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내용)
(내용)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개념정보
 
{{개념정보
 
|사진= 한글팀 홀기 정미 중부우사좌초 군사홀기.jpg
 
|사진= 한글팀 홀기 정미 중부우사좌초 군사홀기.jpg
|사진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25772&cid=51293&categoryId=51293  홀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e뮤지엄』네이버 지식백과 <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25772&cid=51293&categoryId=51293  홀기]", e뮤지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대표명칭= 홀기
 
|대표명칭= 홀기
 
|한자표기= 笏記
 
|한자표기= 笏記
10번째 줄: 10번째 줄:
 
}}
 
}}
 
=='''정의'''==
 
=='''정의'''==
대중의 집회·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어서 낭독하게 하는 기록. <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대중의 집회·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어서 낭독하기 위한 기록이다.<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내용'''==
 
===홀의 기원===
 
===홀의 기원===
홀(笏)은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문관이 모양을 꾸미는 장식품의 일종으로, 임금에게 보고할 사항이나 건의할 사항을 간단히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비망(備忘)하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라 규격과 색채와 질이 정해져서 중국에서는 옥·상아·서각(犀角) 등이 사용되었다.
+
홀(笏)은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문관이 모양을 꾸미는 장식품의 일종으로, 임금에게 보고할 사항이나 건의할 사항을 간단히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備忘)하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라 규격과 색채와 질이 정해져서 중국에서는 옥·상아·서각(犀角) 등이 사용되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도 이 제도는 오래 전에 도입되었다. <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에 도입되었다. <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의 홀 도입===
 
===조선의 홀 도입===
조선조가 창건되어 유학이 국교로 채택되자 홀에 대한 제도도 확정되었다. 조선조에 제정된 홀은 한 자 정도의 길이에 두 치 정도의 너비로 얇은 것이며, 1품에서 4품까지는 상아로 만들고 5품 이하는 나무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조선조가 창건되어 유학이 국교로 채택되자 홀에 대한 제도도 확정되었다. 조선조에 제정된 홀은 한 자 정도의 길이에 두 치 정도의 너비로 얇은 것이며, 1품에서 4품까지는 상아로 만들고 5품 이하는 나무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홀기 도입의 목적===
 
===홀기 도입의 목적===
홀기는 이 홀의 사용이 발달됨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문명이 발달될수록 생활의 방식도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생활을 통제하는 방법도 번잡해졌다. 인간을 자율적으로 통제한다는 예(禮)는 점차 까다로워져서 자칫하면 착오를 범하기가 일쑤고, 그 착오는 실수로 좋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내리고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와 보고를 행하는 절차가 필요했으며, 그 필요에 따라 발달한 것이 홀기다. <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홀기는 이 홀의 사용이 발달됨에 따라 생겨났다. 문명이 발달될수록 생활의 방식도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생활을 통제하는 방법도 번잡해졌다. 인간을 자율적으로 통제한다는 예(禮)는 점차 까다로워져서 자칫하면 착오를 범하기가 일쑤고, 그 착오는 실수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내리고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와 보고를 행하는 절차가 필요했으며, 그 필요에 따라 발달한 것이 홀기다. <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홀기의 용도===
 
