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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지회장 서경석(사업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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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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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방림방적<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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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방직업체로, 롯데그룹처럼 일본에서 시작했으며 과거 경방과 함께 서울 영등포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br />
본사의 모태는 1948년에 재일교포 [[서갑호]]가 폐기된 방적기들을 모아 세운 사카모토방적을 기반으로 한다. 초기에는 간사이 지역을 사업영역으로 삼아 1954년 오사카방적을 세우고 1956년에 부실기업 히타리방적을 인수하여 일본 내에서 성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1년에 [[서갑호]] 사장 자신이 학교법인 금강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일교포들을 도왔으며,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주일한국대표부 건물을 임대해줬다가 1962년 한국 정부에 넘겼다.<br />
<br />
1963년에는 한국산업은행 관리 중이던 구 태창방직 영등포공장을 인수해 '판본방적'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에서도 사업을 개시했다. 1967년 '방림방적'으로 사명을 바꾸고 1972년 모기업인 일본 사카모토방적과 합작투자를 정부로부터 승인받고 1973년 경북 구미공업단지에 윤성방적을 세워 성장세를 거듭했으나, 이듬해 윤성방적이 화재로 피해를 입고 제1차 오일쇼크 여파로 일본 사카모토방적이 부도나는 등 악재가 있었다. 1976년 [[서갑호]] 사장 사후 장남 서상근 부사장이 가업을 이어받아 1979년에 일본측 지분을 다 사들여 완전한 토종 기업이 됐다.<br />
<br />
1980년 영국령 홍콩에 첫 해외사무소를 설치하고 1982년 방림어패럴을 세워 패션사업에도 진출했고, 1983년 방림여자실업고등학교를 열기도 했다. 1989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 후 이듬해 미국 뉴욕사무소를 처음으로 현지법인으로 전환시켰으며, 1991년에 현 명칭으로 변경했으며, 1992년에 베트남 현지법인을 세워 동남아시아에도 진출했다. 1996년에는 신성산업을 인수하고 2000년 방림텍스타일을 합병했으며, 2003년에 영등포공장 부지를 에이스종합건설에 매각하고 설비를 안산공장으로 이전시켰다.<br />
<br />
기업정신: 생활을 아름답게 미래를 풍요롭게<br />
<br />
사훈: 성실, 단결, 창의<br />
<br />
[[서갑호]](徐甲虎)<br />
<br />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에 크게 성공하였다. 한국에서 방림방적 및 윤성방적을 설립하였다.<br />
<br />
출생-사망 1915 ~ 1976<br />
<br />
활동분야 경제<br />
<br />
출생지 경남 울산<br />
<br />
주요수상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 국민훈장동백장<br />
<br />
경상남도 울산 출생. 1929년 일본에 건너가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紡績業)에 크게 성공하였다. 196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카모토[阪本]방적·오사카방적·히타치[常陸]방적 등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 고베[神戶]국제관광토지개발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국내실업계에 투신, 한국산업은행 관리 하의 태창방적을 인수하여 판본방적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사명을 방림(邦林)방적으로 변경하고 1972년에는 일본 사카모토방적의 합작투자가 허가되어 증설하였다. 그리고 1973년는 구미에 윤성방적를 설립하였다.<br />
<br />
한편 1962년 11월에 주일(駐日) 대한민국대사관 자리에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사망 후에는 국민훈장동백장이 추서되었다.<br />
<br />
<br />
임대 전전하던 '최빈국' 대사관 '한' 을 푼 것은 동포들의 피와 땀이었다. 무시받던 일본에서 교포 기부로 도쿄, 오사카에 번듯한 공관을 마련했다.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 서갑호 등의 기여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br />
<br />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5월의 일본 도쿄, 대한민국 공사가 오사카의 한 기업인을 찾아와 읍소한다. 도쿄 공사관이 작은 빌딩 한 층에 월세로 들어가 있는데 쫓겨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임차료를 못 내니 건물주가 나가라고 독촉하지만 갈 곳이 없어 버텼는데,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엘리베이터를 꺼버렸다고 한다.<br />
<br />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한 국가의 외교부 대표로서는 참담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기업인에게 어쩌란 말인가! 며칠 후 그 기업인이, 공사를 대동하고 부촌으로 유명한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한다. 7934㎡(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br />
<br />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입이 딱 벌어진 공사, 뭐라고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기업인은 당시 돈으로 4200만엔을 주고 그 건물을 매입했고 공사관은 바로 이사했다. 월세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한국 정부에 기증된 그 건물이 현재 일본의 대한민국 대사관이다.<br />
<br />
서갑호, 먹고 살기 힘들어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서 시작해 온갖 거친 일을 거쳐 방직산업으로 성공했다. 한때 서일본에서 소득세 1위까지 했던 분이다. 1915년에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는데 신격호 회장의 옆 동네였고 ‘도쿄의 신격호, 오사카의 서갑호’로 불리며 의형제로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동네, 뭔가 있는 것 같다.<br />
<br />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의 공사관도 동포들의 성금으로 운영비를 내다가, 1963년에 와서 사달이 났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데 보증금 2700만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또 그가 나섰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했다. 그래 놓고도 월세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7년 뒤에는 아예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공사관을 옮기자는 결의를 한다.<br />
<br />
그래도 염치가 있었는지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동포들은 그건 우리가 쪽 팔려서 안된다고 말하며 도심 한복판인 신사이바시의 대지를 매입키로 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했다.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했고 그 즉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교포들이 설계, 부지 매입, 공사 비용으로 당시 돈 8억엔을 전액 기부한 최초의 사례다.<br />
<br />
벌써 감동이 오는가? 아직 멀었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외교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들이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려 조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 부동산, 현재 가치로 2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동포들이 또 존재할까? 독하다는 유대인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br />
<br />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다시 나선다. 그때 돈으로 100억엔의 성금을 모아서 기증했고 올림픽공원에 있는 경기장, 올림픽파크텔, 올림픽회관 신축 비용, 미사리 조정경기장과 장충체육관의 보수 비용으로 집행됐다. 서울의 66㎡(약 20평) 아파트가 2000만원 하던 시절에 541억원이었다. 당시에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의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 총 6억원 이었으니 비교가 된다. 지독한 차별 아래 힘들게 살던 자신들이 쪽팔리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결기였다.<br />
<br />
서갑호, 망해가던 방림방적을 인수해 한국의 방직업을 선진화했다. 구미에 대규모 공장을 추가 완공했는데 불의의 화재로 전소됐다. 그때 1차 오일쇼크의 불운이 겹치고 또 하필 그 순간에 일본 은행들이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부도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고국의 정부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에 모국에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국민들이 재일동포들을 백안시하게 했다.<br />
<br />
이젠 그 누구도 서갑호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도쿄 대사관 지하의 작은 기념관만이 그가 그곳에 존재했고, 조국을 너무나도 짝사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br />
<br />
-전영민 (롯데벤쳐스 대표)<br />
<br />
당시 재일교포들의 헌신에 관련된 미담은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의 처절했던 조국에 대한 헌신은 향후 언젠가 낫낫히 밝혀지겠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합니다.<br />
<br />
해외에서 거액의 부를 쌓아 모은 재산을 모국을 위해 쾌척한 훌륭한 기업인 3인에 대한 초· 중· 고교 교과서 수록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재일교포 기업인 출신인 전 방림방적 오너인 서갑호 씨가 포함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br />
<br />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고국에 거액을 지원한 서갑호 방림방적 전신 판본방직 회장(1915~1976)과 러시아에서 최고 부자가 된 최재형 선생(1860~1920), 미국에서 쌀농사로 큰돈을 번 김종림 선생(1886~1973) 등 3인의 업적을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br />
<br />
이 중 우리나라 섬유산업 선구자인 서갑호 선생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모진 고생 끝에 사카모토 방직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해 현 주일대사관부지와 건물을 고국에 기증했으며 이 부지는 현 시가로 따져 1조 원대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br />
<br />
서갑호 선생은 191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4세 때인 1928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의 상점 점원을 거쳐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웠다.<br />
그는 해방 이후 폐기처분된 방적기를 사 모아 사카모토방직을 설립하며 승승장구했다.<br />
일본에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한 그는 1950년 오사카 내 고액소득자 1위, 1952년 일본 전체 부호 순위 5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 재계 거물이 됐다.<br />
이후 일본에서 잇따라 새 공장 설립과 부실경쟁사 인수 등으로 급성장한 그는 일본 ‘섬유 왕’으로 불릴 정도로 섬유산업의 간판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했다.<br />
그는 또 1963년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같은 시기에 재일교포 고국 투자 권유를 받고 당시 산업은행 관리에 있던 태창방직(전 고려방직)을 인수해 판본방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바로 이 회사가 국내 대방(大紡) 중의 하나였던 방림방적의 전신이었다.<br />
특히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가를 위해 현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 용지를 구입해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br />
이후 이 용지와 건물을 1951년부터 대사관에 무상으로 대여했으며 1962년에 소유권을 정부에 제공하는 용단을 내렸다.<br />
이 땅의 현재 시가는 1조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br />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이 방적공장은 해방 이후 경상대 이공학부(현 서울공대) 출신인 한국인 간부 홍종모 씨에게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태창방직으로 바뀐 후 서갑호 선생이 인수해 사카모토 방직(판본방직)으로 바꿨다. 그 후 영등포 소재 공장(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은 방림방적으로 이름이 바뀐 채 시설을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공장 부지는 아파트단지로 매각했다. 따라서 한국에는 방림방적 설비와 부지는 없다.<br />
서갑호 회장의 아들이자 방림방 회장을 물려받았던 서상근 회장(1940년생)은 방림방을 정리한 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br />
서갑호 씨의 고국을 위한 거액 쾌척은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게 평가받고 있다.<br />
한편 서갑호 선생과 함께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해외 한국 기업인 중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상업으로 거액을 모아 1905년 한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br />
또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난 후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해 미국에 정착한 후 쌀농사로 큰 부를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농장 일부를 내놓고 비행학교 설립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으로 적극 지원한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br />
<br />
향후 방림방직 자리인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 주변에 서갑호 선생 동상과 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br />
통일신라시대 아간대부(정2품)를 지내시고 [[이천]](利川)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br />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孝養山)에 있다.<br />
<br />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br />
<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 가족 ==<br />
* 본인:[[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br />
* 부인: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 아들: [[서필]](徐弼) (종1품 내사령)<br />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br />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br />
*** 손자며느리 : [[청주 한씨]](淸州韓氏) <br />
**** 증손자 :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br />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증손자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증손자 :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손자: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동생: [[서신통]](徐新通)<br />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br />
<br />
== 가족 관계 ==<br />
* 본인: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br />
* 부인 :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 아들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br />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 <br />
*** 손자 : [[서염(고려3)|서염]](徐廉)<br />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br />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br />
***** 고손녀: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徐氏)<br />
***** 고손자: [[서수]](徐琇 종1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br />
****** 고고손자: [[서장기]](徐長己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br />
*******고고고손자 : [[서진부]](徐振扶 정2품 좌복야左僕射)<br />
********고고고고손자 : [[서희적]](徐希積 종3품 내의시랑內議侍郞)<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영보]](徐永甫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선(고려)|서선]](徐瑄 종3품 중정대부(中正大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찬]](徐文贊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찬]](徐希贊 정2품 이부시랑(吏部侍郞) 평장사平章事)<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계]](徐元桂 군수(君守) <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중계]](徐仲桂 검교사인(檢校舍人)<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5)|서의]](徐誼 성균제주(成均祭酒).정 3품.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간(고려)|서간]](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후장]](徐後長 군수(君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후상]](徐後祥 추밀원사(樞密院事 종 2품. 부총리). 이부시랑 평장사(吏部侍郞平章事). 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호(고려)|서호]](徐浩 정치도감(整治都監) 좌랑(佐郎) 차관. 공신.충신)<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맹원]](徐孟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br />
****** 고고손자: [[서준방]](徐俊邦 정3품 형부상서(刑部尙書). 평당 서씨(平當徐氏) 시조)<br />
******* 고고고손자: [[서약진]](徐若珍 봉성군鳳城君)<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숭조]](徐崇祖 종2품 중추원사(中樞院事)<br />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손자:[[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 고고고손자: [[서원(고려)|서원]](徐元)(정2품 평장사)<br />
*********** 원손자:[[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br />
************아들 :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br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br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고손자 ;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고고손자 :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고고고손자:[[서순원(조선3)|서순원]](徐順元 승의랑(承議郞)) <br />
******************고고고고손자:[[서척]](徐滌 진사) <br />
****************고고손자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고고고손자: [[서필(조선1)|서필]](徐弼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손자: [[서윤충]](徐允忠 생원) <br />
***************** 고고고손자: [[서적(조선2)|서적]](徐積 통덕랑(通德郞 정 5품 문관.차관보)<br />
****************** 고고고고손자: [[서유령]](徐有齡 진사(進士)<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응성]](徐應星 진사(進士)<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홍제]](徐弘濟)<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홍도]](徐弘渡 의병장. 예빈시첨정(醴賓寺僉正).정3품 .차관)<br />
****************고고손자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고고고손자: [[서문형]](徐文亨 학생(學生))<br />
******************고고고고손자: [[서걸]](徐傑 진사)<br />
*******************고고고고고손자: [[서귀종]](徐貴宗 진사)<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방]](徐守邦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조선1)|서영]](徐泳 진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길]](徐吉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엽]](徐曄 학생(學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추(조선)|서추]](徐▼(王+追)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이성]](徐以成 학생(學生))<br />
****************고고손자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br />
*****************고고고손자 :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 서울시장.장관)<br />
******************고고고고손자 :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br />
*****************고고고손자 :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br />
******************고고고고손자 :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br />
******************고고고고손자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br />
***************** 고고고손자: [[서상]](徐祥)<br />
****************** 고고고고손자: [[서변(조선1)|서변]](徐汴 학생(學生)) <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정원(조선1)|서정원]](徐廷原 의병장)<br />
*************손자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br />
**************증자: [[서맹원(조선1)|서맹원]] (徐孟原)<br />
***************고손자 : [[서윤문]](徐允文 상장군(上將軍). 정 3품.차관)<br />
****************고고손자 : [[서효순]](徐孝純)<br />
*****************고고고손자 : [[서광희]](徐光希 수문장(守門將). 총경)<br />
***************고손자 : [[서윤화]](徐允和 진사(進士)<br />
****************고고손자 : [[서효기]](徐孝起)<br />
*****************고고고손자 : [[서하]](徐河)<br />
******************고고고고손자 :[[서인정]](徐仁禎 훈련주부(訓練主簿). 차관보) <br />
***************고손자 : [[서윤찬]](徐允贊 진사)<br />
****************고고손자: [[서효지]](徐孝止 이조참판. 종 2품.차관)<br />
*****************고고고손자 : [[서담]](徐淡 참봉(參奉).종 9품.사무관)<br />
**************증손자 : [[서숙원(조선1)|서숙원]](徐叔原 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 종 7품.이사관)<br />
***************고손자 : [[서윤무]](徐允武 정략장군(定略將軍).목사(牧使). 종 4품. 차관보)<br />
****************고고손자 : [[서순지]](徐順止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고고고손자: [[서관(조선2)|서관]](徐灌 진사(進士) <br />
******* 고고고손자: [[서영관(고려)|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br />
******* 고고고손자: [[서공(고려)|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고손자: [[서순(고려)|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br />
********고고고고손자: [[서저]](徐氐 병부낭중. 종 3품. 차관급)<br />
********고고고고손자: [[서평(고려)|서평]](徐坪 판도좌랑)<br />
********고고고고손자: [[서광(고려)|서광]](徐珖-예빈소경))<br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손자: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左承旨)정3품.장관)<br />
**********고고고고고손자: [[서온(고려)|서온]](徐溫.승지.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고려1)|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1)|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충(고려)|서충]](徐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신]](徐信 원주목사.문하시중. 종 1품. 국무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구(조선3)|서구]](徐矩 덕천군수(德川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조선3)|서수]](徐綏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종 2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모]](徐模)<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3)|서호]](徐皞 사인(起居舍人).충청도경차관(忠淸道敬差官).암행어사)<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고려)|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고려1)|서원]](徐遠 찬성사(贊成事). 정 2품.부총리)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선(조선)|서선]](徐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재상).우의정(右議政).정1품. 