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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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4일 (화) 23:31 판 (공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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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한자명칭 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영문명칭 A writing recommending people to do good. It was written as Shinmi, Hakyeol and Hakjo were refurbishing Sangwonsa in 1464 (Sejo 10).
작자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작성시기 1464년
소장처 월정사 성보박물관
문화재지정사항 국보 제292호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2.5×12.0㎝
판본 필사
수량 2첩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혜각존자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권선문이다.

내용

혜각존자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권선문이다. 권선문은 사원의 중수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주 권장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다. 세조는 신미 등의 권선문에 화답해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시주하면서 어첩(御牒)을 지어 함께 보냈다. 신미 등이 지은 권선문과 세조의 어첩이 2책으로 첩장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있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구성되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어첩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표장(表裝)은 붉은색의 당초문이 들어간 비단으로 제책되어 있다. 세조의 어첩이 수록된 책의 표지에는 ‘어첩(御牒)’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이 문서는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어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전하는 한글 문헌은 판각본과 활자본이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 자료는 수기(手記)로 작성된 오래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1]

부연설명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두 건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1464년(세조 10년) 신미 등의 승려가 상원사를 증수할 때 국왕으로부터 어의와 미포, 중창에 필요한 물품과 함께 받은 어첩(御牒)이며 나머지 하나는 국왕으로부터 위의 물품과 어찰을 받은 것에 사례(謝禮)하는 글을 올린 편지로서 두 문건 모두 상원사 중창의 취지를 담은 권선문이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각각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권은 붉은 비단 표지에 어첩(御牒)이라고 적힌 첩장 형식의 표지로 원문과 언해본이 실려 있으며 한 권은 한문 원본이다. 두 문건 모두 세조와 신미 등의 친필이 아닌 필사본인데다 어첩은 언해까지 첨부된 것으로 보아 절에서 신도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첩장으로 새로 만든 듯하다. 특이한 것은 언해문이 있는 어첩에는 세조의 수결과 옥새,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인기, 세자의 수결과 인기, 세자빈의 인기, 공주 부부인 등 왕실, 종실 여인들을 포함한 10여명의 인기만 실려 있는 반면 언해본이 없는 문건에는 세조와 왕비 공주 등의 인기는 제외되었고 관리들과 관찰사, 목사 등 230여명의 인기가 실려 있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권선문을 보여주려는 신도들은 주로 여성이며 여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첨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물자 지원에 대한 사례의 서찰이 어첩보다 먼저 나열되어 있는 데다 권선문 말미에는 ‘천순(天順) 8년(세조 10년, 1464 A.D.)인 갑신년(甲申年) 12월 18일’로 편지를 쓴 날짜가 표기되어 있지만 세조의 어첩에는 날짜에 관한 언급이 없어 저술 시기의 순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권선문과 세조의 어첩에 각각

양전(兩殿)이 들으시고 특별히 윤명(綸命)을 내리셔서 …… 어의 (御衣) 몇 벌을 내시며, “쌀과 포화(布貨)와 토목 공사(土木工事)에 쓸 것을 주어라”(라고) 하시니 (兩殿聞之特降綸命 ……出御衣若干襲命輸米布土木之費) 
또 대사(大師)가 학열(學悅)스님, 학조(學祖)스님과 함께 나를 위 하여 옷을 다 팔아서 영(靈)한 절을 다시 지으려 함을 들었다. (又聞師與悅師祖師爲我盡賣衣資重創靈刹)

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국왕의 수복과 강녕을 위해 상원사의 중창 불사를 하면서 형편이 어려워진 것을 알게 된 세조가 필요한 물자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신미 등이 감사를 표하는 글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물품들이 대부분 공사에 필요한 목재들이어서 수급하는 데 기간이 걸렸고 명을 듣고 권선문을 올린 후 물자와 함께 어첩이 도착했을 것이다. 어첩을 쓴 시기는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세조실록』에 상원사에 보낸 물자와 같은 품목을 보내라고 쓴 날짜가 1465년 2월 20일인 점, 그리고 『상원사 중창사적기』에서 1465년 3월에 중창을 시작했다고 기록된 점을 볼 때 1465년 2월 20일~3월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3]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A는 B를 저술했다 1464년
학조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A는 B를 저술했다 1464년
학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A는 B를 저술했다 1464년
상원사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세조 어첩 A는 B를 저술했다 1465년
어첩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A는 B에 포함된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464년 신미, 학조, 학열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세조에게 보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786794 128.564142 평창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지었다
37.731466 128.592464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36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2. 김식봉. 「上院寺 「御牒」 및 「重創 勸善文」의 국어사적 고찰」, 『한국어문학연구』 31권, 동악어문학회, 1996
  3. 김무봉,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조성 경위와 연구」, 『불교학연구』 제 30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