===홀기의 용도===
홀기는 크게는 국가의 [[조참|조참(朝參)]]과 [[상참]]에서부터 [[종묘]]·[[사직]]·[[배릉|배릉(拜陵)]] 등의 의식에 이용되고, 작게는 [[시학|시학(視學)]]·[[입학|입학(入學)]]·[[석전|석전(釋奠)]]·[[전시|전시(殿試)]]·[[방방|방방(放榜)]]을 비롯해 [[양로연|양로연(養老宴)]] 등에도 이용되었다. 민가에서는 서원의 [[유회]], [[향회|향회(鄕會)]]를 비롯해 [[향음주례|향음주례(鄕飮酒禮)]]·[[강학례|강학례(講學禮)]] 등에도 이용되고 심지어 혼례·관례·제례 등 사가의 행사나 의식에까지도 이용되었다. 홀기는 절차를 미리 의정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홀기는 크게는 국가의 [[조참|조참(朝參)]]과 [[상참]]에서부터 [[종묘]]·[[사직]]·[[배릉|배릉(拜陵)]] 등의 의식에서 쓰고, 작게는 [[시학|시학(視學)]]·[[입학|입학(入學)]]·[[석전|석전(釋奠)]]·[[전시|전시(殿試)]]·[[방방|방방(放榜)]]을 비롯해 [[양로연|양로연(養老宴)]] 등에도 이용되었다. 민가에서는 서원의 [[유회]], [[향회|향회(鄕會)]]를 비롯해 [[향음주례|향음주례(鄕飮酒禮)]]·[[강학례|강학례(講學禮)]] 등에도 이용되고 심지어 혼례·관례·제례 등 사가의 행사나 의식에까지도 이용되었다. 홀기는 절차를 미리 의정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ref>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
* '''홀기류 한글고문서 지식 관계망'''
 +
<html>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A214/A214.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관계정보===
 
===관계정보===
{|class="wikitable sortable"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text-align: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53번째 줄: 59번째 줄:
 
==참고문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
<!--
 
*사료
 
*사료
 
** 『가례고증(家禮考證)』
 
** 『가례고증(家禮考證)』
58번째 줄: 65번째 줄:
 
** 『사례편람(四禮便覽)』
 
** 『사례편람(四禮便覽)』
 
** 『주례(周禮)』
 
** 『주례(周禮)』
 
+
-->
 +
*권오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29  홀기(笏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서]] [[분류:개념]]
 
[[분류:한글고문서]] [[분류:개념]]

2017년 11월 22일 (수) 23:45 기준 최신판

홀기
(笏記)
"홀기",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대표명칭 홀기
한자표기 笏記
유형 개념


정의

대중의 집회·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어서 낭독하기 위한 기록이다.[1]

내용

홀의 기원

홀(笏)은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문관이 모양을 꾸미는 장식품의 일종으로, 임금에게 보고할 사항이나 건의할 사항을 간단히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備忘)하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라 규격과 색채와 질이 정해져서 중국에서는 옥·상아·서각(犀角) 등이 사용되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에 도입되었다. [2]

조선의 홀 도입

조선조가 창건되어 유학이 국교로 채택되자 홀에 대한 제도도 확정되었다. 조선조에 제정된 홀은 한 자 정도의 길이에 두 치 정도의 너비로 얇은 것이며, 1품에서 4품까지는 상아로 만들고 5품 이하는 나무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3]

홀기 도입의 목적

홀기는 이 홀의 사용이 발달됨에 따라 생겨났다. 문명이 발달될수록 생활의 방식도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생활을 통제하는 방법도 번잡해졌다. 인간을 자율적으로 통제한다는 예(禮)는 점차 까다로워져서 자칫하면 착오를 범하기가 일쑤고, 그 착오는 실수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내리고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와 보고를 행하는 절차가 필요했으며, 그 필요에 따라 발달한 것이 홀기다. [4]

홀기의 용도

홀기는 크게는 국가의 조참(朝參)상참에서부터 종묘·사직·배릉(拜陵) 등의 의식에서 쓰고, 작게는 시학(視學)·입학(入學)·석전(釋奠)·전시(殿試)·방방(放榜)을 비롯해 양로연(養老宴) 등에도 이용되었다. 민가에서는 서원의 유회, 향회(鄕會)를 비롯해 향음주례(鄕飮酒禮)·강학례(講學禮) 등에도 이용되고 심지어 혼례·관례·제례 등 사가의 행사나 의식에까지도 이용되었다. 홀기는 절차를 미리 의정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5]

지식 관계망

  • 홀기류 한글고문서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홀기 외진연시 무동 각 정재 무도 홀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홀기 홀(笏)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홀기 예(禮)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홀기 비망(備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권오호, "홀기(笏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권오호, "홀기(笏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권오호, "홀기(笏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권오호, "홀기(笏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권오호, "홀기(笏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권오호, "홀기(笏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