부총리)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달]](중훈대부교동현감(徐達中訓大夫喬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조(조선)|서조]](통정대부안성군수 徐遭通政大夫 安城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우]](徐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연(조선1)|서연]](徐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섬]](徐暹)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조선2)|서간]](군자감첨정증참의 徐趕軍資監僉正 贈叅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초]](徐超) 부사(府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적]](徐自孔): 감찰(監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규(조선1)|서규]](徐赳) 지평(持平)<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도]]:(徐自道) 세마(洗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소]](徐自逍) 감찰(監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절]](徐趃) 군수(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고려1)|서유]](徐逾 비인현사(庇仁縣事) <br />
******* 고고고손자: [[서성(고려)|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br />
******* 고고고손자: [[서염(고려)|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br />
******** 고고고고손자: [[서익]](徐翼 부령(司僕部令). 종 2 품. 부총리)<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裕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기]](徐原奇. 계성군(桂城君).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제(고려)|서제]](徐梯)<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맹]](徐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극인(고려)|서극인]](徐克仁)<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건손(조선)|서건손]](徐建孫 참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승(조선4)|서승]](徐繩 부사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백령]](徐百齡.동와(東窩). 조산대부(朝散大夫) 영천교수(永川敎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자통]](徐自通.군수(郡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자이]](徐自邇.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4)|서호]](徐浩)<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옥(조선4)|서옥]](徐沃.예빈시정(禮賓寺正), 중추부사(中樞副使)). 종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적]](徐友積)<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후적]](徐後積 통덕랑(通德郞))<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적]](徐景積 훈도(訓導))<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조선)|서양]](徐瀁)<br />
**** 고고손자: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br />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br />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br />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br />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춘]](徐椿 부여서씨파(扶餘徐氏派 대종)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2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첨]](徐詹 예빈사(禮賓寺) 소윤(少尹)<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구덕]](徐仇德)<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고려)|서경]](徐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습]](徐雨習)<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장손]](徐障孫)<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5)|서호]](徐浩)<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덕]](徐好德 봉정대부 진의부위(進義副尉))<br />
********** 손자: [[서익명(고려)|서익명]](徐益明 첨절제사)<br />
*********** 증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br />
************ 고손자: [[서희적(조선1)|서희적]]:(徐希積 관조당공파)<br />
*********** 증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br />
********** 손자: [[서언명(고려)|서언명]](徐彦明)<br />
*********** 증손자: [[서준(고려)|서준]](徐濬)<br />
************ 고손자: [[서린지]](徐麟趾)<br />
************* 고고손자: [[서신(조선2)|서신]](徐愼)<br />
************* 고고손자: [[서침(조선2)|서침]](徐忱)<br />
************* 고고손자: [[서념(조선)|서념]](徐恬)<br />
************* 고고손자: [[서협]](徐恊 부장공파)<br />
*********** 증손자: [[서저(고려2)|서저]](徐渚)<br />
*********** 증손자: [[서정(고려5)|서정]]:(徐汀 부사공파)<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릉]]([[서능]])(徐稜 장성서씨파(長城徐氏派)=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관(조선)|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손(조선)|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박]](徐樸(부여서씨(扶餘徐氏) 봉례공파(奉禮公派))<br />
********** [[서진(고려5)|서진]](徐進 판관)<br />
***********[[서열(고려)|서열]](徐悅 봉예랑)<br />
************[[서정수(고려1)|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 <br />
*************[[서희(고려1)|서희]](徐凞)<br />
************** [[서수손]](徐秀孫 장사랑)<br />
*************** [[서관(조선6)|서관]](徐寬 진사)<br />
**************** [[서진남]](徐震男 진사) <br />
***************** [[서익(조선)|서익]](徐益 목사(牧使)) <br />
****************** [[서룡갑]](徐龍甲)<br />
******************* [[서운준]](徐雲駿 현감)<br />
******************* [[서운기]](徐雲驥) <br />
******************** [[서필원]](徐必遠 병조판서):정의공파<br />
*********************[[서경조(조선)|서경조]](徐敬祖 목사(牧使))) <br />
********************** [[서정덕]](徐定德) <br />
*********************** [[서인달]](徐寅達) <br />
************************ [[서진태]](徐鎭泰) <br />
************************* [[서명록]](徐命祿) <br />
******************** [[서치원]](徐致遠 음직직장(蔭職直長))<br />
********************* [[서경선]](徐敬善) <br />
********************** [[서경지(조선)|서경지]](徐景智) <br />
*********************** [[서상진(조선)|서상진]](徐相晉)<br />
************************ [[서범례]](徐範禮) <br />
************************* [[서도유]](徐道裕 진사)<br />
****************** [[서호갑]]:(徐虎甲 참의공파)<br />
****************** [[서인갑]]:(徐寅甲 통정공파)<br />
****************** [[서양갑]](徐羊甲 혁명가.홍길동의 모델) : 석선공파<br />
****************** [[서영갑]]:(徐永甲 학생공파)<br />
****************** [[서옥갑]]:(徐玉甲 만죽파)<br />
*************[[서성(고려2)|서성]]:(徐盛 교위공파)<br />
***********[[서이(고려)|서이]](徐怡 성균관직장(直長)):직장공파<br />
************ [[서봉래]]:(徐鳳來 평용위공파)<br />
************* [[서치근]](徐致謹)<br />
************** [[서익희]](徐益禧)<br />
*************** [[서순경(조선2)|서순경]](徐順敬)<br />
************** [[서익상]](徐益祥)<br />
*************** [[서극경]](徐克敬)<br />
*************** [[서극신]](徐克信)<br />
************ [[서봉상]](徐鳳翔)<br />
************* [[서팔원]](徐八元)<br />
************** [[서영무(조선)|서영무]](徐永武)<br />
*************** [[서치령]]:(徐致齡 첨사공파)<br />
*************** [[서만령]]:(徐萬齡 사간공파)<br />
************* [[서팔개]]:(徐八凱 진사공파)<br />
************** [[서학정]](徐鶴禎)<br />
*************** [[서팽수]](徐彭壽)<br />
**************** [[서응진]](徐應進)<br />
*************** [[서귀수]](徐龜壽)<br />
**************** [[서응시(조선3)|서응시]](徐應時)<br />
**************** [[서응명]]:(徐應明 참봉공파)<br />
**************** [[서응남(조선)|서응남]](徐應男)<br />
**************** [[서응노]]:(徐應魯 진사공위응노파)<br />
************** [[서학령]](徐鶴齡)<br />
*************** [[서린수(조선2)|서린수]]:(徐麟壽 봉사공파)<br />
*************** [[서기수(조선)|서기수]](徐麒壽)<br />
************ [[서봉수(조선)|서봉수]](徐鳳壽)<br />
************* [[서치중]](徐致中)<br />
************** [[서령(조선2)|서령]](徐玲)<br />
*************** [[서윤무(조선1)|서윤무]](徐允武)<br />
************** [[서림(조선1)|서림]](徐琳)<br />
************** [[서린(조선5)|서린]](徐璘)<br />
*************** [[서사함]](徐士諴)<br />
**************** [[서응기(조선1)|서응기]](徐應期)<br />
**************** [[서응길(조선)|서응길]]:(徐應吉 매월암공파)<br />
*************** [[서사심]]:(徐士諶 선전공파)<br />
************** [[서류(조선)|서류]](徐瑠)<br />
*************** [[서사문]](徐士文)<br />
**************** [[서응명(조선)|서응명]](徐應命)<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남양(당성)서씨파(南陽((唐城)徐氏派) <br />
***************원손자: [[서숙]](徐淑)(우승지)<br />
**************아들: [[서충수]](徐忠守 도승지)<br />
***************원손자: [[서혼(조선2)|서혼]](徐混 부위)<br />
****************아들: [[서충필]](徐忠弼 부호군)<br />
****************아들: [[서충좌]](徐忠佐 학생(學生))<br />
****************아들: [[서충우]](徐忠佑 통정대부(通政大夫))<br />
*****************손자: [[서정연]](徐挺然 증 호조참판)<br />
******************증손자: [[서한장]](徐漢章 통덕랑(孝子通德郞)<br />
******************증손자: [[서한량]](徐漢亮)<br />
*****************손자: [[서정지]](徐挺之 선무랑(宣務郞))<br />
******************증손자: [[서한주]](徐漢柱 부사.학자)<br />
***********원손자: [[서원길]](교리공(校理公))<br />
************ 아들: [[서득부]](徐得富)<br />
************* 손자: [[서순경]](徐順卿 진용교위(進勇校尉)) <br />
************** 증손자: [[서호번]](徐好蕃 부위(副尉))<br />
*************** 고손자: [[서경덕]](徐敬德 학자.주기파(主氣派)의 거유)<br />
**************** 고고손자: [[서응기(조선)|서응기]](徐應麒)<br />
*************** 고손자: [[서형덕]](徐馨德 생원)<br />
*************** 고손자: [[서숭덕]](徐崇德)<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직]](徐稷(연산서씨파(連山徐氏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수(조선)|서종수]](徐宗秀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련]](徐潾 판관(判官))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령]](徐千齡 현감(縣監))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주]](徐澍)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후적(조선)|서후적]](徐後積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래]](徐必來)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조선1)|서익]](徐榏 현감(縣監))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규세]](徐奎世)<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도동]](徐道東)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택선]](徐宅善 부사(府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재(조선)|서윤재]](徐潤載 무과)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화(조선)|서윤재]](徐潤和)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간세(조선)|서간세]](徐幹世 무과)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徐秉▣)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극선]](徐克善)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헌(조선)|서병헌]](徐秉憲 군수(郡守))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집선]](徐集善)<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적]](徐效積)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성]](徐必成 첨정(僉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조선2)|서정]](徐椗)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명세]](徐名世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행]](徐必行)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숙(조선)|서숙]](徐橚 증 호조참판)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조]](徐喜朝)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덕]](徐秉德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해조]](徐海朝 참군(參議)) <br />
**** 증손자: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고손자: [[서면(고려)|서면]](徐冕 정4품 주부) <br />
****** 고고손자: [[서린(고려)|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br />
******* 고고고손자: [[서찬(고려6)|서찬]](徐瓚 (정4품 장령)<br />
******** 고고고고손자: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정3품 승지)<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고려3)|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천]](徐思川)<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근]](徐楊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경흥]](徐敬興.정3품 목사(牧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조선1)|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2)|서진]](徐晋 정3품 사재감정 교리공파(校理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혼(조선)|서혼]](徐混 정3품 우승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강(조선)|서강]](徐岡 정3품 대사성)<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산보]](徐山甫 정 4품 장령)<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운(조선)|서운]](徐運 동복현감(同福縣監).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항]](徐恒 하동현감(河東縣監).증 통예원 우통예(通禮院 右通禮).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관(조선3)|서관]](徐瓘 북부주부(北部主簿).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형(조선)|서형]](徐詗 종사랑(從仕郞).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선원]](徐善元)<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1)|서인원]](徐仁元 호조참의(戶曹參議).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정2품.장관).명암공파(鳴巖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예원]](徐禮元 진주목사.장군.공신.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조선3)|서우]](徐遇 사간원직장(司諫院直長).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근]](徐赾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정3품.차관)<br />
**** 증손자: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손자: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고고고손자: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br />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괄]](徐适 훈도(訓導))<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徐洗찰방(察訪))<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진원]](徐震元 진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감원]](徐次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원]](徐艮元)<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태원(조선)|서태원]](徐兌元)<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습]](徐漝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환]](徐渙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후(조선)|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업]](徐嶪 증 병조 판서 겸 부사(兵曹判書兼府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조선)|서수]](徐洙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무]](徐景茂 절충 장군(折衝將軍)<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대]](徐岱 장사랑)<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엄]](徐崦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조선2)|서영]](徐嶸 서흥파(瑞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팽려]](徐彭呂)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br />
*** 손자 : [[서영(고려3)|서영]](徐英)<br />
* 동생 : [[서신통]](徐新通)<br />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ikWW2s6gf9g]]<br />
달성서씨 [[서진(고려)|서진]]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mpAFlHvrcG0]]<br />
대구서씨 [[서한(고려)|서한]]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jha5bGTbwHk]]<br />
연산서씨시조 [[서준영(고려)|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uEEKPu0-mBI]]<br />
<br />
이천서씨 대종회 [[http://icheonseo.com/]]<br />
<br />
== [[방림]] ==<br />
대한민국의 방직업체로, 롯데그룹처럼 일본에서 시작했으며 과거 경방과 함께 서울 영등포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br />
본사의 모태는 1948년에 재일교포 [[서갑호]]가 폐기된 방적기들을 모아 세운 사카모토방적을 기반으로 한다. 초기에는 간사이 지역을 사업영역으로 삼아 1954년 오사카방적을 세우고 1956년에 부실기업 히타리방적을 인수하여 일본 내에서 성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1년에 [[서갑호]] 사장 자신이 학교법인 금강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일교포들을 도왔으며,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주일한국대표부 건물을 임대해줬다가 1962년 한국 정부에 넘겼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br />
<br />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br />
<br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묘소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br />
<br />
== [[서신일(徐神逸)의 음덕(陰德)]]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br />
<br />
[[서신일]](徐神逸)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고려(高麗) 초에 개성(開城) 교외에 살고 있었다.<br />
<br />
어느 날, 산에 갔을 때, 사슴이 뛰어왔다. 가만히 보니, 사슴이 화살을 맞고 있었다. 그는 살을 뽑아주고, 사삼을 숨겨 주었다.<br />
<br />
얼마 후 사냥꾼이 와서 사슴 간 곳을 물을 때, 다른 곳을 가리켜 주어 사슴을 살려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당신이 오늘 살려 준 사슴은 내 아들이오. 당신 때문에 내 아들이 살았으니, 대단히 고맙다고 하며, 당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재상(宰相)이 될 것이라 하고는 사라졌다.<br />
<br />
그 후 서신일(徐神逸)은 나이 80에 아들 [[서필]](徐弼)을 낳았다. [[서필]](徐弼)은 명상(名相)이었고, [[서필]](徐弼)의 아들 [[서희]](徐熙)는 요(遼) 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 봉산군(蓬山郡)에서 만나 담판하여 요(遼)의 공격을 막아 냄으로써 유명하였고, [[서희]](徐熙)의 아들 [[서눌]](徐訥)은 고려 8대 왕 현종(顯宗)의 장인(丈人)이 되었다. 그는 현종(顯宗), 9대 덕종(德宗), 10대 정종(靖宗) 등 3대의 명상(名相)으로 후에 정종(靖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는 등 역대로 내려오며 이름을 날렸다.<br />
<br />
[[서공(고려)|서공]](徐恭)은 [[서희]](徐熙)의 현손(玄孫)으로, 18대 의종(毅宗) 때 서경에 같이 가 문무관과 함께 활쏘기를 할 때 서경 사람은 잘 맞추었으나, 종신(從臣) 중에는 한 사람도 맞추지 못하여 왕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었을 때 [[서공(고려)|서공]](徐恭)이 두 번 맞추어 왕을 기쁘게 하였다.<br />
<br />
그 후 [[서공(고려)|서공]](徐恭)은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를 두 번 지냈고, 재상(宰相)이 된 후에도 더욱 겸손하였다. 그 중에도 경박(輕薄)한 문사(文士)들을 질시하였고, 무인(武人)을 예로 대우해 주었다. 의종(毅宗) 때 정중부(鄭仲夫)가 문신을 살해할 때 중방(重房)에서 순검군(巡檢軍) 22명을 보내어 그의 집을 호위해 준 일도 있었다.<br />
<br />
이와 같이 [[서씨]](徐氏) 집안은 고려 초기부터 혁혁한 집안으로 내려왔다. 모두 사슴을 살려 준 은덕(隱德)이라 한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br />
<br />
== [[희성당]](希聖堂) ==<br />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A%B0%91%ED%98%B8서갑호2024-03-22T20:36:23Z<p>Jwseo21: /* 가족 관계 */</p>
<hr />
<div>서갑호(徐甲虎)<br />
<br />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에 크게 성공하였다. 한국에서 방림방적 및 윤성방적을 설립하였다.<br />
<br />
출생-사망 1915 ~ 1976<br />
<br />
활동분야 경제<br />
<br />
출생지 경남 울산<br />
<br />
주요수상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 국민훈장동백장<br />
<br />
== 가족 관계 ==<br />
* 본인 : [[서갑호]](徐甲虎 방림방적 창업자)<br />
** 아들 : 서상근(徐相根 방림 명예회장)<br />
** 아들 : 서상운(徐相雲 재일한국동포 권익옹호추진운동본부 회장)<br />
<br />
경상남도 울산 출생. 1929년 일본에 건너가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紡績業)에 크게 성공하였다. 196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카모토[阪本]방적·오사카방적·히타치[常陸]방적 등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 고베[神戶]국제관광토지개발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국내실업계에 투신, 한국산업은행 관리 하의 태창방적을 인수하여 판본방적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사명을 방림(邦林)방적으로 변경하고 1972년에는 일본 사카모토방적의 합작투자가 허가되어 증설하였다. 그리고 1973년는 구미에 윤성방적를 설립하였다.<br />
<br />
한편 1962년 11월에 주일(駐日) 대한민국대사관 자리에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사망 후에는 국민훈장동백장이 추서되었다.<br />
<br />
<br />
임대 전전하던 '최빈국' 대사관 '한' 을 푼 것은 동포들의 피와 땀이었다. 무시받던 일본에서 교포 기부로 도쿄, 오사카에 번듯한 공관을 마련했다.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 서갑호 등의 기여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br />
<br />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5월의 일본 도쿄, 대한민국 공사가 오사카의 한 기업인을 찾아와 읍소한다. 도쿄 공사관이 작은 빌딩 한 층에 월세로 들어가 있는데 쫓겨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임차료를 못 내니 건물주가 나가라고 독촉하지만 갈 곳이 없어 버텼는데,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엘리베이터를 꺼버렸다고 한다.<br />
<br />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한 국가의 외교부 대표로서는 참담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기업인에게 어쩌란 말인가! 며칠 후 그 기업인이, 공사를 대동하고 부촌으로 유명한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한다. 7934㎡(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br />
<br />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입이 딱 벌어진 공사, 뭐라고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기업인은 당시 돈으로 4200만엔을 주고 그 건물을 매입했고 공사관은 바로 이사했다. 월세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한국 정부에 기증된 그 건물이 현재 일본의 대한민국 대사관이다.<br />
<br />
서갑호, 먹고 살기 힘들어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서 시작해 온갖 거친 일을 거쳐 방직산업으로 성공했다. 한때 서일본에서 소득세 1위까지 했던 분이다. 1915년에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는데 신격호 회장의 옆 동네였고 ‘도쿄의 신격호, 오사카의 서갑호’로 불리며 의형제로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동네, 뭔가 있는 것 같다.<br />
<br />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의 공사관도 동포들의 성금으로 운영비를 내다가, 1963년에 와서 사달이 났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데 보증금 2700만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또 그가 나섰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했다. 그래 놓고도 월세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7년 뒤에는 아예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공사관을 옮기자는 결의를 한다.<br />
