장한 것이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이 싸움에서 왜군도 큰 타격을 입어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병력과 함께 퇴각하였다.


8월 16일에 조헌은 할 수 없이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떠났다. 이 때 별장 이산겸(李山謙)이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에서 패배해 후퇴해오면서 “왜군은 정예대군이라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조헌은 “국왕이 당하는 판에 신하가 어찌 목숨을 아끼랴” 하면서 그의 만류를 거절하였다. 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許頊)도 조헌의 위험을 무릅쓴 전투를 말리면서 기일을 정해 함께 협공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조헌은 오히려 그들의 머뭇거림을 분하게 여기며 700명만을 거느리고 고개를 넘었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에게 글을 보내 다시 승군과 합세해서 8월 18일 새벽 진군해서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관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한편,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였다.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8월 15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은 7,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그가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고경명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왜군을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금산 서쪽 진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1]
한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지휘하는 왜군은 8월 15일 전주로 진출하려다가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권율(權慄, 1537~1599)이 이끈 조선군에게 크게 패하고 금산으로 철수하여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금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경명의 의병은 곽영의 관군과 함께 진산을 거쳐 8월 15일 금산에 도착하여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려고만 할 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전날 이치전투에서 대패하여 병력 손실이 많아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때문이었다.[2]

8월 16일

8월 16일 아침, 고경명금산성 서문을 공격 목표로 잡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조선군의 관군이 허약한 것을 보고 동문으로 출진하여 관군을 공격하였다.[3] 왜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곽영과 관군은 후퇴하였고 덩달아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도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끝까지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4]

결과 및 의의

1차 금산전투는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 실패로 비록 금산성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왜군의 전주 진출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금산전투 1차 금산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금산전투 2차 금산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금산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고경명 1차 금산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곽영 1차 금산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고인후 1차 금산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고경명 고인후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고경명 금산 종용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고인후 금산 종용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고경명 이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문안식, "금산성 전투", 『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금산전투(1차)",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3. "금산전투(1차)",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4. "금산싸움", 『doopedia』online, 두산백과.
  5. 문안식, "금산성 전투", 『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문안식, "금산성 전투", 『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금산싸움",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금산전투(1차)",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유용한 정보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