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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592년([[조선 선조|선조]] 25) 7월 21일(음력 6월 13일)에서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사이에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벌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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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조선 선조]] 25) 6월 13일에서 6월 14일까지 이틀간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평양에서 벌인 전투이다.  
  
 
=='''내용'''==
 
=='''내용'''==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진입,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조선 선조|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포함 3,000∼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했으나,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 계획도 없었다. 다만,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부근 숲에 드문드문 걸어놓고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는 정도였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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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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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 달도 채 안되어 5월 2일 서울에 진입하였다. 일본군은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에게 평안도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조선 선조|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다 합쳐 3,000∼4,000명이 있었는데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이나 계획도 없었다. 계획이라고는 고작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부근 숲에 드문드문 걸어놓고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는 정도였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3일 [[대동강]]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는 강 언덕에 10여 둔(屯)을 만들고 짚으로 막을 짓고는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윤두수]]·[[김명원]]이 장사 400명을 뽑아 [[고언백|고언백(高彦伯)]] 등을 시켜 인솔하게 하고 능라도(綾羅島)로부터 강을 조용히 건너 적진을 기습, 일본군을 사살하고 300여 필의 말을 빼앗았다. 그러나 조금 뒤에 여러 둔의 적이 이르러 이에 아군이 물러나 배를 타려 하였다. 그러나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강 중류(中流)적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배를 대지 못해 많은 수가 익사하였다.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으로 건너오자 적이 물이 얕아 건널 수 있음을 알고 모두 건넜다. 때문에 이 곳을 지키던 군사는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윤두수]] 등이 전세가 불리함을 감지, 먼저 성중 사람들을 내보내고 무기를 풍월루(風月樓) 연못에다 버리고 성을 빠져 나왔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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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도 없는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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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대동강]]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는 강 언덕에 10여 둔(屯)을 치고 초막을 지어 주둔하였다. 그들은 [[대동강]]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느라 여러 날 강을 건너지 않고 있었다. [[윤두수]]·[[김명원]]이 관군에서 장수 400명을 뽑아 [[고언백|고언백(高彦伯)]] 등을 시켜 인솔하게 하고 능라도(綾羅島)로부터 강을 조용히 건너 적진을 기습하였다. 초반에는 상당수 일본군을 사살하고 300여 필의 말을 빼앗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잠시 뒤 여러 둔에서 적이 몰려나오자 후퇴해 배를 타려 하였으나 강 중류(中流)까지 적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배를 대지 못해 많은 수가 익사하였다.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으로 건너오자 적이 물이 얕아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것을 보고 왜군이 모두 따라왔다. 이 곳을 지키던 군사는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윤두수]] 등이 전세가 불리함을 감지하고 먼저 성 안의 사람들을 내보냈다. 이어 무기를 풍월루(風月樓) 연못에다 버리고 성을 빠져 나갔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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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36/C036.htm "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박광진)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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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5985 평양성싸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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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2017년 11월 27일 (월) 07:54 기준 최신판

1차 평양전투(平壤戰鬪)
민족팀 일러 성전투.png
대표명칭 1차 평양전투
한자표기 平壤戰鬪
이칭 1차 평양성 전투, 1차 평양성 싸움,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 6월 13일-6월 14일
관련인물 윤두수, 이원익, 김명원, 고언백, 김억추
관련유물유적 평양성


정의

1592년(조선 선조 25) 6월 13일에서 6월 14일까지 이틀간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평양에서 벌인 전투이다.

내용

일사천리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 달도 채 안되어 5월 2일 서울에 진입하였다. 일본군은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에게 평안도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다 합쳐 3,000∼4,000명이 있었는데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이나 계획도 없었다. 계획이라고는 고작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부근 숲에 드문드문 걸어놓고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는 정도였다.[1]

군령도 없는 군대

6월 13일 대동강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는 강 언덕에 10여 둔(屯)을 치고 초막을 지어 주둔하였다. 그들은 대동강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느라 여러 날 강을 건너지 않고 있었다. 윤두수·김명원이 관군에서 장수 400명을 뽑아 고언백(高彦伯) 등을 시켜 인솔하게 하고 능라도(綾羅島)로부터 강을 조용히 건너 적진을 기습하였다. 초반에는 상당수 일본군을 사살하고 300여 필의 말을 빼앗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잠시 뒤 여러 둔에서 적이 몰려나오자 후퇴해 배를 타려 하였으나 강 중류(中流)까지 적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배를 대지 못해 많은 수가 익사하였다.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으로 건너오자 적이 물이 얕아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것을 보고 왜군이 모두 따라왔다. 이 곳을 지키던 군사는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윤두수 등이 전세가 불리함을 감지하고 먼저 성 안의 사람들을 내보냈다. 이어 무기를 풍월루(風月樓) 연못에다 버리고 성을 빠져 나갔다.[2]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평양전투 임진왜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평양전투 평양성 A는 B에서 일어났다 A edm:happenedAt B
평양전투 1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평양전투 2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평양전투 3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평양전투 4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고니시 유키나가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윤두수 1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원익 1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명원 1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고언백 1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억추 1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용한 정보

  1. "평양성전투(1차)",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2.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online. 온라인 참조: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평양성싸움", 『doopedia』online,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