<br />
그래도 염치가 있었는지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동포들은 그건 우리가 쪽 팔려서 안된다고 말하며 도심 한복판인 신사이바시의 대지를 매입키로 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했다.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했고 그 즉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교포들이 설계, 부지 매입, 공사 비용으로 당시 돈 8억엔을 전액 기부한 최초의 사례다.<br />
<br />
벌써 감동이 오는가? 아직 멀었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외교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들이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려 조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 부동산, 현재 가치로 2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동포들이 또 존재할까? 독하다는 유대인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br />
<br />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다시 나선다. 그때 돈으로 100억엔의 성금을 모아서 기증했고 올림픽공원에 있는 경기장, 올림픽파크텔, 올림픽회관 신축 비용, 미사리 조정경기장과 장충체육관의 보수 비용으로 집행됐다. 서울의 66㎡(약 20평) 아파트가 2000만원 하던 시절에 541억원이었다. 당시에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의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 총 6억원 이었으니 비교가 된다. 지독한 차별 아래 힘들게 살던 자신들이 쪽팔리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결기였다.<br />
<br />
서갑호, 망해가던 방림방적을 인수해 한국의 방직업을 선진화했다. 구미에 대규모 공장을 추가 완공했는데 불의의 화재로 전소됐다. 그때 1차 오일쇼크의 불운이 겹치고 또 하필 그 순간에 일본 은행들이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부도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고국의 정부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에 모국에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국민들이 재일동포들을 백안시하게 했다.<br />
<br />
이젠 그 누구도 서갑호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도쿄 대사관 지하의 작은 기념관만이 그가 그곳에 존재했고, 조국을 너무나도 짝사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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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민 (롯데벤쳐스 대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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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재일교포들의 헌신에 관련된 미담은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의 처절했던 조국에 대한 헌신은 향후 언젠가 낫낫히 밝혀지겠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합니다.<br />
<br />
해외에서 거액의 부를 쌓아 모은 재산을 모국을 위해 쾌척한 훌륭한 기업인 3인에 대한 초· 중· 고교 교과서 수록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재일교포 기업인 출신인 전 방림방적 오너인 서갑호 씨가 포함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br />
<br />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고국에 거액을 지원한 서갑호 방림방적 전신 판본방직 회장(1915~1976)과 러시아에서 최고 부자가 된 최재형 선생(1860~1920), 미국에서 쌀농사로 큰돈을 번 김종림 선생(1886~1973) 등 3인의 업적을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br />
<br />
이 중 우리나라 섬유산업 선구자인 서갑호 선생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모진 고생 끝에 사카모토 방직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해 현 주일대사관부지와 건물을 고국에 기증했으며 이 부지는 현 시가로 따져 1조 원대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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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갑호 선생은 191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4세 때인 1928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의 상점 점원을 거쳐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웠다.<br />
그는 해방 이후 폐기처분된 방적기를 사 모아 사카모토방직을 설립하며 승승장구했다.<br />
일본에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한 그는 1950년 오사카 내 고액소득자 1위, 1952년 일본 전체 부호 순위 5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 재계 거물이 됐다.<br />
이후 일본에서 잇따라 새 공장 설립과 부실경쟁사 인수 등으로 급성장한 그는 일본 ‘섬유 왕’으로 불릴 정도로 섬유산업의 간판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했다.<br />
그는 또 1963년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같은 시기에 재일교포 고국 투자 권유를 받고 당시 산업은행 관리에 있던 태창방직(전 고려방직)을 인수해 판본방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바로 이 회사가 국내 대방(大紡) 중의 하나였던 방림방적의 전신이었다.<br />
특히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가를 위해 현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 용지를 구입해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br />
이후 이 용지와 건물을 1951년부터 대사관에 무상으로 대여했으며 1962년에 소유권을 정부에 제공하는 용단을 내렸다.<br />
이 땅의 현재 시가는 1조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br />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이 방적공장은 해방 이후 경상대 이공학부(현 서울공대) 출신인 한국인 간부 홍종모 씨에게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태창방직으로 바뀐 후 서갑호 선생이 인수해 사카모토 방직(판본방직)으로 바꿨다. 그 후 영등포 소재 공장(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은 방림방적으로 이름이 바뀐 채 시설을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공장 부지는 아파트단지로 매각했다. 따라서 한국에는 방림방적 설비와 부지는 없다.<br />
서갑호 회장의 아들이자 방림방 회장을 물려받았던 서상근 회장(1940년생)은 방림방을 정리한 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br />
서갑호 씨의 고국을 위한 거액 쾌척은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게 평가받고 있다.<br />
한편 서갑호 선생과 함께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해외 한국 기업인 중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상업으로 거액을 모아 1905년 한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br />
또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난 후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해 미국에 정착한 후 쌀농사로 큰 부를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농장 일부를 내놓고 비행학교 설립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으로 적극 지원한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br />
<br />
향후 방림방직 자리인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 주변에 서갑호 선생 동상과 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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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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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아간대부(정2품)를 지내시고 [[이천]](利川)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br />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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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孝養山)에 있다.<br />
<br />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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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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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 가족 ==<br />
* 본인:[[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br />
* 부인: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 아들: [[서필]](徐弼) (종1품 내사령)<br />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br />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br />
*** 손자며느리 : [[청주 한씨]](淸州韓氏) <br />
**** 증손자 :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br />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증손자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증손자 :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손자: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동생: [[서신통]](徐新通)<br />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br />
<br />
== 가족 관계 ==<br />
* 본인: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br />
* 부인 :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 아들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br />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 <br />
*** 손자 : [[서염(고려3)|서염]](徐廉)<br />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br />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br />
***** 고손녀: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徐氏)<br />
***** 고손자: [[서수]](徐琇 종1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br />
****** 고고손자: [[서장기]](徐長己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br />
*******고고고손자 : [[서진부]](徐振扶 정2품 좌복야左僕射)<br />
********고고고고손자 : [[서희적]](徐希積 종3품 내의시랑內議侍郞)<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영보]](徐永甫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선(고려)|서선]](徐瑄 종3품 중정대부(中正大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찬]](徐文贊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찬]](徐希贊 정2품 이부시랑(吏部侍郞) 평장사平章事)<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계]](徐元桂 군수(君守) <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중계]](徐仲桂 검교사인(檢校舍人)<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5)|서의]](徐誼 성균제주(成均祭酒).정 3품.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간(고려)|서간]](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후장]](徐後長 군수(君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후상]](徐後祥 추밀원사(樞密院事 종 2품. 부총리). 이부시랑 평장사(吏部侍郞平章事). 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호(고려)|서호]](徐浩 정치도감(整治都監) 좌랑(佐郎) 차관. 공신.충신)<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맹원]](徐孟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br />
****** 고고손자: [[서준방]](徐俊邦 정3품 형부상서(刑部尙書). 평당 서씨(平當徐氏) 시조)<br />
******* 고고고손자: [[서약진]](徐若珍 봉성군鳳城君)<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숭조]](徐崇祖 종2품 중추원사(中樞院事)<br />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손자:[[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 고고고손자: [[서원(고려)|서원]](徐元)(정2품 평장사)<br />
*********** 원손자:[[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br />
************아들 :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br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br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고손자 ;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고고손자 :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고고고손자:[[서순원(조선3)|서순원]](徐順元 승의랑(承議郞)) <br />
******************고고고고손자:[[서척]](徐滌 진사) <br />
****************고고손자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고고고손자: [[서필(조선1)|서필]](徐弼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손자: [[서윤충]](徐允忠 생원) <br />
***************** 고고고손자: [[서적(조선2)|서적]](徐積 통덕랑(通德郞 정 5품 문관.차관보)<br />
****************** 고고고고손자: [[서유령]](徐有齡 진사(進士)<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응성]](徐應星 진사(進士)<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홍제]](徐弘濟)<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홍도]](徐弘渡 의병장. 예빈시첨정(醴賓寺僉正).정3품 .차관)<br />
****************고고손자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고고고손자: [[서문형]](徐文亨 학생(學生))<br />
******************고고고고손자: [[서걸]](徐傑 진사)<br />
*******************고고고고고손자: [[서귀종]](徐貴宗 진사)<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방]](徐守邦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조선1)|서영]](徐泳 진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길]](徐吉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엽]](徐曄 학생(學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추(조선)|서추]](徐▼(王+追)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이성]](徐以成 학생(學生))<br />
****************고고손자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br />
*****************고고고손자 :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 서울시장.장관)<br />
******************고고고고손자 :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br />
*****************고고고손자 :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br />
******************고고고고손자 :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br />
******************고고고고손자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br />
***************** 고고고손자: [[서상]](徐祥)<br />
****************** 고고고고손자: [[서변(조선1)|서변]](徐汴 학생(學生)) <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정원(조선1)|서정원]](徐廷原 의병장)<br />
*************손자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br />
**************증자: [[서맹원(조선1)|서맹원]] (徐孟原)<br />
***************고손자 : [[서윤문]](徐允文 상장군(上將軍). 정 3품.차관)<br />
****************고고손자 : [[서효순]](徐孝純)<br />
*****************고고고손자 : [[서광희]](徐光希 수문장(守門將). 총경)<br />
***************고손자 : [[서윤화]](徐允和 진사(進士)<br />
****************고고손자 : [[서효기]](徐孝起)<br />
*****************고고고손자 : [[서하]](徐河)<br />
******************고고고고손자 :[[서인정]](徐仁禎 훈련주부(訓練主簿). 차관보) <br />
***************고손자 : [[서윤찬]](徐允贊 진사)<br />
****************고고손자: [[서효지]](徐孝止 이조참판. 종 2품.차관)<br />
*****************고고고손자 : [[서담]](徐淡 참봉(參奉).종 9품.사무관)<br />
**************증손자 : [[서숙원(조선1)|서숙원]](徐叔原 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 종 7품.이사관)<br />
***************고손자 : [[서윤무]](徐允武 정략장군(定略將軍).목사(牧使). 종 4품. 차관보)<br />
****************고고손자 : [[서순지]](徐順止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고고고손자: [[서관(조선2)|서관]](徐灌 진사(進士) <br />
******* 고고고손자: [[서영관(고려)|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br />
******* 고고고손자: [[서공(고려)|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고손자: [[서순(고려)|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br />
********고고고고손자: [[서저]](徐氐 병부낭중. 종 3품. 차관급)<br />
********고고고고손자: [[서평(고려)|서평]](徐坪 판도좌랑)<br />
********고고고고손자: [[서광(고려)|서광]](徐珖-예빈소경))<br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손자: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左承旨)정3품.장관)<br />
**********고고고고고손자: [[서온(고려)|서온]](徐溫.승지.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고려1)|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1)|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충(고려)|서충]](徐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신]](徐信 원주목사.문하시중. 종 1품. 국무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구(조선3)|서구]](徐矩 덕천군수(德川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조선3)|서수]](徐綏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종 2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모]](徐模)<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3)|서호]](徐皞 사인(起居舍人).충청도경차관(忠淸道敬差官).암행어사)<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고려)|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고려1)|서원]](徐遠 찬성사(贊成事). 정 2품.부총리)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선(조선)|서선]](徐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재상).우의정(右議政).정1품. 부총리)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달]](중훈대부교동현감(徐達中訓大夫喬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조(조선)|서조]](통정대부안성군수 徐遭通政大夫 安城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우]](徐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연(조선1)|서연]](徐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섬]](徐暹)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조선2)|서간]](군자감첨정증참의 徐趕軍資監僉正 贈叅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초]](徐超) 부사(府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적]](徐自孔): 감찰(監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규(조선1)|서규]](徐赳) 지평(持平)<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도]]:(徐自道) 세마(洗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소]](徐自逍) 감찰(監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절]](徐趃) 군수(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고려1)|서유]](徐逾 비인현사(庇仁縣事) <br />
******* 고고고손자: [[서성(고려)|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br />
******* 고고고손자: [[서염(고려)|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br />
******** 고고고고손자: [[서익]](徐翼 부령(司僕部令). 종 2 품. 부총리)<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裕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기]](徐原奇. 계성군(桂城君).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제(고려)|서제]](徐梯)<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맹]](徐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극인(고려)|서극인]](徐克仁)<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건손(조선)|서건손]](徐建孫 참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승(조선4)|서승]](徐繩 부사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백령]](徐百齡.동와(東窩). 조산대부(朝散大夫) 영천교수(永川敎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자통]](徐自通.군수(郡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자이]](徐自邇.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4)|서호]](徐浩)<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옥(조선4)|서옥]](徐沃.예빈시정(禮賓寺正), 중추부사(中樞副使)). 종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적]](徐友積)<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후적]](徐後積 통덕랑(通德郞))<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적]](徐景積 훈도(訓導))<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조선)|서양]](徐瀁)<br />
**** 고고손자: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br />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br />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br />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br />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춘]](徐椿 부여서씨파(扶餘徐氏派 대종)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2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첨]](徐詹 예빈사(禮賓寺) 소윤(少尹)<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구덕]](徐仇德)<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고려)|서경]](徐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습]](徐雨習)<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장손]](徐障孫)<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5)|서호]](徐浩)<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덕]](徐好德 봉정대부 진의부위(進義副尉))<br />
********** 손자: [[서익명(고려)|서익명]](徐益明 첨절제사)<br />
*********** 증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br />
************ 고손자: [[서희적(조선1)|서희적]]:(徐希積 관조당공파)<br />
*********** 증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br />
********** 손자: [[서언명(고려)|서언명]](徐彦明)<br />
*********** 증손자: [[서준(고려)|서준]](徐濬)<br />
************ 고손자: [[서린지]](徐麟趾)<br />
************* 고고손자: [[서신(조선2)|서신]](徐愼)<br />
************* 고고손자: [[서침(조선2)|서침]](徐忱)<br />
************* 고고손자: [[서념(조선)|서념]](徐恬)<br />
************* 고고손자: [[서협]](徐恊 부장공파)<br />
*********** 증손자: [[서저(고려2)|서저]](徐渚)<br />
*********** 증손자: [[서정(고려5)|서정]]:(徐汀 부사공파)<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릉]]([[서능]])(徐稜 장성서씨파(長城徐氏派)=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관(조선)|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손(조선)|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박]](徐樸(부여서씨(扶餘徐氏) 봉례공파(奉禮公派))<br />
********** [[서진(고려5)|서진]](徐進 판관)<br />
***********[[서열(고려)|서열]](徐悅 봉예랑)<br />
************[[서정수(고려1)|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 <br />
*************[[서희(고려1)|서희]](徐凞)<br />
************** [[서수손]](徐秀孫 장사랑)<br />
*************** [[서관(조선6)|서관]](徐寬 진사)<br />
**************** [[서진남]](徐震男 진사) <br />
***************** [[서익(조선)|서익]](徐益 목사(牧使)) <br />
****************** [[서룡갑]](徐龍甲)<br />
******************* [[서운준]](徐雲駿 현감)<br />
******************* [[서운기]](徐雲驥) <br />
******************** [[서필원]](徐必遠 병조판서):정의공파<br />
*********************[[서경조(조선)|서경조]](徐敬祖 목사(牧使))) <br />
********************** [[서정덕]](徐定德) <br />
*********************** [[서인달]](徐寅達) <br />
************************ [[서진태]](徐鎭泰) <br />
************************* [[서명록]](徐命祿) <br />
******************** [[서치원]](徐致遠 음직직장(蔭職直長))<br />
********************* [[서경선]](徐敬善) <br />
********************** [[서경지(조선)|서경지]](徐景智) <br />
*********************** [[서상진(조선)|서상진]](徐相晉)<br />
************************ [[서범례]](徐範禮) <br />
************************* [[서도유]](徐道裕 진사)<br />
****************** [[서호갑]]:(徐虎甲 참의공파)<br />
****************** [[서인갑]]:(徐寅甲 통정공파)<br />
****************** [[서양갑]](徐羊甲 혁명가.