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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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9월 28일 (수) 10: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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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족 후손 토요타씨와 오오치씨씨와 더불어 백제계 3대 성씨이다.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타치바나(橘)와 함께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중 하나. 미나모토와 타이라가 각각 겐지(원씨),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약칭으로 토우지(藤氏)[로 불렸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던 가문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채워앉아 헤이안 시대 때 섭정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후지와라 외의 4대 본성 중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은 황실에서 사성을 받고, 신적강하된 분가들로 여러 방계들이 있었으며, 타치바나 가문은 후지와라씨 북가의 대두 이후 몰락했다. 4대 본성 중 유일하게 사성을 받은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이었다


선조는 현재 교토의 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가였다. 나가토미 가문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아메노코야네 신(天児屋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아메노코야네를 시조신으로 모셨다.

가문의 일원이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38대 덴지 덴노(天智天皇)로부터 669년에 후지와라씨를 사성받은 것이 시작이었지만 그 자신은 사망한 후에 후지와라 씨를 사성받았기 때문에(669년) 실질적인 시조이자 번성하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이었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때부터였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덴지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헤이케 정권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진위 여부는 불명이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45대 쇼무 덴노가 되는 오비토(首皇子) 친왕에게 미인으로 유명하던 딸을 주어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코묘 황후)로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기 혈통을 황위에 올리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친왕을 올렸으나, 후손이었던 쇼무 덴노가 즉위하기 전에 본인이 죽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실질적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저자였는데, 현대의 일본 사학계를 헷갈리게 만든 만세일계를 만든 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40대 덴무 덴노 이전까지 오키미(大王)였던 칭호를 원래부터 덴노(천황)로 기술한 건 애교고, 1대 진무 덴노~9대 카이카 덴노,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는 전부 허구로 추정되는 데다[7] 고훈 시대 덴노 중에서도 22대 세이네이 덴노나 25대 부레츠 덴노는 가공인물설이 중론이다. 소가씨도 을사의 변 이전에는 26대 케이타이 덴노 직계와 대왕위를 공유하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소가씨 왕조설에서 33대 스이코 덴노와 35대 고교쿠 덴노/37대 사이메이 덴노를 기술한 것은 당대 45대 쇼무 덴노를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43대 겐메이 덴노와 44대 겐쇼 덴노 모녀를 거쳤고, 쇼무 덴노에게 잘 물려주라는 뜻에서 여왕-태자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지속적인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南), 북(北), 식(式), 경(京)[8]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후히토의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였던 나가야 왕(長屋王)을 모함해 자결시키고 권력을 쥐었다(나가야 왕의 변). 그리고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 고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다. 그 때문에 황족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코묘 황후로 책봉시켜 황족의 황후 독점을 깨뜨렸다. 이로써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가 시작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735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 왕의 아우 스즈카 왕(鈴鹿王)과 강력한 귀족이었던 타치바나(橘) 가문으로 넘어갔다. 후지와라 가의 4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중흥시키게 된다. 그러나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의 아들로서 '시키케(式家, 식가)'의 일원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부임하게 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자, 그로 인해 시키케가 제일 먼저 몰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난케(南家, 남가)'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훗날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였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의 후원을 받으며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755년 강력한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이었던 숙적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실각시켰고, 757년 황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을 진압하며, 모로에의 아들이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비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에미노 오시카츠(惠美押勝)'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760년 다이죠다이진(태정대신, 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추진하면서 상당한 군사권도 손에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모이자 후원자이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 사후 상황으로 있던 46대 코켄 덴노(孝謙天皇) 및 그 최측근인 승려 도쿄(道鏡)와 사이가 멀어지던 그는 위험을 느끼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난케 일족이 두 번째로 몰락했다.

770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내었던 48대 쇼토쿠 덴노(称徳天皇)[9]가 붕어했는데, 덴무 덴노(天武天皇) 계열이던 여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덴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제의 제부이던 덴지 덴노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천하여 결국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코닌 덴노(光仁天皇)로 즉위했다.

49대 코닌 덴노는 덴지계인 쇼무 덴노(聖武天皇)의 딸이자 코켄 덴노의 이복 언니이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후 소생의 태자를 폐립하고,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이던 무령왕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50대 간무 덴노(桓武天皇)로 781년 즉위해, 784년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헤이안 시대를 개막했다. 그리고 덴지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후히토의 차남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자손들인 '홋케(北家, 북가)'가 대두했다.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까지 승진하는 등 조정의 중신으로서 율령(형법과 행정법) 정비와 토지의 사유 억제에 힘썼다. 소노히토 사후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가문의 지위를 다졌다. 후유츠구는 52대 사가 덴노(嵯峨天皇)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 장인두. 천황의 비서실장격. 조선으로 치면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사다이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며 《코닌 격식》(弘仁格式) 편찬을 주도하는 등 율령 정비에 공헌했다. 또한 후유츠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그 권세를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