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평양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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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21일 (목) 16:35 판 (관련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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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전투(平壤戰鬪)
파일:민족기록화 일러 성전투.jpg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대표명칭 평양전투
한자표기 平壤戰鬪
이칭 평양성 전투, 평양성 싸움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 5월(1차), 1592년 7월(2차), 1592년 8월(3차), 1592년 12월(4차)
관련인물 윤두수, 김명원, 이일, 유정, 휴정, 이시언
관련장소 평양성


정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와 벌인 네 차례의 전투.[1]

내용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6월(선조 25, 음력. 이하 모두 음력) 평양성이 함락된 때부터 명군과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때까지 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졌던 네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선조 26) 1월의 전투만을 뜻하기도 한다.[2]

  1. 1차 평양전투
  2. 2차 평양전투
  3. 3차 평양전투
  4. 4차 평양전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동선 전철 영동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영동선 전철 전기철도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영동선 산업선 전철화 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중앙선 산업선 전철화 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태백선 산업선 전철화 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산업선 전철화 정책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제개발 5개년계획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박정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KTV 대한뉴스 - 제 1060호-산업선 전철 영동선 개통(게시일: 2016년 12월 8일)

주석

  1.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online. 온라인 참조: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유우익, "영동선",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김영기, 손승호, "전기철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경추, 정암, "영동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중앙일보, "영동선 전철 개통", 『중앙일보』, 1975년 12월 05일.
    • 유우익, "영동선",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유산과의 연관성

노드 및 관계

노드 관계 클래스 노드 설명
평양성 전투 isPartOf 사건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임진왜란의 일부이다.
평양성 전투 isRelatedTo 인물 유정 평양성 전투유정이 참전한 전투이다.
평양성 전투 isRelatedTo 인물 휴정 평양성 전투휴정이 참전한 전투이다.

함께 보기

관련 작품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박병호 - 1차, 2차, 4차 평양성 전투를 다룸
  • 《불멸의 이순신》: KBS1, 2015년, 배우:박병호 - 2차, 3차 평양성 전투를 다룸
  • 《평양성》: 2011.01.27 개봉, 감독:이준익, 배우:정진영, 이문식, 류승룡

관련 장소

  • 평양성

참고문헌

웹 사이트

"평양성전투(2차)", 문화콘텐츠닷컴, 2016년 12월 26일 확인

온라인 사전



관련 기록

  •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기사: 전투 이후 명군이 1만명에 가까운 평양 백성들을 학살해 수급을 베고 남은 시신은 대동강에 버려졌음을 알 수 있다.
是戰也, 南兵輕勇敢戰, 故得捷賴此輩, 而天兵死傷者亦多, 呼飢流血, 相繼於道。 後山東都御史周維韓, 吏科給事中楊廷蘭等, 上本以爲: "李如松 平壤之役, 所斬首級, 半皆朝鮮之民, 焚溺萬餘, 盡皆朝鮮之民。" 中朝, 因此令布政韓就善, 巡按周維翰等, 親至平壤, 杳覈眞僞, 且令本國, 據實以聞。 本國亦爲辨明。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뒤에 산동 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維韓)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양정란(楊廷蘭) 등이 올린 주본(奏本)에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이를 인하여 포정(布政) 한취선(韓就善)과 순안(巡按) 주유한 (周雀翰)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도 사실에 의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변명을 하였다.
  • 『징비록』 권 3, 12월에 명이 대군을 보내다[1]: 『징비록』은 임진왜란때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던 유성룡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으로, 4차 평양성 전투 당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翌日朝 進圍平壤 攻普通門七星門 賊登城上 列竪白紅旗拒戰 天兵以大砲火箭攻之 砲聲震地 數十里 山岳皆動···駱尙志 吳惟忠等 率親兵 蟻附而登 前者墮 後者升 莫有退者 賊刀槊下 垂城堞如蝟毛 天兵戰益力 賊不能支 退入內城 斬戮焚燒 死者甚衆
다음 날 아침 명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공격하였다. 적은 성 위에 올라 붉고 흰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항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대포와 불화살로 적을 공격하니 대포 소리가 땅을 울려서 수십 리 안의 산이 모두 흔들렸다···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개미처럼 성을 붙어 오르는데 앞사람이 떨어지면 뒷사람이 올라가니 후퇴하는 병사가 없었다. 적의 칼과 창이 성벽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나와 있는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 같았다. 명나라 군대가 더욱 더 분투하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내성으로 달아났다. 칼로 베고 불로 태워 죽인 병사가 매우 많았다.
  • 『징비록』 권 3, 12월에 명이 대군을 보내다[2]다음은 평양성을 되찾은 후 일본군이 퇴각할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인데,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명군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賊將 平行長···等 率餘衆 連夜遁還 氣乏足繭 跛躄而行···我國無一人出擊 天兵又不追之···若行長, 義智, 玄蘇等 就擒 則京城之賊自潰 京城潰則 淸正歸路斷絶 軍心洶懼 必沿海遁走 不能自拔 漢江以南賊屯 次第瓦解 天兵鳴鼓徐行 直至釜山 痛飮而已 俄頃之間 海岱肅淸 安有數年之紛紛哉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등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밤마다 달아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기력은 쇠하고 발은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갔다.···우리나라 사람은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고 명나라 군대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만약 유키나가(行長), 요시토시(義智), 겐소(玄蘇) 등을 잡았다면 한양의 적은 스스로 무너졌을 터이고, 한양의 적이 무너지면 기요마사(淸正)는 돌아오는 길을 차단당했을 터이니 적병들은 두려워하여 바닷길을 따라 달아났겠지만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터이고 한강 이남의 적진들이 차례로 와해되었을 것이다. 그러하였다면 명나라 군대는 북을 치며 천천히 나아가 곧장 부산에 도착하여 실컷 술만 마셨어도 되었을 것이고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깨끗해졌을 것이니, 어찌 몇 년 동안의 어지러움이 있었겠는가.
  1.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인용, 2016년 12월 26일 확인
  2.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인용, 2016년 12월 26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