홍길동의 모델) : 석선공파<br />
****************** [[서영갑]]:(徐永甲 학생공파)<br />
****************** [[서옥갑]]:(徐玉甲 만죽파)<br />
*************[[서성(고려2)|서성]]:(徐盛 교위공파)<br />
***********[[서이(고려)|서이]](徐怡 성균관직장(直長)):직장공파<br />
************ [[서봉래]]:(徐鳳來 평용위공파)<br />
************* [[서치근]](徐致謹)<br />
************** [[서익희]](徐益禧)<br />
*************** [[서순경(조선2)|서순경]](徐順敬)<br />
************** [[서익상]](徐益祥)<br />
*************** [[서극경]](徐克敬)<br />
*************** [[서극신]](徐克信)<br />
************ [[서봉상]](徐鳳翔)<br />
************* [[서팔원]](徐八元)<br />
************** [[서영무(조선)|서영무]](徐永武)<br />
*************** [[서치령]]:(徐致齡 첨사공파)<br />
*************** [[서만령]]:(徐萬齡 사간공파)<br />
************* [[서팔개]]:(徐八凱 진사공파)<br />
************** [[서학정]](徐鶴禎)<br />
*************** [[서팽수]](徐彭壽)<br />
**************** [[서응진]](徐應進)<br />
*************** [[서귀수]](徐龜壽)<br />
**************** [[서응시(조선3)|서응시]](徐應時)<br />
**************** [[서응명]]:(徐應明 참봉공파)<br />
**************** [[서응남(조선)|서응남]](徐應男)<br />
**************** [[서응노]]:(徐應魯 진사공위응노파)<br />
************** [[서학령]](徐鶴齡)<br />
*************** [[서린수(조선2)|서린수]]:(徐麟壽 봉사공파)<br />
*************** [[서기수(조선)|서기수]](徐麒壽)<br />
************ [[서봉수(조선)|서봉수]](徐鳳壽)<br />
************* [[서치중]](徐致中)<br />
************** [[서령(조선2)|서령]](徐玲)<br />
*************** [[서윤무(조선1)|서윤무]](徐允武)<br />
************** [[서림(조선1)|서림]](徐琳)<br />
************** [[서린(조선5)|서린]](徐璘)<br />
*************** [[서사함]](徐士諴)<br />
**************** [[서응기(조선1)|서응기]](徐應期)<br />
**************** [[서응길(조선)|서응길]]:(徐應吉 매월암공파)<br />
*************** [[서사심]]:(徐士諶 선전공파)<br />
************** [[서류(조선)|서류]](徐瑠)<br />
*************** [[서사문]](徐士文)<br />
**************** [[서응명(조선)|서응명]](徐應命)<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남양(당성)서씨파(南陽((唐城)徐氏派) <br />
***************원손자: [[서숙]](徐淑)(우승지)<br />
**************아들: [[서충수]](徐忠守 도승지)<br />
***************원손자: [[서혼(조선2)|서혼]](徐混 부위)<br />
****************아들: [[서충필]](徐忠弼 부호군)<br />
****************아들: [[서충좌]](徐忠佐 학생(學生))<br />
****************아들: [[서충우]](徐忠佑 통정대부(通政大夫))<br />
*****************손자: [[서정연]](徐挺然 증 호조참판)<br />
******************증손자: [[서한장]](徐漢章 통덕랑(孝子通德郞)<br />
******************증손자: [[서한량]](徐漢亮)<br />
*****************손자: [[서정지]](徐挺之 선무랑(宣務郞))<br />
******************증손자: [[서한주]](徐漢柱 부사.학자)<br />
***********원손자: [[서원길]](교리공(校理公))<br />
************ 아들: [[서득부]](徐得富)<br />
************* 손자: [[서순경]](徐順卿 진용교위(進勇校尉)) <br />
************** 증손자: [[서호번]](徐好蕃 부위(副尉))<br />
*************** 고손자: [[서경덕]](徐敬德 학자.주기파(主氣派)의 거유)<br />
**************** 고고손자: [[서응기(조선)|서응기]](徐應麒)<br />
*************** 고손자: [[서형덕]](徐馨德 생원)<br />
*************** 고손자: [[서숭덕]](徐崇德)<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직]](徐稷(연산서씨파(連山徐氏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수(조선)|서종수]](徐宗秀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련]](徐潾 판관(判官))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령]](徐千齡 현감(縣監))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주]](徐澍)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후적(조선)|서후적]](徐後積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래]](徐必來)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조선1)|서익]](徐榏 현감(縣監))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규세]](徐奎世)<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도동]](徐道東)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택선]](徐宅善 부사(府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재(조선)|서윤재]](徐潤載 무과)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화(조선)|서윤재]](徐潤和)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간세(조선)|서간세]](徐幹世 무과)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徐秉▣)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극선]](徐克善)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헌(조선)|서병헌]](徐秉憲 군수(郡守))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집선]](徐集善)<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적]](徐效積)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성]](徐必成 첨정(僉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조선2)|서정]](徐椗)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명세]](徐名世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행]](徐必行)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숙(조선)|서숙]](徐橚 증 호조참판)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조]](徐喜朝)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덕]](徐秉德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해조]](徐海朝 참군(參議)) <br />
**** 증손자: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고손자: [[서면(고려)|서면]](徐冕 정4품 주부) <br />
****** 고고손자: [[서린(고려)|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br />
******* 고고고손자: [[서찬(고려6)|서찬]](徐瓚 (정4품 장령)<br />
******** 고고고고손자: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정3품 승지)<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고려3)|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천]](徐思川)<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근]](徐楊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경흥]](徐敬興.정3품 목사(牧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조선1)|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2)|서진]](徐晋 정3품 사재감정 교리공파(校理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혼(조선)|서혼]](徐混 정3품 우승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강(조선)|서강]](徐岡 정3품 대사성)<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산보]](徐山甫 정 4품 장령)<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운(조선)|서운]](徐運 동복현감(同福縣監).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항]](徐恒 하동현감(河東縣監).증 통예원 우통예(通禮院 右通禮).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관(조선3)|서관]](徐瓘 북부주부(北部主簿).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형(조선)|서형]](徐詗 종사랑(從仕郞).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선원]](徐善元)<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1)|서인원]](徐仁元 호조참의(戶曹參議).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정2품.장관).명암공파(鳴巖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예원]](徐禮元 진주목사.장군.공신.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조선3)|서우]](徐遇 사간원직장(司諫院直長).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근]](徐赾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정3품.차관)<br />
**** 증손자: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손자: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고고고손자: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br />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괄]](徐适 훈도(訓導))<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徐洗찰방(察訪))<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진원]](徐震元 진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감원]](徐次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원]](徐艮元)<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태원(조선)|서태원]](徐兌元)<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습]](徐漝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환]](徐渙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후(조선)|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업]](徐嶪 증 병조 판서 겸 부사(兵曹判書兼府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조선)|서수]](徐洙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무]](徐景茂 절충 장군(折衝將軍)<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대]](徐岱 장사랑)<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엄]](徐崦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조선2)|서영]](徐嶸 서흥파(瑞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팽려]](徐彭呂)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br />
*** 손자 : [[서영(고려3)|서영]](徐英)<br />
* 동생 : [[서신통]](徐新通)<br />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ikWW2s6gf9g]]<br />
달성서씨 [[서진(고려)|서진]]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mpAFlHvrcG0]]<br />
대구서씨 [[서한(고려)|서한]]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jha5bGTbwHk]]<br />
연산서씨시조 [[서준영(고려)|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uEEKPu0-mBI]]<br />
<br />
이천서씨 대종회 [[http://icheonseo.com/]]<br />
<br />
== [[방림]] ==<br />
대한민국의 방직업체로, 롯데그룹처럼 일본에서 시작했으며 과거 경방과 함께 서울 영등포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br />
본사의 모태는 1948년에 재일교포 [[서갑호]]가 폐기된 방적기들을 모아 세운 사카모토방적을 기반으로 한다. 초기에는 간사이 지역을 사업영역으로 삼아 1954년 오사카방적을 세우고 1956년에 부실기업 히타리방적을 인수하여 일본 내에서 성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1년에 [[서갑호]] 사장 자신이 학교법인 금강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일교포들을 도왔으며,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주일한국대표부 건물을 임대해줬다가 1962년 한국 정부에 넘겼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br />
<br />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br />
<br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묘소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br />
<br />
== [[서신일(徐神逸)의 음덕(陰德)]]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br />
<br />
[[서신일]](徐神逸)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고려(高麗) 초에 개성(開城) 교외에 살고 있었다.<br />
<br />
어느 날, 산에 갔을 때, 사슴이 뛰어왔다. 가만히 보니, 사슴이 화살을 맞고 있었다. 그는 살을 뽑아주고, 사삼을 숨겨 주었다.<br />
<br />
얼마 후 사냥꾼이 와서 사슴 간 곳을 물을 때, 다른 곳을 가리켜 주어 사슴을 살려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당신이 오늘 살려 준 사슴은 내 아들이오. 당신 때문에 내 아들이 살았으니, 대단히 고맙다고 하며, 당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재상(宰相)이 될 것이라 하고는 사라졌다.<br />
<br />
그 후 서신일(徐神逸)은 나이 80에 아들 [[서필]](徐弼)을 낳았다. [[서필]](徐弼)은 명상(名相)이었고, [[서필]](徐弼)의 아들 [[서희]](徐熙)는 요(遼) 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 봉산군(蓬山郡)에서 만나 담판하여 요(遼)의 공격을 막아 냄으로써 유명하였고, [[서희]](徐熙)의 아들 [[서눌]](徐訥)은 고려 8대 왕 현종(顯宗)의 장인(丈人)이 되었다. 그는 현종(顯宗), 9대 덕종(德宗), 10대 정종(靖宗) 등 3대의 명상(名相)으로 후에 정종(靖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는 등 역대로 내려오며 이름을 날렸다.<br />
<br />
[[서공(고려)|서공]](徐恭)은 [[서희]](徐熙)의 현손(玄孫)으로, 18대 의종(毅宗) 때 서경에 같이 가 문무관과 함께 활쏘기를 할 때 서경 사람은 잘 맞추었으나, 종신(從臣) 중에는 한 사람도 맞추지 못하여 왕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었을 때 [[서공(고려)|서공]](徐恭)이 두 번 맞추어 왕을 기쁘게 하였다.<br />
<br />
그 후 [[서공(고려)|서공]](徐恭)은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를 두 번 지냈고, 재상(宰相)이 된 후에도 더욱 겸손하였다. 그 중에도 경박(輕薄)한 문사(文士)들을 질시하였고, 무인(武人)을 예로 대우해 주었다. 의종(毅宗) 때 정중부(鄭仲夫)가 문신을 살해할 때 중방(重房)에서 순검군(巡檢軍) 22명을 보내어 그의 집을 호위해 준 일도 있었다.<br />
<br />
이와 같이 [[서씨]](徐氏) 집안은 고려 초기부터 혁혁한 집안으로 내려왔다. 모두 사슴을 살려 준 은덕(隱德)이라 한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br />
<br />
== [[희성당]](希聖堂) ==<br />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C%83%9D%EC%9B%90%EC%9D%BC%EA%B8%B0(%E9%BC%A0%E7%94%9F%E5%93%A1%E6%97%A5%E8%A8%98)서생원일기(鼠生員日記)2024-03-22T20:20:45Z<p>Jwseo21: </p>
<hr />
<div>서생원일기(鼠生員日記)<br />
<br />
작고(作故) 가수 김정구가 구성지게 열창(熱唱)했던 노래 ‘서생원일기(鼠生員日記)’를 경자년(庚子年) 새해 아침에 다시 듣고 있다.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으로 1942년에 취입한 대중가요다.<br />
<br />
<어제는 경기 개명 찾아갔건만<br />
<br />
오늘은 낙동강에 떨어진 선비<br />
<br />
알성급제 푸른 꿈은 어데로 가고<br />
<br />
한양에서 허탕길 고향가는 서생원<br />
<br />
행화촌 저문 날에 노새는 운다<br />
<br />
아가씨 선물 받은 쌈지도 운다<br />
<br />
견마잽이 하인들은 어데로가고<br />
<br />
병풍에 꽃잎만이 가는 길을 막는고<br />
<br />
주막집 호롱불도 서러울게요<br />
<br />
성주님 보기에도 무안할게요<br />
<br />
글방 공부 십년 공부 어데로 가고<br />
<br />
헛타방 치고 가나 가엾어라 서생원><br />
<br />
과거시험에 낙방(落榜)하고 고향 찾아가는 서생원의 처량하고 초라한 행색(行色)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낙방 선비의 절망과 좌절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오늘의 수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실망과 허기진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때의 서생원과 오늘의 서생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도 생각해 보게 한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는 조선 민중들의 고통과 서러움을 호소하는 저항의 몸부림을 김정구는 노래로 분출해 냈을 것이다. 그는 또 민족혼을 흔들어 일깨우기 위해 특유의 구슬픈 목소리로 하소연했을 것이다. 그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가고 있다.<br />
<br />
해가 바뀌면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덕담(德談)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우리네 세시풍습(歲時風習)이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다. 덕담의 소재는 돌아온 새해가 12지지(地支) 가운데 어느 동물에 해당되는가에 따라 주고받는 격려와 칭찬의 내용도 달라진다. 이를테면 소띠해에는 근면성실을 말하고, 닭띠해에는 새벽이 열리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말띠해에는 박차고 뛰어오르는 힘찬 기상, 양띠해에는 부드럽고 온순함, 용띠해에는 승천(昇天)하는 용꿈을 꾸라며 격려해 준다.<br />
<br />
그럼 쥐띠해는 무슨 말로 덕담을 나누어야 할까? 쥐는 흔히들 풍요로우며 미래를 예상하는 영리함이 있다고들 한다. 쥐는 사람 주변에서 서식하는 포유동물로 농작물을 먹어치우거나 각종 질병의 매개역할도 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각종 질병 퇴치를 위한 신약(新藥) 개발에 실험용으로 희생되면서 인간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양면성을 가지고도 있다. 쥐의 특성은 은밀성(隱蜜性)과 왜소성(倭少性), 다산성(多産性)에 있다.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부지런함과 다산(多産)의 왕성한 번식력이다, 몸집은 왜소하지만 민첩하게 운신(運身)하며 고양이, 올빼미, 족제비, 뱀 같은 천적으로부터 자기보호에 뛰어난 방어력을 가지고도 있다.<br />
<br />
쥐는 ‘미키마우스’, ‘톰과 제리’, ‘콩쥐팥쥐’와 같이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 우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12지지(地支) 동물 가운데 쥐를 의인화(擬人化)시켜 사람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쥐에 대한 대접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금수회의록’에서는 쥐를 ‘서생원(鼠生員)’이라 부른다. 서생원은 쥐를 의인화하여 속되게 부르는 별칭이지만 생원(生員)은 조선시대에서는 진사(進士)와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기도 했다. 쥐가 벼슬하는 초급관리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br />
<br />
쥐는 10개의 천관(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가 어울린 60갑자(甲子)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 쥐가 어떻게 해서 12동물 가운데 맨 앞자리를 차지했는가에 대해서는 음양오행과 역학(易學)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만큼 영리하고 약삭빠르며 귀엽고 잽싼 그의 동물적 특성이 작용한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그래서 60갑자를 설정할 때 쥐에 대해서는 쥐 서(鼠) 자를 쓰지 않고 아들 자(子)를 썼다는 것이다. 사람의 출생연도에 따른 띠를 말할 때는 쥐를 자(子)로 예우한다는 것이 전해오는 이야기이다.<br />
<br />
쥐가 제아무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설쳐대도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강하다. 쥐의 슬픈 운명이다. 한때는 사회 캠페인으로 쥐잡기 박멸 운동이 전개된 적도 있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고 했다. 태산이 떠나 갈듯이 요란하게 떠들더니 튀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었다는 뜻이다. 예고만 떠들썩하고 실제 결과는 별것 아니라는 비유적 표현이다.<br />
<br />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있다. 말은 언제나 새어나가기 마련이니 말조심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쥐는 남의 말이나 엿듣는 얌체 동물이라는 경계의 의미도 내포돼 있다. ‘고양이 앞의 쥐’라는 말은 강자 앞에서는 발발 떠는 약자의 비굴한 몸가짐을 빗대어 부르는 표현이다. 12지지를 선택할 때 고양이는 모르고 있다가 쥐가 1등 자리를 차지한 데 대한 앙갚음으로 고양이는 쥐만 보면 잡아 족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쥐새끼 같은 놈’이란 비속어도 있다.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하거나 자기 자신만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이기적 인간을 낮추어 욕하는 경우이다. ‘쥐뿔도 모른다’는 소리도 듣는다.<br />
<br />
<br />
[[서오전]](鼠獒傳)<br />
<br />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br />
<br />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br />
<br />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br />
<br />
쥐는 '서생원'이라고 부르는데 쥐 서(鼠)에 소과에 합격한 사람을 뜻하는 생원을 붙인 것이다.<br />
그런데 이렇게 지위도 높지 않은 서생원께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십이간지(十二干支)의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쥐 잡는 고양이도 십이간지에 끼지 못했는데 말이다.<br />
<br />
고양이가 십이간지에 끼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불교와 연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br />
극락으로 통하는 12개의 문을 지킬 수문장을 뽑기 위한 자리에 여러 동물들의 무술 스승이었던 고양이가 선두에 섰고 그 제자들인 소, 호랑이, 토끼, 용,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가 순서대로 섰다고 한다.<br />
<br />
이때 고양이가 볼일이 급하여 뒷간을 가게 되었는데 평소 함께 붙어 다니던 쥐에게 자리를 잠깐 부탁하고 갔다. 수문장 선발이 시작되어도 고양이가 오지 않자 쥐는 고양이가 수문장 직을 맡기 싫어서 고향으로 도망을 갔다고 거짓말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쥐가 고양이 대신 수문장직을 맡게 되었고, 그것도 열두 동물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br />
그래서 고양이는 간교한 쥐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쥐만 보면 쫓아가서 괴롭히고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br />
<br />
북방은 해가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을 먹고사는 것으로 밤의 동물은 서생원(鼠生員)인 쥐(子)가 대표적인 상징 동물이다. 쥐는 밤눈이 밝아 밤이 되면 도둑질하는 것이 능사인데 밤이면 생기가 넘치고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훔치는 성정을 갖는다.어둡고 가물거리는 북방수(北方水)를 현(玄)이라 하고 무기(武器)를 가지고 휴대한 호반을 무(武)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서생원과 도적은 그 가물거리는 현(玄)을 먹고산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현(玄)을 이용해서 사냥을 하고 도적질을 일삼는 자를 현무(玄武)라고 명명했음인 것이다.<br />
<br />
그래서 남의 재물을 몰래 숨어서 도적질하는 서생원과 도둑 그리고 현무는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밤도적을 현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현무는 북방수의 대명사인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엎드려서 살금살금 소리 없이 기어 다니는 것이 장기이다. 그래서 물은 언제나 땅에 엎드려서 기듯이 슬금슬금 흐른다.<br />
이러한 북방의 현무는 어두운 밤이면 염탐꾼을 몰래 보내서 적진을 살피고 숨어서 기습을 하는 것을 유일한 병법(兵法)으로 삼는다. 즉 정정당당히 싸우는 게 아니고 적을 속이고 유인하며 위장하고 숨어서 등 뒤에서 뒤통수를 치며 무찌르는 비겁한 싸움을 최고의 전술로 삼는다. 이같이 밤이 아니면 상대의 허점을 치고 찌르는데서 비롯되는 현무술수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손자병법이다.<br />
<br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br />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br />
<br />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22세 후손.<br />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br />
