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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 1361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개성 흥왕사|흥왕사(開城 興王寺)]]를 머물 곳으로 삼았다.<ref>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ref>
 
1359, 1361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개성 흥왕사|흥왕사(開城 興王寺)]]를 머물 곳으로 삼았다.<ref>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ref>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공적(功績)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김용|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했다. 그리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개성 흥왕사|흥왕사]]의 행궁(行宮)에 거처하던 [[고려 공민왕|공민왕]]을 죽이고자 했다. 결국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이강달|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했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안도치(安都赤)]]가 죽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여 끝나게 되었다.<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41 흥왕사의 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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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공적(功績)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김용|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했다. 그리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개성 흥왕사|흥왕사]]의 행궁(行宮)에 거처하던 [[고려 공민왕|공민왕]]을 죽이고자 했다. 결국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이강달|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했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안도치(安都赤)]]가 죽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개성 흥왕사|흥왕사]]에 와서 그들을 토벌하여 끝나게 되었다.<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41 흥왕사의 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사건이 끝난 직후, 처음에 [[김용]]은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그의 음모가 드러나 체포되어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ref>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ref>
 
사건이 끝난 직후, 처음에 [[김용]]은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그의 음모가 드러나 체포되어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ref>왕뚜껑열려, "[http://tip.daum.net/question/38936029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팁』<sup>online</sup></online></html>.</ref>

2017년 11월 6일 (월) 14:17 판

흥왕사의 변(興王寺─變)
대표명칭 흥왕사의 변
한자표기 興王寺─變
시대 고려시대
날짜 1363년
관련인물 고려 공민왕, 김용(金鏞)
관련장소 개성 흥왕사(開城 興王寺)



정의

1363년 김용(金鏞)흥왕사(興王寺)의 행궁(行宮)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내용

1359, 1361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흥왕사(開城 興王寺)를 머물 곳으로 삼았다.[1]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공적(功績)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했다. 그리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行宮)에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했다. 결국 공민왕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했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安都赤)가 죽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흥왕사에 와서 그들을 토벌하여 끝나게 되었다.[2]

사건이 끝난 직후, 처음에 김용은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그의 음모가 드러나 체포되어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3]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흥왕사의 변 김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흥왕사의 변 고려 공민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2. 민병하, "흥왕사의 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