<br />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br />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br />
<br />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br />
<br />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br />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br />
<br />
8세 실전<br />
<br />
9세 실전<br />
<br />
10세 실전<br />
<br />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br />
<br />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br />
<br />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br />
<br />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br />
<br />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br />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br />
16세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br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br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br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br />
17세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br />
<br />
18세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br />
19세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br />
20세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br />
21세 [[서몽린]](徐夢麟 진사)<br />
<br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br />
22세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br />
[[서달증]](徐達曾 학자) <br />
<br />
[[서학증]](徐學曾 진사)<br />
<br />
23세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br />
24세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 <br />
<br />
<br />
== 가족 ==<br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br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br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br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br />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br />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br />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br />
********실 전<br />
*********실 전<br />
**********실 전<br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br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br />
*****************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br />
******************고조할아버지 :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증조아버지 :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할아버지 :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아버지: [[서몽린]](徐夢麟 진사)<br />
**********************본인: [[서달증]](徐達曾 학자) <br />
**********************동생: [[서학증]](徐學曾 진사)<br />
*********************작은아버지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사촌 :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조카 :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증조카 :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br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br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br />
*******************작은 증조할아버지 :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br />
********************작은할아버지 :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br />
********************작은할아버지 :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br />
********************작은할아버지 :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br />
*********************작은아버지 :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br />
*********************작은아버지 :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br />
**********************사촌 :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br />
**********************사촌 :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br />
**********************사촌 :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br />
**********************사촌 :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br />
**********************사촌 :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br />
**********************사촌 :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br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br />
*************작은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br />
**************작은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맹원(조선1)|서맹원]] (徐孟原)<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문]](徐允文 상장군(上將軍). 정 3품.차관)<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순]](徐孝純)<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 [[서광희]](徐光希 수문장(守門將). 총경)<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화]](徐允和 진사(進士)<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기]](徐孝起)<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 [[서하]](徐河)<br />
******************작은 고조할아버지 :[[서인정]](徐仁禎 훈련주부(訓練主簿). 차관보)<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찬]](徐允贊 진사)<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효지]](徐孝止 이조참판. 종 2품.차관)<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 [[서담]](徐淡 참봉(參奉).종 9품.사무관)<br />
**************작은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숙원(조선1)|서숙원]](徐叔原 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 종 7품.이사관)<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무]](徐允武 정략장군(定略將軍).목사(牧使). 종 4품. 차관보)<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순지]](徐順止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서관(조선2)|서관]](徐灌 진사(進士)<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서오전]](鼠獒傳) ==<br />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br />
<br />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br />
<br />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C%83%9D%EC%9B%90서생원2024-03-22T20:18:34Z<p>Jwseo21: </p>
<hr />
<div>서생원은 鼠生員이다. 徐生員이 아니다. 쥐 서(鼠)의 ‘서’라는 소리가 성(姓)씨로서의 서(徐)와 같은 우리말 발음이어서 서생원(徐生員)과 장난스럽게 혼동 시켜 쓰는 말이다. 그러니까 서생원은 쥐를 가리키는 높임말이다.<br />
실제 서(徐)씨를 놀릴 때, 반 장난으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반대로 지금은 보기도 듣기도 힘든 시골집의 도배한 천정(지붕 밑에 있는 공간과 방과의 사이에 보통 사람의 키보다 약 한 팔 반 정도의 높이에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고 도배한 것. 오래된 집은 도배할 때마다 덧대어 하기 때문에 두꺼워짐)에 쥐들이 달리기를 하여 밤에는 자다가도 잠이 깨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저 놈의 쥐새끼들이!’ 하면 더 시끄럽게 하여 잠을 못 자게 한다고, 밤 발은 쥐가 듣기 때문에, ‘허, 허, 서생원. 그만들 주무시게’하는 높임말로 쓰는 생원이이다. 생원은 크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나이 많은 선비를 높여 불러주는 호칭이다. <br />
<br />
서생원으로 가장 대접 받는 곳이 미국의 월트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미키 마우스이다.<br />
<br />
디즈니가 별 볼 일없이 지내며 기차의 화물칸에 무임승차하여 어디를 가는데 같은 화물칸의 저쪽 구석에서 열심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쥐를 보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쥐를 만화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여, 어려운 일을 뚫고 나가는 쥐의 일상생활을 대주제로 삼아 어렵사리 만화연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br />
<br />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사람들 혐오 대상 1호였던 ‘쥐새끼’가 일약 스타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여러 가지 생쥐들이 애완동물로 사랑 받기 시작하여 베스트셀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바람직한 행동을 하는 주인공으로 생쥐가 등장하기까지 한다.<br />
<br />
우리나라의 햄스터와 기니피그도 애완동물 쥐로 인기를 누린지 얼마 되지 않는다.<br />
<br />
우리나라에서 쥐를 싫어하는 것은 예부터 사람들이 먹기에도 모자라는 온갖 곡식을 축내기 때문이었다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싫어하게 되었다.<br />
<br />
[[서오전]](鼠獒傳)<br />
<br />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br />
<br />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br />
<br />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br />
<br />
쥐는 '서생원'이라고 부르는데 쥐 서(鼠)에 소과에 합격한 사람을 뜻하는 생원을 붙인 것이다.<br />
그런데 이렇게 지위도 높지 않은 서생원께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십이간지(十二干支)의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쥐 잡는 고양이도 십이간지에 끼지 못했는데 말이다.<br />
<br />
고양이가 십이간지에 끼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불교와 연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br />
극락으로 통하는 12개의 문을 지킬 수문장을 뽑기 위한 자리에 여러 동물들의 무술 스승이었던 고양이가 선두에 섰고 그 제자들인 소, 호랑이, 토끼, 용,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가 순서대로 섰다고 한다.<br />
<br />
이때 고양이가 볼일이 급하여 뒷간을 가게 되었는데 평소 함께 붙어 다니던 쥐에게 자리를 잠깐 부탁하고 갔다. 수문장 선발이 시작되어도 고양이가 오지 않자 쥐는 고양이가 수문장 직을 맡기 싫어서 고향으로 도망을 갔다고 거짓말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쥐가 고양이 대신 수문장직을 맡게 되었고, 그것도 열두 동물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br />
그래서 고양이는 간교한 쥐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쥐만 보면 쫓아가서 괴롭히고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br />
<br />
북방은 해가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을 먹고사는 것으로 밤의 동물은 서생원(鼠生員)인 쥐(子)가 대표적인 상징 동물이다. 쥐는 밤눈이 밝아 밤이 되면 도둑질하는 것이 능사인데 밤이면 생기가 넘치고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훔치는 성정을 갖는다.어둡고 가물거리는 북방수(北方水)를 현(玄)이라 하고 무기(武器)를 가지고 휴대한 호반을 무(武)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서생원과 도적은 그 가물거리는 현(玄)을 먹고산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현(玄)을 이용해서 사냥을 하고 도적질을 일삼는 자를 현무(玄武)라고 명명했음인 것이다.<br />
<br />
그래서 남의 재물을 몰래 숨어서 도적질하는 서생원과 도둑 그리고 현무는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밤도적을 현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현무는 북방수의 대명사인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엎드려서 살금살금 소리 없이 기어 다니는 것이 장기이다. 그래서 물은 언제나 땅에 엎드려서 기듯이 슬금슬금 흐른다.<br />
이러한 북방의 현무는 어두운 밤이면 염탐꾼을 몰래 보내서 적진을 살피고 숨어서 기습을 하는 것을 유일한 병법(兵法)으로 삼는다. 즉 정정당당히 싸우는 게 아니고 적을 속이고 유인하며 위장하고 숨어서 등 뒤에서 뒤통수를 치며 무찌르는 비겁한 싸움을 최고의 전술로 삼는다. 이같이 밤이 아니면 상대의 허점을 치고 찌르는데서 비롯되는 현무술수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손자병법이다.<br />
<br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br />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br />
<br />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22세 후손.<br />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br />
<br />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br />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br />
<br />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br />
<br />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br />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br />
<br />
8세 실전<br />
<br />
9세 실전<br />
<br />
10세 실전<br />
<br />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br />
<br />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br />
<br />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br />
<br />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br />
<br />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br />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br />
16세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br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br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br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br />
17세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br />
<br />
18세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br />
19세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br />
20세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br />
21세 [[서몽린]](徐夢麟 진사)<br />
<br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br />
22세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br />
[[서달증]](徐達曾 학자) <br />
<br />
[[서학증]](徐學曾 진사)<br />
<br />
23세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br />
24세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 <br />
<br />
<br />
== 가족 ==<br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br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br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br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br />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br />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br />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br />
********실 전<br />
*********실 전<br />
**********실 전<br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br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br />
*****************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br />
******************고조할아버지 :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증조아버지 :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할아버지 :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아버지: [[서몽린]](徐夢麟 진사)<br />
**********************본인: [[서달증]](徐達曾 학자) <br />
**********************동생: [[서학증]](徐學曾 진사)<br />
*********************작은아버지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사촌 :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조카 :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증조카 :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br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br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br />
*******************작은 증조할아버지 :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br />
********************작은할아버지 :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br />
********************작은할아버지 :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br />
********************작은할아버지 :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br />
*********************작은아버지 :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br />
*********************작은아버지 :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br />
**********************사촌 :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br />
**********************사촌 :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br />
**********************사촌 :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br />
**********************사촌 :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br />
**********************사촌 :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br />
**********************사촌 :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br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br />
*************작은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br />
**************작은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맹원(조선1)|서맹원]] (徐孟原)<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문]](徐允文 상장군(上將軍). 정 3품.차관)<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순]](徐孝純)<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 [[서광희]](徐光希 수문장(守門將). 총경)<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화]](徐允和 진사(進士)<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효기]](徐孝起)<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 [[서하]](徐河)<br />
******************작은 고조할아버지 :[[서인정]](徐仁禎 훈련주부(訓練主簿). 차관보)<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찬]](徐允贊 진사)<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효지]](徐孝止 이조참판. 종 2품.차관)<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 [[서담]](徐淡 참봉(參奉).종 9품.사무관)<br />
**************작은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숙원(조선1)|서숙원]](徐叔原 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 종 7품.이사관)<br />
***************작은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윤무]](徐允武 정략장군(定略將軍).목사(牧使). 종 4품. 차관보)<br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순지]](徐順止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작은 고고조할아버지: [[서관(조선2)|서관]](徐灌 진사(進士)<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서오전]](鼠獒傳) ==<br />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br />
<br />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br />
<br />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A0%9C2%EC%97%B0%ED%8F%89%ED%95%B4%EC%A0%84제2연평해전2024-03-22T08:40:07Z<p>Jwseo21: </p>
<hr />
<div>[[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br />
<br />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30분간의 교전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우리나라 해군 6명이 전사한 해전을 말한다.<br />
<br />
<br />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남북 함정 사이의 해전.<br />
<br />
언제 2002년 6월 29일 오전<br />
<br />
어디서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br />
<br />
누가 한국과 북한 함정<br />
<br />
무엇을 해전<br />
<br />
어떻게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한국 경비정에 기습 포격<br />
<br />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무렵,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났다. 1999년 6월 15일 오전에 발생한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남북한 함정 사이의 해전이다.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었다.<br />
<br />
교전에 앞서 북방한계선 북한측 해상에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국 해군의 고속정 4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동시에 퇴거 경고 방송을 하는 한편, 교전 대비태세를 취하였다.<br />
<br />
그러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고, 곧바로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하였다. 이어 10시 43분경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나머지 1척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해, 10시 50분경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함으로써 교전은 25분 만에 끝이 났다. 제2연평해전으로 한국 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군인)]]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명이 부상하였다. 아군측 해군 참수리고속정 1척이 침몰하였는데, 북한 측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br />
<br />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당시 북한 쪽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br />
<br />
서후원(군인)<br />
<br />
대한민국의 군인(해군)이며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하였다.<br />
<br />
1980년 11월 28일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에서 출생하였다. 상산전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기능대학 재학중 2001년 8월 6일 해군에 입대하여 11월 10일 해군부사관 189기로 임관하였다. 2002년 3월 13일 참수리고속정 357호(정장 윤영하)의 기관실 내연사로 부임하였다. 2002년 6월 29일 NLL을 침범한 북한군을 막기위해 근접방어 작전을 펼치다 적의 기습적인 공격(제2연평해전)을 받고 전사하였다. 해군 중사 계급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서후원함]] ==<br />
PKG 716(Patrol Killer Guided missile)<br />
<br />
PKX 사업으로 건조된 한국형 차기고속정 5번함.<br />
<br />
== [[제2연평해전]] ==<br />
<br />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30분간의 교전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우리나라 해군 6명이 전사한 해전을 말한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D%9B%84%EC%9B%90%ED%95%A8서후원함2024-03-22T08:37:56Z<p>Jwseo21: </p>
<hr />
<div>[[서후원함]]<br />
<br />
PKG 716(Patrol Killer Guided missile)<br />
<br />
PKX 사업으로 건조된 한국형 차기고속정 5번함.<br />
<br />
한국형 차기고속정(PKX, Patrol Killer eXperimental) 사업으로 건조된 윤영하급 미사일 고속함의 5번 함이다. PKX는 스텔스 고속정으로 설계되어 북한의 대함미사일을 피할 수 있다.<br />
<br />
함명은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북방한계선을 지키다 북한군 경비정 기습으로 전사한 고(故)[[서후원(군인)]] 중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해군은 6.25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전사자 이름을 붙이는 것을 고려했었다. 하지만 차기고속정 사업이 제2연평해전을 계기로 시작되었고,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교전영웅들을 기리는 차원에서 5번함의 함명을 서후원함으로 결정하였다.<br />
<br />
무장으로는 76mm급 함포와 ‘해성’ 국산 대함미사일 4기를 장착한다. 여기에 부무장으로 40mm 2연장 포를 장착한다. 기존의 고속함은 350t의 배수량을 기본으로 설계되며 대공 및 수상 근접전을 고려해 염가의 대공레이더, 열영상 장비를 장착하여 제한된 전투능력을 보유해 왔다. 하지만 윤영하급 고속함은 이전의 참수리급보다 강력한 공격력과 은밀성을 바탕으로 생존성이 향상되었다.<br />
<br />
[[서후원함]]이 속한 윤영하급 미사일 고속함은 기본배수량 400t급 위터제트 추진 함정으로 40척 건조를 계획하고 있다. 1차 계획으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9척을 건조할 예정이었다. 건조는 미사일 장착여부에 따라 미사일 장착형인 PK-A형과 일반형인 PK-B로 나누어서 진행될 예정이다. 서후원함은 PK-A형에 만재 배수량은 570t이며, 1차 건조 대상 9척 모두 미사일 장착형이다. [[서후원함]]은 STX조선해양에서 2009년 12월 진수되었다.<br />
<br />
서후원(군인)<br />
<br />
대한민국의 군인(해군)이며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하였다.<br />
<br />
1980년 11월 28일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에서 출생하였다. 상산전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기능대학 재학중 2001년 8월 6일 해군에 입대하여 11월 10일 해군부사관 189기로 임관하였다. 2002년 3월 13일 참수리고속정 357호(정장 윤영하)의 기관실 내연사로 부임하였다. 2002년 6월 29일 NLL을 침범한 북한군을 막기위해 근접방어 작전을 펼치다 적의 기습적인 공격(제2연평해전)을 받고 전사하였다. 해군 중사 계급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서후원함]] ==<br />
PKG 716(Patrol Killer Guided missile)<br />
<br />
PKX 사업으로 건조된 한국형 차기고속정 5번함.<br />
<br />
== [[제2연평해전]] ==<br />
<br />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30분간의 교전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우리나라 해군 6명이 전사한 해전을 말한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D%9B%84%EC%9B%90(%EA%B5%B0%EC%9D%B8)서후원(군인)2024-03-22T08:34:25Z<p>Jwseo21: /* 서후원함 */</p>
<hr />
<div>서후원(군인)<br />
<br />
대한민국의 군인(해군)이며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하였다.<br />
<br />
1980년 11월 28일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에서 출생하였다. 상산전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기능대학 재학중 2001년 8월 6일 해군에 입대하여 11월 10일 해군부사관 189기로 임관하였다. 2002년 3월 13일 참수리고속정 357호(정장 윤영하)의 기관실 내연사로 부임하였다. 2002년 6월 29일 NLL을 침범한 북한군을 막기위해 근접방어 작전을 펼치다 적의 기습적인 공격(제2연평해전)을 받고 전사하였다. 해군 중사 계급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서후원함]] ==<br />
PKG 716(Patrol Killer Guided missile)<br />
<br />
PKX 사업으로 건조된 한국형 차기고속정 5번함.<br />
<br />
== [[제2연평해전]] ==<br />
<br />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30분간의 교전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우리나라 해군 6명이 전사한 해전을 말한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C%9D%BC%EC%97%B0(%EC%84%9C%EC%94%A8%EC%9D%BC%EA%B0%80%EC%97%B0%ED%95%A9%ED%9A%8C)_%EC%9A%B8%EC%82%B0서일연(서씨일가연합회) 울산2024-03-21T00:28:36Z<p>Jwseo21: 새 문서: 지회장 서경숙(사업가) ==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p>
<hr />
<div>지회장 서경숙(사업가)<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국서씨연합회(全國徐氏聯合會),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천하서씨일가연합회(天下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0%80%EC%83%81%ED%98%84%EC%8B%A4_%ED%8F%AC%ED%95%A8_%EB%AC%B8%EC%84%9C가상현실 포함 문서2024-03-17T03:57:28Z<p>Admin: </p>
<hr />
<div>* [[가압경수형 원자로]]<br />
* [[가압중수형 원자로]]<br />
* [[강대운-진주성싸움]]<br />
* [[강동6주]]<br />
* [[강릉 굴산사지]]<br />
* [[강릉 보현사]]<br />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br />
* [[강릉 오죽헌]]<br />
* [[강진 다산초당~백련사 간 숲길]]<br />
* [[강진 무위사]]<br />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br />
* [[강진 백련사]]<br />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br />
* [[강진고려청자요지]]<br />
* [[개청]]<br />
* [[거란]]<br />
* [[거란침입]]<br />
* [[거북선]]<br />
* [[견당매물사]]<br />
* [[경복궁]]<br />
* [[경부고속도로]]<br />
* [[경종국장도감의궤]]<br />
* [[경종단의왕후가례도감의궤]]<br />
* [[경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br />
* [[경주 통일전]]<br />
* [[경주 황룡사지]]<br />
* [[경주손씨 송첨종택]]<br />
* [[계백]]<br />
* [[계백장군 유적 전승지]]<br />
* [[고구려 광개토대왕]]<br />
* [[고려대장경]]<br />
* [[고려말 왜구의 침입]]<br />
* [[고려사]]<br />
* [[고려청자]]<br />
* [[고리원자력발전소]]<br />
* [[고성 유점사]]<br />
* [[고양 태고사]]<br />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br />
* [[고종대례의궤]]<br />
* [[곡성 태안사]]<br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br />
* [[곽재우]]<br />
* [[광복절]]<br />
* [[괴산 각연사]]<br />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br />
* [[교웅]]<br />
* [[교장]]<br />
* [[구례 연곡사]]<br />
*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br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br />
* [[구월산]]<br />
* [[구월산유격대]]<br />
*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br />
* [[국립종축원]]<br />
* [[국립축산과학원]]<br />
* [[국제연합한국재건단]]<br />
* [[국회 오물투척사건]]<br />
* [[군기시]]<br />
* [[군위 인각사]]<br />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br />
* [[굴뗏목양식]]<br />
* [[권근]]<br />
* [[권율]]<br />
* [[귀주대첩]]<br />
* [[극동건설]]<br />
* [[금강지]]<br />
* [[금산 종용사]]<br />
* [[금산 칠백의총]]<br />
*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br />
* [[금산전투]]<br />
* [[금성 라디오 A-501]]<br />
* [[김기창-명량대첩]]<br />
* [[김대성]]<br />
* [[김대성 표준영정]]<br />
* [[김대정]]<br />
* [[김생]]<br />
* [[김서봉-구월산지구 유격대]]<br />
* [[김서봉-삼별초의 대몽항전]]<br />
* [[김서봉-서울부산간고속도로]]<br />
* [[김숙진-소양강댐]]<br />
* [[김숙진-한국비료]]<br />
* [[김원-마산공업단지]]<br />
* [[김원-해안사방]]<br />
* [[김유신]]<br />
* [[김유신 표준영정]]<br />
* [[김정호]]<br />
* [[김제 금산사]]<br />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br />
* [[김종필]]<br />
* [[김종하-한일합섬]]<br />
* [[김창락-반구대 풍요제]]<br />
* [[김창락-쌍용시멘트]]<br />
* [[김창락-울주 반구대 암각도]]<br />
* [[김창락-원양어업]]<br />
* [[김충선-혜초의 천축구법 활동]]<br />
* [[김태]]<br />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br />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br />
* [[김태-육진개척]]<br />
* [[김태-홍의장군 곽재우]]<br />
* [[김태-황룡사의 조영]]<br />
* [[김형구-고리원자력발전소]]<br />
* [[김형구-한산대첩]]<br />
* [[나당연합]]<br />
* [[나당전쟁]]<br />
* [[나세]]<br />
* [[남양방조제]]<br />
* [[남원 실상사]]<br />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br />
*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br />
* [[남해대교]]<br />
* [[내마을 붉은땅 없애기운동]]<br />
*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br />
* [[농업기계]]<br />
*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br />
* [[다산초당]]<br />
* [[다산초당 현판]]<br />
* [[단의빈예장도감의궤]]<br />
* [[대단지조림사업]]<br />
* [[대사례의궤]]<br />
* [[대통]]<br />
* [[대한석탄공사]]<br />
* [[덕소]]<br />
* [[덕수궁]]<br />
* [[덕수궁 중화전]]<br />
* [[덕수궁 함녕전]]<br />
* [[도윤]]<br />
* [[독립기념관]]<br />
* [[동녕부]]<br />
* [[동명목재 재산헌납사건]]<br />
* [[동학농민운동]]<br />
* [[롯데정밀화학]]<br />
* [[마산자유무역지역]]<br />
* [[매소성]]<br />
* [[매소성전투]]<br />
* [[명량대첩]]<br />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br />
* [[목민심서]]<br />
* [[무열왕 표준영정]]<br />
* [[무진장 조림단지]]<br />
*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 영정]]<br />
* [[문경 봉암사]]<br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br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br />
* [[문학진-강원탄광]]<br />
* [[문학진-고려청자]]<br />
* [[문학진-쌍성수복]]<br />
* [[문학진-지하철제1호선승강구]]<br />
* [[문학진-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시위]]<br />
* [[문효세자책례계병]]<br />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br />
* [[민영환 유서]]<br />
* [[민영환 자결터]]<br />
* [[민영환 집터]]<br />
* [[민족기록화 '정약용과 저술'을 통해 본 정약용의 삶의 세계]]<br />
* [[민족기록화 작업실]]<br />
* [[민족대표 33인]]<br />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br />
* [[박각순-남해대교]]<br />
* [[박각순-산업선전철]]<br />
* [[박각순-살수대첩]]<br />
* [[박광진-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br />
* [[박광진-아산방조제]]<br />
* [[박광진-장보고의 해상 활동]]<br />
* [[박기태]]<br />
*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br />
* [[박득순-지하철]]<br />
* [[박득순-허준과 동의보감]]<br />
*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br />
*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 관련 기사]]<br />
* [[박석호]]<br />
* [[박석호-추풍령싸움]]<br />
* [[박성환-예성강도]]<br />
* [[박영선-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의사]]<br />
* [[박영선-인천판유리]]<br />
* [[박영선-현충사]]<br />
* [[박창돈-금성사]]<br />
* [[박창돈-안시성싸움]]<br />
* [[박창돈-최영장군의 홍산전투]]<br />
* [[박항섭]]<br />
* [[박항섭-연안성싸움]]<br />
* [[박항섭-한국기계]]<br />
* [[박항섭-한양화학공업]]<br />
* [[반구대 설화]]<br />
* [[반구대 암각화]]<br />
* [[반구서원 유허비]]<br />
* [[백마산성]]<br />
* [[백산성]]<br />
* [[백운동 별서정원]]<br />
* [[백운첩]]<br />
* [[벽란도]]<br />
* [[보령 성주사지]]<br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br />
* [[보사공신]]<br />
* [[보우(고려)]]<br />
* [[부여 보광사]]<br />
*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br />
* [[사방기념공원]]<br />
* [[사방사업]]<br />
* [[사수대첩]]<br />
* [[사카린 밀수사건]]<br />
* [[산림청]]<br />
* [[산지사방]]<br />
* [[삼도수군통제영]]<br />
* [[삼법]]<br />
* [[삼별초]]<br />
* [[삼별초항쟁]]<br />
* [[삼화목장]]<br />
* [[상왕산]]<br />
*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br />
* [[서산 보원사]]<br />
* [[서산 보원사지]]<br />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br />
* [[서울 지하철 1호선]]<br />
* [[선의왕후국장도감의궤]]<br />
* [[설록다원강진]]<br />
* [[성혼]]<br />
* [[소현]]<br />
* [[손수광-청산리싸움]]<br />
*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br />
*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관련 기사]]<br />
* [[손응성-불국사]]<br />
*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br />
* [[숙종국장도감의궤]]<br />
*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br />
* [[순비책봉의궤]]<br />
* [[순조국장도감의궤]]<br />
* [[순종순정황후가례도감의궤]]<br />
* [[순천 선암사]]<br />
* [[승탑비문 작업노트]]<br />
* [[승형]]<br />
* [[신고리원전 건설중단사건]]<br />
* [[신라 태종무열왕]]<br />
* [[신라의 삼국통일]]<br />
* [[신영상]]<br />
* [[신영상-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장군]]<br />
* [[심덕부]]<br />
* [[쌍영총]]<br />
* [[쌍영총 고분벽화]]<br />
* [[쌍용양회 동해공장]]<br />
* [[쌍용양회 문경공장]]<br />
* [[쌍용양회 영월공장]]<br />
* [[쌍용양회공업]]<br />
* [[아산방조제]]<br />
* [[아산호]]<br />
* [[안시성]]<br />
* [[안시성전투]]<br />
* [[안재후]]<br />
* [[안재후-여진정벌]]<br />
* [[야계사방]]<br />
* [[양양 선림원지]]<br />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br />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br />
*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br />
*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br />
* [[양주 회암사지]]<br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br />
* [[양평 용문사]]<br />
*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비]]<br />
* [[여주 고달사지]]<br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br />
* [[여주 신륵사]]<br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br />
* [[역사인물초상화 회의 0720]]<br />
* [[연안성싸움]]<br />
* [[영규]]<br />
* [[영동 영국사]]<br />
*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비]]<br />
* [[영동선 전철]]<br />
* [[영암 도갑사]]<br />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br />
* [[영월 법흥사]]<br />
* [[영월 흥녕사지]]<br />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br />
* [[영접도감사제청의궤]]<br />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br />
* [[영주 부석사]]<br />
* [[영주 비로사]]<br />
*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br />
* [[예성강]]<br />
* [[예천 명봉사]]<br />
*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br />
* [[오승우-신라의 당군 격퇴와 삼국통일]]<br />
* [[오승우-포항종합제철]]<br />
* [[오승우-행주대첩]]<br />
* [[오승우-황산싸움]]<br />
* [[오승윤-구미전자공업]]<br />
* [[오승윤-동학교주 전봉준]]<br />
* [[왕세자탄강진하도병]]<br />
* [[왕오천축국전]]<br />
* [[요소비료]]<br />
* [[용인 서봉사지]]<br />
*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br />
* [[울주 반구대 암각화]]<br />
* [[울주 반구대 암각화 수몰]]<br />
* [[울주 천전리 각석]]<br />
* [[원균]]<br />
* [[원양어업]]<br />
* [[원주 거돈사지]]<br />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br />
* [[원주 흥법사지]]<br />
*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br />
* [[원행을묘정리의궤]]<br />
* [[월성원자력발전소]]<br />
* [[육진 개척]]<br />
* [[윤두서]]<br />
* [[윤선도]]<br />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br />
* [[윤중식-8.15해방]]<br />
* [[을사조약]]<br />
* [[을지문덕]]<br />
* [[의성김씨 학봉종택]]<br />
*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br />
* [[의순]]<br />
* [[이괄]]<br />
* [[이덕휘]]<br />
* [[이동훈-환경정리새마을]]<br />
* [[이마동]]<br />
* [[이마동-감귤]]<br />
* [[이마동-소득사업(새마을)]]<br />
* [[이병철]]<br />
* [[이시헌]]<br />
* [[이억기]]<br />
* [[이용환-굴뗏목양식]]<br />
* [[이용환-귀주대첩]]<br />
* [[이용환-삼도물산]]<br />
* [[이의주]]<br />
*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br />
* [[이의주-호남정유]]<br />
* [[이인영-삼화목장]]<br />
* [[이인영-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br />
* [[이인영-협업영농새마을(개곡리)]]<br />
* [[이종상-고구려 고분 벽화]]<br />
* [[이종상-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br />
* [[이종상-김대성과 석굴암]]<br />
* [[이종상-태종무열왕]]<br />
* [[이지당]]<br />
* [[이지함]]<br />
* [[이항로]]<br />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br />
* [[인천문화예술회관]]<br />
* [[인천판유리]]<br />
* [[인천항]]<br />
* [[인천항 도크]]<br />
* [[인현왕후국장도감의궤]]<br />
* [[임직순-석유화학공업단지]]<br />
* [[임진왜란]]<br />
* [[자초]]<br />
* [[장두건]]<br />
* [[장두건-종합우수새마을(묵현리)]]<br />
* [[장리석-국립종축장]]<br />
* [[장리석-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선생]]<br />
* [[장리석-홍주성수복]]<br />
* [[장보고]]<br />
* [[장흥 보림사]]<br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br />
* [[재조대장경]]<br />
* [[전봉준]]<br />
* [[전쟁기념관]]<br />
* [[정암진싸움]]<br />
* [[정약용]]<br />
* [[정영렬-무진장조림단지]]<br />
* [[정영렬-팔당수력발전소]]<br />
* [[정영열-연개소문의 사수싸움]]<br />
* [[정읍 전봉준 유적]]<br />
* [[정조국장도감의궤]]<br />
* [[정창섭]]<br />
* [[정창섭-인천항도크]]<br />
* [[정창섭-인천항제2도크]]<br />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br />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br />
* [[정창섭-태백산전투]]<br />
* [[정창섭-화랑도의 수련]]<br />
* [[정학연]]<br />
* [[정현]]<br />
*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br />
*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br />
* [[조헌]]<br />
* [[조헌 표준영정]]<br />
* [[종린]]<br />
* [[지눌]]<br />
* [[지부복궐상소]]<br />
* [[지종]]<br />
* [[진도 굴포당]]<br />
* [[진도 남도석성]]<br />
* [[진도 정충사]]<br />
* [[진양하씨 단지종택]]<br />
* [[진주성]]<br />
* [[진주유씨 모산종택]]<br />
* [[진주정씨 우복종택]]<br />
* [[찬영]]<br />
* [[창경궁]]<br />
* [[창덕궁]]<br />
* [[창덕궁 낙선재]]<br />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br />
* [[천희]]<br />
* [[철종철인왕후가례도감의궤]]<br />
* [[청구도]]<br />
* [[청도 운문사]]<br />
* [[청도 운문사 설송대사비]]<br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br />
* [[청산리대첩]]<br />
* [[청주전투]]<br />
* [[청해진]]<br />
* [[초조대장경]]<br />
* [[최대섭]]<br />
* [[최대섭-고려대장경]]<br />
* [[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br />
* [[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br />
*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br />
* [[최무선]]<br />
* [[최영]]<br />
* [[최영 표준영정]]<br />
* [[최익현]]<br />
* [[최해산]]<br />
* [[충감]]<br />
* [[충주 억정사지]]<br />
*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br />
* [[충주 정토사지]]<br />
*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br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br />
* [[충주비료공장]]<br />
* [[칠곡 선봉사]]<br />
*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br />
* [[탐라총관부]]<br />
* [[태화복지재단]]<br />
* [[태화빌딩]]<br />
* [[팔당댐]]<br />
* [[팔당수력발전소]]<br />
* [[평양성]]<br />
* [[평택항]]<br />
* [[포항 보경사]]<br />
*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br />
* [[포항종합제철]]<br />
* [[포항철강산업단지 관리공단]]<br />
* [[하동 쌍계사]]<br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br />
* [[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br />
* [[학일]]<br />
* [[한국비료공업]]<br />
* [[한국수력원자력]]<br />
* [[한국학중앙연구원]]<br />
* [[한글-0516 일러]]<br />
* [[한글-0516 회의]]<br />
* [[한글-0524 회의]]<br />
* [[한글-171031 회의]]<br />
* [[한글고문서팀 파빌리온]]<br />
* [[한빛원자력발전소]]<br />
* [[한산대첩]]<br />
* [[한울원자력발전소]]<br />
* [[한호 표준영정]]<br />
* [[합천 반야사지]]<br />
*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br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br />
* [[해남윤씨 녹우당]]<br />
* [[해린]]<br />
* [[해안사방]]<br />
* [[행주대첩]]<br />
* [[행주산성]]<br />
* [[현각]]<br />
* [[현수교]]<br />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br />
* [[혜근]]<br />
* [[혜심]]<br />
* [[혜장]]<br />
* [[혜초]]<br />
* [[호남고속도로]]<br />
* [[혼수]]<br />
* [[홍산전투]]<br />
* [[홍주성전투]]<br />
* [[화랑도]]<br />
* [[화순 쌍봉사]]<br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br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br />
* [[화통도감]]<br />
* [[황산벌싸움]]<br />
* [[회역사]]<br />
*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br />
*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br />
* [[효장세자가례도감의궤]]<br />
*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br />
* [[효종국장도감의궤]]<br />
* [[후연]]<br />
* [[휴정]]</div>Admin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C%83%81%EA%B5%90(%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서상교(독립운동가)2024-03-15T22:48:32Z<p>Jwseo21: /* 가족 */</p>
<hr />
<div>[[서상교]](徐尙敎)<br />
<br />
[[서상교]]는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교내의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의 결성에 참여하여 체육국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은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사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의 밀고로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br />
<br />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을 조직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br />
<br />
[[서상교]](徐尙敎)는 1923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南山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부친 [[서정조]](徐正祖)의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字)는 문보(文甫)이고 호는 목민(木民)이다. 본관은 [[달성서씨]](達城)이며,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후손이다.<br />
<br />
어려서는 대구 지역의 부호였으나, 국망(國亡) 이후 가세가 기울었으며, 그의 할아버지 [[서건수]](徐健洙)도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것에 대해 개탄하던 부친으로부터 중국이나 만주로 망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으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친구들보다 두 살 정도 많은 나이로 늘 과묵하고 운동을 잘하며, 의지가 강하다는 평을 들었다.<br />
<br />
1942년 4월 일제가 강제로 행한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 및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게 하는 것 등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절친한 친구였던 이상호(李相虎)의 집에서 김상길(金相吉)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으고, 체육국장에 선임되었다. 회의 명칭을 태극단이라고 한 것은 한말 이래 사용되어 온 태극기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조선 민족 최대의 목표인 독립을 쟁취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T · K · D라는 약칭도 함께 사용하였다.<br />
<br />
이후 태극단은 김정진(金正鎭) · 이준윤(李浚允) · 이원현(李元鉉) · 윤삼용(尹三龍) · 이태원(李兌遠) · 최두환(崔斗煥) 등을 20여명의 단원을 확보하였으며, 1943년 5월 9일 대구 비파산(琵琶山)에 모여 정식으로 결단식을 갖기로 하였다.<br />
<br />
참여 인원이 적어 결단식은 6월 6일로 연기되었으나, 이후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단장은 이상호가 맡았으며, 산하에 관방국(官房局) · 체육국(體育局) · 과학국(科學局) · 군사부(軍事部) · 항공부(航空部) · 등산부(登山部) 등 10여 개의 부서를 두었는데, 유도 유단자였던 그는 등산부장과 무도(武道)부장을 담당하였다.<br />
<br />
태극단은 주로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군사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이나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이다. 또한, 중학교 1 · 2학년생과 보통학교 상급반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건아대(健兒隊)라는 별도의 조직을 두어 조직 규모를 확대하고자 하였다.<br />
<br />
그러나 5월 하순경 내부의 밀고로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으며, 5월 23일 수업 도중 학교에서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소년 형량 단기 5년, 장기 7년을 언도받고 인천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1945년 8 · 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br />
<br />
수감 중 심장병 등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생계를 위해 서울은행에서 정년까지 근무하였다. 이후에는 순국선열 · 애국동지사업기금 운영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한국독립운동가족회 고문, 광복회 이사 및 사무총장 등을 지냈으며, 2018년 3월 13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br />
<br />
<br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br />
<br />
<br />
== 가족 ==<br />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br />
<br />
* 고고조할아버지: [[서홍렬]](徐洪烈)<br />
** 고조할아버지: [[서찬규]](徐贊奎 임재. 학자.영남의 거두)<br />
*** 증조할아버지: [[서진국]](徐鎭國)<br />
**** 할아버지: [[서건수]](徐健洙 애국지사)<br />
***** 아버지: [[서정조]](徐正朝)<br />
****** 본인: [[서상교]](徐尙敎 독립운동가)<br />
<br />
<br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br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C045.lstC045.lst2024-03-14T06:21:30Z<p>Admin: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pre><br />
#Project<br />
h1 민족기록화 -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br />
h3 한국 기록유산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자원 개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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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인물 민영환 https://dh.aks.ac.kr/Encyves/wiki/index.php/민영환 https://dh.aks.ac.kr/Encyves/Graph/icons/joseon_mungwan_mid.png 1<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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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사건 임오군란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565 https://dh.aks.ac.kr/VR/style/outlink.png 0<br />
을사조약 사건 을사조약 https://dh.aks.ac.kr/Encyves/wiki/index.php/을사조약 https://dh.aks.ac.kr/Encyves/Graph/icons/eulsa_treaty.png 1<br />
조계사 문화유산 조계사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570 https://dh.aks.ac.kr/VR/style/outlink.png 0<br />
손수광-충정공_민영환의_자결순국_관련_기사 문헌 손수광-충정공_민영환의_자결순국_관련_기사 https://dh.aks.ac.kr/Encyves/wiki/index.php/손수광-충정공_민영환의_자결순국_관련_기사 https://dh.aks.ac.kr/Encyves/Graph/icons/modern_book.png 1<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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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_어진(국립고궁박물관) 초상화 고종_어진(국립고궁박물관) https://dh.aks.ac.kr/Encyves/wiki/index.php/고종_어진(국립고궁박물관) https://dh.aks.ac.kr/Encyves/Graph/icons/portrait/portrait_115.jpg 1<br />
고종_초상(전신상) 초상화 고종_초상(전신상) https://dh.aks.ac.kr/Encyves/wiki/index.php/고종_초상(전신상) https://dh.aks.ac.kr/Encyves/Graph/icons/portrait/portrait_116.jpg 1<br />
#Links<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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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_유서 민영환 dcterms:creator<br />
민영환 민영환_집터 edm:isRelatedTo<br />
민영환 민영환_자결터 edm:isRelatedTo<br />
민영환 을사조약 edm:isRelatedTo<br />
민영환_자결터 조계사 edm:isRelatedTo<br />
민영환 민겸호 ekc:hasFather<br />
민겸호 명성황후 ekc:hasSister<br />
민겸호 임오군란 edm:isRelatedTo<br />
손수광-충정공_민영환의_자결순국 손수광-충정공_민영환의_자결순국_관련_기사 edm:isRelatedTo<br />
명성황후 조선_고종 ekc:hasHusband<br />
고종_어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_고종 ekc:depicts<br />
고종_어진(국립고궁박물관) 조선_고종 ekc:depicts<br />
고종_초상(전신상) 조선_고종 ekc:depicts<br />
을사조약 조선_고종 edm:isRelatedTo<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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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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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NetworkGraph Script]]</div>Admin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C039.lstC039.lst2024-03-14T06:08:20Z<p>Admin: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pre><br />
#Project<br />
h1 정창섭-정약용과 저술<br />
h3 한국 기록유산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자원 개발 - 민족기록화<br />
#Class<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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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o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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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립박물관 장소 인천광역시립박물관 https://museum.incheon.go.kr/index.do https://dh.aks.ac.kr/VR/style/outlink.png 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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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br />
=='''지식 관계망'''==<br />
{{ NetworkGraph | title=C039.lst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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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 />
<div>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br />
<br />
고려통일대전의 설립은 남북분단의 비원을 극복하기 위한 통일동산 조성계획의 일환<br />
으로 고려의 웅혼한 후삼국통일의지를 되살리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국가중심)<br />
<br />
2) 라말려초의 사성제도에 따라 각문중의 숭조목종의 미풍양속을 오늘에 되살려 이를<br />
진작 계승하는데 중점을 둔다. (문중중심)<br />
<br />
3) 그러므로 오직 고려왕건태조의 위대한 통일의지를 기본정신으로 계승할 뿐 고려태묘<br />
나 과거회귀식 관념에서 일체 탈피한다.<br />
<br />
제1장 총 칙<br />
<br />
제1조(목적) 본회 정관 제3조(목적)에 의거 고려역사 선양을 위한 고려통일대전의 관리 <br />
운영과 고려의 성왕, 충신, 공신, 절신, 현인등의 배향 및 봉안에 필요한 제도적 절차<br />
등을 정하고자 함에 있다.<br />
<br />
제2조(위치) 고려통일대전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30-102(탄현면 성동리 684번<br />
지) 일원으로 한다.<br />
<br />
제3조(시설) 대전의 규모 및 각 시설은 별지1과 같다.<br />
<br />
제4조(정각명칭) 각 정각의 명칭은 다음과 같이 한다.<br />
<br />
1. 대전(정전) : 고려대전으로 한다.<br />
<br />
2. 충신각 및 공신각 : 각각 제전각 및 영정각으로 한다.<br />
<br />
3. 수복방 : 전사청으로 한다.<br />
<br />
제2장 배 향<br />
<br />
제5조(배향자격) ① 고려대전에 봉안할 수 있는 배향위는 다음 각호의 인물로 한다.<br />
<br />
1. 고려시대 인물로 각 역사와 고증 문헌에 그 공훈과 업적이 혁혁히 기록 보전된 인물<br />
<br />
2. 비록 공식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족보•문지등 제반사항으로 보안 신빙성 <br />
<br />
있는 인물 <br />
<br />
② 제1항 각호의 인물을 각 문중에서 배향신청 절차에 따라 추앙된 인물을 심사하여 <br />
배향 인물로 선정한다.<br />
<br />
③ 배향 안치가 완료된 후 추가로 봉안하는 배향위는 공훈 환관 고하를 불문하고 사<br />
전 계획된 순서외 잔여 봉안처에 배향한다. 단, 특별한 사정이 있을시에는 본회 이사<br />
회의 의결로 봉안 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br />
<br />
제6조(배향위 봉안) ① 고려대전의 배향은 다음 각호와 같이 봉안한다.<br />
<br />
1. 왕건 태조외 고려 역대 왕 33위를 봉안한다. 단, 하단 좌우에 33대 왕 위패를 소목<br />
으로 나열 봉안한다.<br />
<br />
2. 문중의 배향위 배열은 고려대전내 좌우편의 제단에 배열 봉안하되 연대순-가나다<br />
(문중)순-세계순으로 하며 문중별 소목식으로 좌우순으로 봉안한다. 단, 연대순은 <br />
문중 배향위중 선조배향위를 기준으로 정한다.<br />
<br />
② 고려대전 대제 봉안문은 현대적 어법으로 대중이 알기 쉽게 작성한다.<br />
<br />
제7조(봉안 신청) ① 씨족 대표는 제5조에 적합한 선조에 대하여 배향위 및 전시물 게시<br />
신청을 할 수 있다.<br />
<br />
② 신청은 별첨 서식1, 2호에 의하며, 소정의 절차를 거쳐 본회의 승인을 얻은 후에 <br />
봉안할 수 있다.<br />
<br />
제8조(배향위 심사) ① 제7조의 신청이 있을 경우 각종 자료를 토대로 총재단의 심의를 <br />
거쳐 결정하되, 필요한 경우 심사기구를 구성하여 심의 결정한다.<br />
<br />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심사기구는 다음과 같이 구성하여 심사를 실시한다.<br />
<br />
1. 심사기구는 심사위원장 1명을 포함하여 5명 내외로 구성한다.<br />
<br />
2. 심사위원은 사학전공 교수 및 본회 위원으로 구성한다.<br />
<br />
3. 심사기구에서는 배향인물의 배향 적합성 여부를 결정한다.<br />
<br />
4. 심사기구는 심사 완료와 동시에 자동 해산한다.<br />
<br />
③ 제7조의 신청이 승인된 경우에 당해 씨족(문중) 종회에서는 다음 각호의 등록비를<br />
납부한 후 봉안할 수 있다.<br />
<br />
1. 배향위 등록 : 금 이천만원<br />
<br />
2. 전시물 게시 : 금 오백만원<br />
<br />
③ 제1항 및 제2항의 결정 결과에 대하여는 이사회 및 총회에 보고한다.<br />
<br />
제9조(배향위패) ① 위패의 재질 및 문안은 다음 각호와 같이 한다.<br />
<br />
<br />
1. 위패는 밤나무 원목판으로 하며 독(함)은 검은 옷칠과 내부는 붉은 색으로 한다.<br />
<br />
2. 규격은 제단 규격에 합당할 수 있는 규격으로 한다.<br />
<br />
3. 위패문은 아래의 순으로 하며 17자 이내로 기재한다.<br />
<br />
가. 최고 환관명<br />
<br />
나. 작위, 시호, 아호 중 택일<br />
<br />
다. 관향<br />
<br />
라. 성명<br />
<br />
마. 선생<br />
<br />
② 배향 적법절차에 의하여 봉안된 배향위패는 임의로 개독, 개조, 이동, 수리, 수정, <br />
철회 등을 할 수 없다. <br />
<br />
⓷ 제2항의 행위를 하고자 할시는 본회 이사회의 의결로 조치한다. 단, 해당 씨족의 <br />
총회 의사록에 의하여 심의할 수 있다.<br />
<br />
제3장 시설물 관리<br />
<br />
제10조(일반인 출입) ① 대전의 안전관리를 위하여 원칙적으로 평시에는 관계자외의 출입<br />
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의 경우에는 출입을 허용한다.<br />
<br />
1. 대제 및 행사를 하는 기간동안 일반인에 대한 대전 시설물의 출입<br />
<br />
2. 씨족의 대전 참관 신청이 있거나, 일반인의 출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사전 승인을 받은 경우<br />
<br />
② 총재는 개방 허용에 따른 시설물 안전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br />
<br />
제11조(출입의 제한) 총재는 대제 또는 행사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br />
에게는 출입을 제한하거나 퇴장을 명할 수 있다.<br />
<br />
1. 술에 취한 사람<br />
<br />
2. 개인의 영리성 행위를 하려는 사람<br />
<br />
3.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거나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사람<br />
<br />
4. 그밖에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람<br />
<br />
제12조(관리인) 총재는 상시 시설물 관리를 위하여 관리인을 둘 수 있다.<br />
<br />
<br />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대광내의령 정민공 [[서필]]선생 봉안문<br />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大匡內議令 貞敏公 徐弼先生 奉安文)<br />
<br />
오호(嗚呼) 선생(先生)이시여!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으로 신라(新羅)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의 아들이로다. 천성(天性)이 청렴(淸廉)하여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고 문장(文章)이 수려(秀麗)하였도다. 일찍이 명필(名筆)로서 등용(登用)되어 문서(文書)를 초(草)하는 미관(微官)으로 진출하여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도다. 광종이 금주기(金酒器)를 하사(下賜)하니 신(臣)이 금주기를 쓰면 임금은 장차(將次) 무엇을 쓰시나이까 하고 받지 아니하니, 경(卿)은 능(能)히 보물(寶物)로써 보물을 삼지 아니하니 짐(朕)은 마땅히 경(卿)의 말로써 보물을 삼으리라 하였도다. 또 선생(先生)은 공(功)을 가려 상(賞)을 줄 것과 투화(投化)한 한인(漢人)들에게 신료(臣僚)의 집과 딸들을 빼앗는 것을 극간(極諫)하여 중지(中止)케 하였도다. 정치(情致)에는 이황(理荒)이 있고 사업(事業)에는 선악(善惡)이 있음이라. 선정(善政)의 전형(典型)으로 제왕(帝王)의 이상(理想)이 이에 나타나 있으니, 선생(先生)의 헌책(獻策)은 오직 조강국체(朝綱國體)의 기초(基礎)를 다졌다고 말하리로다. 마침내 선생(先生)은 향년(享年) 六十五세에 졸(卒)하시니 정민(貞敏)이라 시호(諡號)하고 누증(累贈)하여 삼중대광내의령(三重大匡內議令)이 되었도다. 오호(嗚呼) 위대(偉大)하신 선생(先生)이시어! 성두(星斗)가 신(神)을 하강(下降)시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니, 죽음을 따라 그 령명(令名)은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도다. 조정(朝廷)은 선생(先生)의 덕(德)을 흠모(欽慕)하여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나, 사직(社稷)이 바뀜에 미쳐 영대(靈臺)가 해무리를 고(告)함에 이르렀도다. 태묘(太廟)의 사전(祀典)에 힘입지 않는다면 누가 마땅히 그 령명(令名)을 후세(後世)에 전(傳)하리요?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론(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저 익연(翼然)한 대전(大殿)을 통일동산(統一東山)에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의리(義理)를 같이하여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취지(趣旨)에 찬동(贊同)하여 이에 보조(補助)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쫓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드디어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禮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령(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평안(平安)하소서.<br />
<br />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태보내사령 장위공 [[서희]]선생 봉안문<br />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太保內史令 章威公 徐熙先生 奉安文)<br />
<br />
명호(鳴呼), 선생(先生)은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이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의 아들이로다. 성품(性稟)이 엄격(嚴格)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였도다. 일찍이 갑과(甲科)에 등제(登第)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초수(超綬)하고 누진(累進)하여 내의시랑(內議寺郞)이 되었도다. 광종(光宗) 때 사명(使命)을 받들어 송(宋)에 갔다가 용의(容儀) 법도(法度)에 맞으니 송태차(宋太且)가 가상(嘉尙)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除授)하였도다.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함에 선생(先生)이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봉산(蓬山)으로 출격(出擊)하였는데 소손녕(蕭遜寧)이 항복(降服)을 재촉(再促)함에 성종(成宗)은 서경(西京) 이북(以北)을 양도(讓渡)하려고 하였도다. 선생(先生)은 그것이 양계(良計)가 아님을 강력(强力)히 주장하고 적(敵)과 교섭(交涉)할 사신(使臣)을 자원(自願)하여 적진(敵陣)에 나아갔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고구려(高句麗) 땅이 자기네 땅임을 주장(主張)하고 우리와 접경(接境)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宋)과 수교(修交)하는 고로 오늘의 출병(出兵)이 이에 연유(緣由)함이라 하니, 선생(先生)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高句麗)의 구지(舊地)이므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칭(稱)하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였으니 만일 지계(地界)를 논(論)한다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은 다 우리 경내(境內)에 있거늘 어찌 침식(侵蝕)이라 하는가? 수교(修交)의 불통(不通)은 여진(女眞) 때문이라. 만일 그 사이에 도거(盜據)한 여진(女眞)을 쫓고 우리 구지(舊地)를 돌리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道路)를 통(通)하게 하면 감(敢)히 수빙(修騁)하지 않으리오 하였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그 강개(慷慨)한 사기(辭氣)에 감복(感服)하여 드디어 거란(契丹)이 이에 응(應)하여 물러났도다. 이후(以後) 여진(女眞)을 격퇴(擊退)하고 장흥(長興)·귀비(歸匕)·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맹주(孟州) 등지(等地)에 성을 쌓아 국토(國土)를 확장(擴張)하니, 성종(成宗)은 그 공업(功業)이 가상(嘉尙)하여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제수(除授)하였도다. 아아! 선생(先生)은 오직 담판(談判)으로 거란(契丹)의 대병(大兵)을 물리쳤으니, 실(實)로 국가(國家)의 존망(存亡)에 이만한 대공(大功)을 세우신 분이 선생(先生)을 빼놓고 또 누가 있으리오. 그 은혜(恩惠)는 바다와 같이 깊고, 그 유덕(遺德)은 태산(泰山)과 같이 높으시도다. 이에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좇아 감(敢)히 존영(尊靈)을 호국실(護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어 이에 강림(降任)하사 봉안(奉安)을 누리소서.<br />
<br />
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삼중대광 내사령 원숙공 [[서눌]]선생 봉안문<br />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三重大匡 內史令 元肅公 徐訥先生 奉安文)<br />
<br />
오호(嗚呼)! 선생(先生)은 이천인([[이천서씨]](利川人)으로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 장위공(章威公) 희(熙)의 아들이요 내의령(內議令) 정민공(貞敏公) 필(弼)의 손자(孫子)로다. 성종(成宗) 때 갑과(甲科)에 발탁(拔擢)되어 목(穆)·현(顯)·덕(德)·정(靖)·4조(朝)를 역임(歷任)하시니, 조강국례(朝綱國禮)에 보우(保佑)한 공(功)이 실(實)로 많았도다. 현종조(顯宗朝)에 누천(累遷)하여 국자제주지리부사(國子祭酒知吏部事)가 되었는데 왕(王)이 선생(先生)의 딸을 들이어 비(妃)를 삼았도다. 곧이어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판상서사부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史部事)에 오르시고, 덕종조(德宗朝)에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가(加)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승진(昇進)하였도다. 정종시(靖宗時)에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를 역임(歷任)하였더니 왕년(往年)에 거란(契丹)이 압록강(鴨綠江), 동편(東便)에 성보(城堡)를 가축(加築)하고, 이제 다시 화친(和親)코자 하였도다. 이에 선생(先生)은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표(表)를 부쳐 먼저 그 성보(城堡)를 파(罷)할 것을 청(請)하게 하였도다. 병(病)이 위독(危篤)하자 임금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내사령(內史令)을 가(加)하고, 그 자손(子孫)에게 영업전(營業田)을 하사(下賜)하였도다. 급졸(及卒)에 왕(王)이 애도(哀悼)하고 간경(簡敬)이라 증시(贈諡)하였다가 뒤에 정종조정(靖宗朝廷)에 배향(配享)하고 원숙(元肅)이라 개시(改諡)하였도다. 삼대(三代)가 나란히 재상(宰相)에 오르고 시호(諡號)와 묘식(廟食)이 또한 그와 같으니, 그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은 별빛처럼 빛나고, 그 영명(令名)과 훈업(勳業)은 천추(千秋)에 유전(遺傳)하는도다.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논(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수년(數年)만에 통일(統一)동산에 터를 잡아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을 장엄(莊嚴)하게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이에 찬조(贊助)하였도다. 위로는 우주(宇宙)의 원기(元氣)를 지탱(支撑)하고, 아래로는 산하(山河)의 정기(精氣)를 포섭(包攝)하였도다. 송악(松嶽)은 아련히 구름 위에 솟아있고, 한수(漢水)는 도도(滔滔)히 대(臺)를 안고 흐르도다. 전우(殿宇)가 사위(四圍)에 흘연(屹然)하니, 성충현공(聖忠顯功)의 거동(擧動)이 여재양양(如在洋洋)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좇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이제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醴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영(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향축(香祝)이 구천(九泉)에 응(應)하거던 이에 강림(降臨)하사 이에 명례(明禮)를 흠격(歆格)하소서.<br />
<br />
<br />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서씨]] 중 대종 종가이며, [[대구 서씨]],[[달성 서씨]],[[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장성 서씨,전주서씨,[[부여 서씨]] 등은 [[이천 서씨]]의 별파이다. [[서씨]](徐氏)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 이다.<br />
<br />
통일신라시대 아간대부를 지내시고 이천(利川)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br />
<br />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서필]],[[서희]], [[서눌]] [[서유걸]], [[서정(고려)|서정]] [[서존]], [[서균(고려)|서균]] [[서린(고려)|서린]], [[서원(고려)|서원]] [[서공(고려)|서공]] [[서성(고려)|서성]] [[서순(고려)|서순]],[[서숭조]],[[서능]], [[서신계]],[[서린(고려1)|서린]],[[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윤(고려)|서윤]],[[서신(고려)|서신]],[[서호(고려)|서호]] 등 명재상을 배출하여 고려 최고 문벌귀족 집안이 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 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 서성 후손이 3정승(서종태,서명균,서지수),3대제학(서유신,서영보,서기순)을 6대 연속 배출하여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徐閑)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 서씨]]에서 분파하여 [[서진(고려)|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달성 서씨]] 즉 고려 후기에 [[서진(고려)|서진]],[[서기준(고려)|서기준]],[[서영(고려)|서영]],[[서균형]] 등 명재상을 배출한 [[달성 서씨]] 집안이 진정한 [[달성 서씨]] 경상도 양반 가문이다. [[달성 서씨]] 시제는 한식일(4월5일)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30길 54-7.(지번)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329에서 거행된다. 21세기에 두 집안은 원래 한 뿌리여서 대구달성 [[서씨]]로 모임을 갖고 있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br />
<br />
서(徐)씨는 이천서씨를 비롯하여 달성(達城·대구 포함),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당성(唐城), 평당(平當), 복흥(福興), 의령(宜寧), 남양(南陽), 황산(黃山), 염주(鹽州), 군위(軍威) 등 20본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53본, 일제강점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176본으로 기록되어 있다.서씨는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고 있는 이천서씨가 종가라고 할 수 있다.<br />
<br />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 시조이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신통]](徐神通) 아들 [[서목]](徐穆)(이천백.문하시중)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br />
<br />
이섭대천(利涉大川)<br />
<br />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 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br />
<br />
<br />
이처럼 [[이천 서씨]]는 고려 황제국 건국에 협력해 내의령 [[서필]](徐弼 종1품) 평장사 [[서봉]](徐逢 정2품), 내사령 [[서희]](徐熙 종1품), 문하시중 [[서눌]](徐訥 종1품) 좌복야 [[서유걸]](徐惟傑 정2품) 장야서령 [[서유위]](徐惟偉) 달성군 [[서주행]](徐周行),[[원목왕후]],형부상서 [[서준방]](徐俊邦) 연성군 [[서준영]](徐俊英 정3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서수(고려)|서수]] (徐琇 종1품) 판삼사사 [[서정(고려)|서정]](徐靖 종1품) 병부상서 태원군(太源君) [[서존]](徐存 정3품) 군기소윤 [[서한(고려)|서한]](徐閈),좌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정2품)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종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 좌복야 [[서진부]](徐振扶 정2품),평장사 [[서원(고려)|서원]](徐元 정2품) 판삼사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종1품) 동지추밀사 [[서순(고려)|서순]](徐淳(諄) 종2품) 평장사 [[서성(고려)|서성]](徐成 정2품) 사복부령 [[서염(고려)|서염]](徐廉 종2품) 7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고려 최고의 명문 귀족가문이 됐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br />
1.[[단군조선]](檀君朝鮮) [[여수기]](餘守己=余守己) 후손설<br />
<br />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 후손설<br />
<br />
([[부여]](扶餘=餘=徐) (토템은 녹(鹿.사슴).성수(聖數) 9)이 같다.<br />
<br />
<br />
[[단군조선]](檀君朝鮮)에는 [[여수기]](餘守己=余守己=예맥족(濊貊族)장 "濊王之印"),<br />
<br />
서우여(徐于餘) = ([[번한조선]](奇子朝鮮=番韓朝鮮).번한서인(番韓徐印<br />
<br />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br />
<br />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왕족(賢人) 기자(箕子=胥餘)와 다르다)<br />
<br />
서구왕(駒王=徐駒王)<br />
<br />
[[서언왕]](徐偃王 =(동이족(東夷族) 후손(한국사람).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시조. 중화서씨(中華徐氏) 시조-서복 徐福(徐市)이 후손)<br />
<br />
<br />
[[부여]](扶餘)에는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br />
<br />
서울([[여울]])(餘蔚=徐蔚),서암([[여암]])(徐巖=餘巖) 서숭([[여숭]](餘崇=徐崇),<br />
<br />
서울([[여울]])(餘鬱=徐鬱),서초([[여초]])(徐超=餘超) 서치([[여치]](徐熾=餘熾)<br />
<br />
<br />
[[고구려]](高句麗)에 여씨(餘氏=徐氏)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9대 고국천왕 10대 산상왕<br />
<br />
<br />
[[백제]](百濟)는 (부여(扶餘=餘=徐) 1대 [[온조왕]]-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br />
<br />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br />
<br />
(1대 [[온조왕]](徐溫祚)부터-31대 [[의자왕]](徐義慈까지.여씨(서씨)(餘氏=徐氏)이고<br />
<br />
아들 서융(여융=[[부여융]])(扶餘隆=餘隆=徐隆)<br />
<br />
여계백(서계백=부여[[계백]] 扶餘階伯 餘階伯=徐階伯)<br />
<br />
서풍(여풍=[[부여풍]])(徐豊=餘豊=扶餘豊)서태(여태=[[부여태]])(徐泰=餘泰=扶餘泰)<br />
<br />
서문사(여문사=[[부여문사]])(徐文思=餘文思=扶餘文思)<br />
<br />
서효(여효=[[부여효]])(徐孝=餘孝=扶餘孝)<br />
<br />
서태비(여태비=[[부여태비]])(徐太妃=餘太妃=扶餘太妃)<br />
<br />
서연(여연=[[부여연]])(徐演=餘演=扶餘連)<br />
<br />
서용(여용=[[부여용]])(徐勇=餘勇=扶餘勇)<br />
<br />
서충승(여충승=[[부여충승]])(徐忠勝=餘忠勝=扶餘忠勝)<br />
<br />
[[흑치상지]](부여상지=여상지=서상지)(黑齒常之=徐常之=扶餘常之)<br />
<br />
서덕장(여덕장=[[부여덕장]])(徐德璋=餘德璋=扶餘德璋)<br />
<br />
서경(여경=[[부여경]])(徐慶=餘慶=扶餘慶)<br />
<br />
[[도모왕]](서도모)(徐都慕王=都慕王) [[덕좌왕]](서덕좌)(德佐王=徐德佐王)<br />
<br />
백제조신(百濟朝臣) 관야조신(菅野朝臣) 불파련(不破連)<br />
<br />
서선광(부여선광=[[여선광]]) (扶餘禪廣=餘禪廣=徐禪廣 일본(日本) 백제왕씨(百濟王氏)시조)<br />
<br />
서순타([[여순타]])(徐淳陀=餘淳陀)<br />
<br />
(무령왕 태자; [[일본]](日本) 대화사(大和史) 시조-[[일본]](日本)왕실(王室) 외가(外家)=<br />
<br />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br />
<br />
서조신([[여조신]]=화조신)(徐朝臣=和朝臣) 百濟朝臣 百濟公 都慕王 百濟王 百濟技<br />
<br />
서자진([[여자진]])(徐自進=餘自進 - 일본 후손: 다카노미야코(高野造)시조)<br />
<br />
서복신(여복신=[[부여복신]])(徐福信=餘福信=扶餘福信)<br />
<br />
<br />
신라(新羅)때 [[서두라]](徐豆羅=(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가<br />
<br />
신라 개국 공신 아성(예 이천(利川 지명) 대장군(차관)이 되고,<br />
<br />
[[서간]](徐趕) 공이 통일신라 선덕여왕 때 태사(정 1품.국무총리) 가 되었다.<br />
<br />
[[서선행]](徐善行) 공이 통일신라 판관(判官 부총리),<br />
<br />
[[서준평]](徐準平) 공이 통일신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장관)를 지내셨으나<br />
<br />
서씨(徐氏)를 중건한 통일신라 아간대부(정2품 부총리) [[서신일]](徐神逸) 선생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br />
<br />
<br />
서씨(徐氏) 계보<br />
<br />
<br />
1세 이천서씨(利川徐氏) 시조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br />
<br />
<br />
2세 [[서목]](徐穆) (후삼국 이천 호족(利川 豪族).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국무총리)<br />
<br />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종 1품. 국무총리)<br />
<br />
<br />
3세 서염(徐廉)<br />
<br />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서영(徐英)<br />
<br />
[[서봉]](徐逢) (광평시랑 평장사(廣評侍郞 平章事) .정 2품.부총리)<br />
<br />
[[서후]](徐厚) (대장군(大將軍) .종 3품. 차관.남양군)<br />
<br />
<br />
4세 [[서눌]](徐訥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br />
[[서유위]](徐維偉 장야서령(掌冶署令). 정 3품. 장관)<br />
<br />
[[서주행]](徐周行 달성군(達城君). 장관)<br />
<br />
[[서숭]](徐崧) (사재승(司宰丞).강조의 변.차관)<br />
<br />
[[서긍]](徐肯) (중낭장 (中郞將)<br />
<br />
<br />
5세 [[서수(고려)|서수]](徐琇 문하시중(門下侍中) 봉 희양대군.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원목왕후]] 서씨 (徐氏) 현종의 비)<br />
<br />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판삼사사(判三司事).종 1품.국무총리)<br />
<br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연산서씨,부여서씨(扶餘),장성서씨,남양(南陽)서씨(당성唐城)서씨 중조)<br />
<br />
[[서면(고려)|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br />
<br />
[[서석]](徐碩)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br />
<br />
부총리 - 최충 12학도)<br />
<br />
[[서웅]](徐雄) (위위경지 태사국사(衛尉卿知太使局事).정3품.장관)<br />
<br />
서정(徐程) (성운위관 소감(少監). 종 4품)<br />
<br />
[[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軍器少尹).종 4품.판도판서(判圖判書). 정3품.장관. 대구달성(大丘)서씨파 중조)<br />
<br />
[[서대창]](徐大昌) (충신)<br />
<br />
[[서필중]](徐必重) (충신)<br />
<br />
<br />
6세 [[서장기]](徐長己 병부시랑(兵部侍郞).종 3품.차관)<br />
<br />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br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br />
<br />
[[서린(고려)|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br />
<br />
[[서단(고려)|서단]](徐亶) (함문통사 사인.종 5품.국장)<br />
<br />
[[서경의]](徐聲宜) (교위주부(衛尉注薄) .차관보)<br />
<br />
[[서화흡]](徐化洽)(장작소감 (將作少監). 정 3품.장관)<br />
<br />
[[서조]](徐助) (요나라 축하사절). 장관)<br />
<br />
[[서추]](徐諏) (예빈 소경((禮賓少卿). 차관)<br />
<br />
[[서선(고려)|서선]](徐禪) (박사(博士). 차관)<br />
<br />
[[서방(고려)|서방]](徐昉) (진봉사(進奉使). 장관)<br />
<br />
서염(徐琰) (어사대(御史臺) 어사중승(御史中丞). 정 3품.장관)<br />
<br />
[[서안정]](徐安貞) 문림랑수궁서령겸직사관<br />
<br />
(文林郞守宮署令兼直史館). 장관-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 참여)<br />
<br />
[[서준방]](徐俊邦)(형부상서(刑部尙書).정 3품.장관-평당(平當)서씨파 중조)<br />
<br />
[[서신(고려)|서신]](徐愼)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부판사(吏部 判事)<br />
<br />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br />
7세 [[서진부]](徐振扶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br />
<br />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br />
<br />
[[서영관(고려)|서영관]](穎觀)은 현화사(玄化寺) □자대사(□紫大師)<br />
<br />
[[서공(고려)|서공]](徐恭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평장사(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서순(고려)|서순]](徐淳(徐諄) □□□동정(同正).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 종 2품. 부총리)<br />
<br />
[[서성(고려)|서성]](徐成 내시 수서랑동정(內侍 授書郞同正).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2품.부총리)<br />
<br />
[[서염(고려)|서염]](徐廉 춘방공자(春坊公子). 사복부령(司僕部令). 종2품.부총리)<br />
<br />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br />
<br />
[[서찬(고려6)|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br />
서보(徐甫)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정 2품.부총리)<br />
<br />
[[서약진]](徐若珍 봉성군(鳳城君).장관)<br />
<br />
[[서무질]](徐無疾) 밀직사(密直司使. 종 2품. 부총리)<br />
<br />
<br />
8세 [[서희적]](徐希積. 내의시랑(內議侍郞).종 3품. 차관)<br />
<br />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敎授).승지(承旨).정3품.장관.대학자)<br />
<br />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br />
[[서저]](徐氐 병부낭중(兵部郎中). 종 3품. 차관)<br />
<br />
[[서평(고려)|서평]](徐坪 판도좌랑(版圖佐郎).차관)<br />
<br />
[[서광(고려)|서광]](徐珖 예빈소경(禮賓少卿).차관)<br />
<br />
서연(徐延)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종 3품.차관)<br />
<br />
[[서희량]](徐希亮((병부상서(兵部尙書).정 3품.장관)<br />
<br />
[[서숭조]](徐崇祖) (중추원사(中樞院事).종 2품.부총리)<br />
<br />
[[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版圖判書).정 3품.장관.대구달성서씨파)<br />
<br />
<br />
9세 [[서영보(고려)|서영보]](徐永甫.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br />
<br />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부제학(副提學).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br />
[[서의]](徐義 감찰어사(監察御使).정 3품.장관)<br />
<br />
수호당 서씨(壽壺堂徐氏). 서인(徐諲 교수(敎授).승지(承旨)의 자녀.<br />
<br />
수호당서씨공양아미타9존도계(壽壺堂徐氏供養阿彌陀九尊圖系)<br />
<br />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br />
<br />
서언(徐彦) (혁명가(革命家))<br />
<br />
서준명(徐俊明) 좌영낭장(左營郞將)<br />
<br />
서유정(徐惟挺) 교위(校尉)<br />
<br />
서흥조(徐興祖)<br />
<br />
[[서녕]](徐領) (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br />
<br />
[[서돈경]](徐敦敬) (상장군(上將軍).정 3품. 장관.무신시대 재상)<br />
<br />
[[서유]](徐裕) (상장군(上將軍).정 3품.장관.무신시대 재상)<br />
<br />
[[서균한]](徐均漢) (상장군(上將軍).정 3품.장관.무신시대 재상)<br />
<br />
서찬(徐贊) (낭장(郞將)<br />
<br />
[[서선]] (徐瑄) (중정대부(中正大夫).종 3품.차관)<br />
<br />
서혼(徐琿) (만호(萬戶).종 4품.차관보)<br />
<br />
서자민(徐子敏)<br />
<br />
서칭(徐偁) (장군(將軍)<br />
<br />
서정(徐挺) (장군 將軍)<br />
<br />
[[서필중]](徐必中)(호장 戶長)<br />
<br />
서무(徐茂 문림랑위위시주부동정(文林郞衛尉寺主簿同正)<br />
<br />
서광순(徐光純) (장군將軍)<br />
<br />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정 3품. 장관)<br />
<br />
[[서문한]] (徐文漢) (시중랑 侍中郞)<br />
<br />
[[서전금]](徐田金( (호장戶長)<br />
<br />
[[서순인]](徐純仁) (호장 戶長)<br />
<br />
[[서효관]](徐孝寬) (항적(降賊)<br />
<br />
서정(徐靖 낭장(郞將)<br />
<br />
서지(徐趾)<br />
<br />
서황(徐晃) (소감(少監 ).정 3품.장관)<br />
<br />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정 2품.부총리)<br />
<br />
<br />
10세 [[서선]](徐瑄 .중정대부(中正大夫). 종 3품. 차관)<br />
<br />
[[서춘(고려)|서춘]](徐椿, 정순대부(正順大夫). 판내부사사(判內府事).정 3품.장관<br />
<br />
-부여(扶餘)서씨파 대종)<br />
<br />
[[서능]](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서박]](徐樸 부여(扶餘)서씨 봉례공파)<br />
<br />
[[서적(고려)|서적]](徐迪) (판도판서(版圖判書).정 3품.장관급- 남양(南陽)서씨파)<br />
<br />
[[서직]](徐稷 연산(連山)서씨파)<br />
<br />
[[서온(고려)|서온]](徐溫.합문사(閤門使).승지(承旨).정 3품.장관.송나라 아악 전수)<br />
<br />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br />
<br />
서복(徐福) (호장戶長)<br />
<br />
[[서자번]](徐自蕃) (호장戶長)<br />
<br />
[[서중린]](徐仲麟) 통직랑지서주사(通直郞知瑞州事).장관)<br />
<br />
[[서영(고려)|서영]](徐穎)(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br />
<br />
서[[요세]](徐了世) (천락사 대사-원묘국사(圓妙國師)<br />
<br />
<br />
11세 [[서문찬]](徐文贊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br />
<br />
[[서희찬(고려)|서희찬]](徐希贊 이부시랑(吏部侍郞) 평장사(平章事). 정 2품. 부총리)<br />
<br />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br />
<br />
[[서진(고려2)|서진]](徐晉 사재감정(司宰監正).정3품. 장관)<br />
<br />
[[서염(고려)|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br />
<br />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br />
<br />
서희(徐曦) (대장군(大將軍).종3품.차관)<br />
<br />
[[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연산(連山)서씨파 시조)<br />
<br />
[[서념]](徐恬)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br />
<br />
정 2품.부총리. 문한공파)<br />
<br />
[[서구방]](徐九方) (수월관음도-일본 교토대 보관중. 고려 최고 화가)<br />
<br />
[[서지만]] (徐智滿) (내시(內侍). 관경16관변상도)<br />
<br />
[[서오]](徐敖) (낭장(郎將)<br />
<br />
[[서윤공]](徐允公) (별가(別駕))<br />
<br />
[[서의(고려)|서의]] (徐議) (호조전서(戶曹典書).정 3품.장관)<br />
<br />
서의(徐誼)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차관)<br />
<br />
[[서간(고려)|서간]](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 .차관)<br />
<br />
[[서복례]](徐復禮) (생원(生員)<br />
<br />
[[서시의]](徐時義)(비서성소감(秘書省少監).정 3품.장관)<br />
<br />
[[서성윤]](徐成允)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종 2품.부총리)<br />
<br />
[[서인한]] (徐仁漢)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부총리)<br />
<br />
[[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br />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종 2품.부총리)<br />
<br />
<br />
12세 [[서원계]](徐元桂 군수(君守))<br />
<br />
[[서중계]](徐仲桂 검교사인(檢校舍人)<br />
<br />
[[서신계]](徐臣桂) (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종 2품.부총리)<br />
<br />
서[[야사불화]](徐埜思不花.서호(徐昊)) (어향사(御香使)<br />
<br />
[[서응려]](徐應呂)(상호군(上護軍).정 3품.장관급- 몽고 지배 시대)<br />
<br />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br />
[[서진(고려1)|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br />
<br />
[[서충(고려)|서충]](徐忠 판밀직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br />
<br />
[[서윤(고려)|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br />
<br />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 종 2품.부총리 (육군참모총장)<br />
<br />
[[서원경(고려)|서원경]](徐元敬) (문하시중(門下侍中).종 1품.국무총리)<br />
<br />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몽고 지배 시대. 재상)<br />
<br />
[[서천부]](徐天富) (회덕현(懷德縣) 감무(監務) )<br />
<br />
서양수(徐良守 내수(內竪) )<br />
<br />
서천길(徐天吉)<br />
<br />
[[서공기]](徐公騏)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차관)<br />
<br />
서규(徐規) (이성림 당인.혁명가(革命家))<br />
<br />
[[서능준]]徐能(陵)俊) (전공총랑(典工摠郞). 정 4품.차관보)<br />
<br />
[[서중보]](徐仲輔) (봉정대부(奉正大夫).정 4품.차관보)<br />
<br />
고려의 충신. 두문동 72현(서견,서중보,서보,서광준)<br />
<br />
[[서보]](徐輔) (공조전서(工曹典書).정 3품.장관.전서공파)<br />
<br />
[[서신]](徐信) (목사.종 3품.차관.<br />
<br />
문하시중(門下侍中).종 1품.국무총리.목사공파)<br />
<br />
[[서언]](徐彦) (기거사인(起居舍人). 종 5품.국장)<br />
<br />
[[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判內侍府事).정 3품.장관)<br />
<br />
서현(徐顯) (요동진무사(遼東鎭撫使) .장관)<br />
<br />
[[서윤현(고려)|서윤현]](徐允顯)(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부총리.법명은 覺喜)<br />
<br />
서숙(徐淑) (우승지(右承旨).정 3품. 장관)<br />
<br />
서린(徐吝)<br />
<br />
서관(徐寬) (사마(司馬)<br />
<br />
서금광(徐金光) (장군(將軍)<br />
<br />
서혼(徐混 우승지(右承旨).정 3품.장관)<br />
<br />
[[서의(고려)|서의]](徐義)(호조전서(戶曹典書).정 3품.장관)<br />
<br />
[[서영계]](徐永桂) (밀직사사(密直司使). 종 2품.부총리)<br />
<br />
<br />
13세 [[서의(고려5)|서의]](徐誼 성균제주(成均祭酒).정 3품.장관)<br />
<br />
[[서간(고려)|서간]] (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 종 3품. 차관)<br />
<br />
[[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br />
<br />
[[서원(고려1)|서원]](徐遠 밀직사(密直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br />
<br />
[[서유(고려1)|서유]](徐逾 비인현사(庇仁縣事) .청백리.비인공파 .시장)<br />
<br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정 3품. 장관. 고려충신)<br />
<br />
[[서광준]](徐光俊 사재감정(司宰監正).정 3품.충신)<br />
<br />
<br />
14세 [[서후장]](徐後長 군수(君守)<br />
<br />
[[서후상]](徐後祥 추밀원사(樞密院事 종 2품). 이부시랑 평장사(吏部侍郞 平章事). 정 2품. 부총리)<br />
<br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br />
<br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br />
<br />
15세 [[서호(고려)|서호]](徐浩 정치도감(整治都監) 좌랑(佐郎) 차관. 공신.충신)<br />
<br />
[[서맹원]](徐孟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br />
<br />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br />
<br />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 이조참판. 정 3품. 전남도지사.차관<br />
<br />
[[서견]](徐甄)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br />
[[서천량]](徐天亮) (밀직사사(密直司使). 종 2품.부총리)<br />
<br />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br />
<br />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 효행으로 유명)<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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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천 서씨]]는 15대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여 최고 명문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이 된다<br />
<br />
<br />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서씨(徐氏)는 국무총리급(종1품): 10명, 부총리급(정2품,종2품): 23명,장관급(정3품): 28명 ,차관급(종3품): 12명,차관보(정4품): 5명, 고려장군(상장군,대장군포함.정3품.종3품): 19명,고려명신: 60명, 고려공신: 24명,고려충신: 25명, 고려처사:14명, 고려국사: 1명, 고려대사: 2명,고려 호장: 5명, 고려 음악가: 1명, 고려 화가: 1명, 고려 대학자: 5명이다.<br />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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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조선 태조 때 개국원종공신 사재감 서인비(徐仁庇 정3품),개국원종공신 사재령 서원기(徐元奇 정3품), 태종 때 익대좌명공신 예조판서 [[서유(고려3)|서유]](徐愈 정2품), 사재감정 [[서진(고려2)|서진]](徐晉 3품), 남원부사 [[서호(조선)|서호]](徐顥(灝 정3품), 세종 때 우군도총체(右軍都摠制) [[서선(조선)|서선]](徐選 종1품),목사 [[서경흥]](徐敬興 정3품),사헌부 장령 서근(徐赾), 단종 때 암행어사 서호(徐皞), 사롱사 형제 (단종 충절) 종묘서령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 무공랑별제 [[서효주]](徐孝宙) 예빈사정 [[서효환]](徐孝寰) 전생서판관 [[서효당]](徐孝堂),우승지 [[서혼(조선1)|서혼]](徐混 정3품),세조 때 예문관 직제학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 《손자주해(孫子註解)》를 편찬한 [[서강(조선)|서강]](徐崗 정2품), 예종 때 익대공신 서경생(徐敬生), 중종 때 반정(反正)에 참여 이조판서에 오른 [[서지(조선1)|서지]](徐祉 정2품),충순위병절교위 [[서우(조선1)|서우]](徐祐),장령 [[서산보]](徐山甫),참봉 서학종(徐鶴踵),참봉 [[서연(조선)|서연]](徐演), 성균관 전적 서희려(徐希呂), 선조 때의 학자 [[서기]](徐起),임진왜란 때 좌부장으로 함흥ㆍ홍원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서경충(徐敬忠),[[서득천]](徐得天)과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私財(사재)를 털어 武器(무기)와 식량을 구입하여 義兵(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고,호조참의 선무원종일등공신 [[서사적]](徐思迪),의병장 서대근(徐大謹),서홍도(徐弘渡),서진걸(徐晋傑),서승춘(徐承春),서적(徐迪),서의(徐誼),서희복(徐希福),서희우(徐希祐),서희례(徐希禮),서영우(徐永佑),서사도(徐思道),서정원(徐廷原),서영상(徐永祥),서약(徐鑰),서응후(徐應厚),서덕숭(徐德崇),서천동(徐千童),서계철(徐繼哲),서인손(徐仁孫),서연후(徐延厚), 수군첨절제사 서덕룡(徐德龍),병조좌랑(兵曹佐郞) 서경춘(徐景春),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받은 서춘무(徐春武),서응두(徐應斗)는 의병장으로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나갔는데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뒤에 호조참판에 추증,조헌(趙憲)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戰鬪)에서 칠백의사((七魄義士)와 함께 순절(殉節)한 서응시(徐應時)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서정후(徐廷厚)와 서진문(徐振文)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선무원종 1등 공신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행차하였던 서경붕(徐慶鵬), 정묘호란 때 의병장 서일남(徐馹男), 병자호란 때 의병장 [[서국장]](徐國章),서흔남(徐欣男),서언길(徐彦吉),이조좌랑 [[서국정]](徐國楨),성균관 전적 [[서국빈]](徐國濱), 공조참판 [[서국평]](徐國平 종2품), 절제사 [[서국보]](徐國寶 종2품), 제주판관 서련(徐憐),조선 학자 [[서경덕]](徐敬德),서봉령(徐鳳翎),서달증(徐達曾),서의중(徐義中),서경창(徐慶昌),서영환(徐永煥),서한주(徐漢柱),서일원(徐一元),서걸(徐傑),서종하(徐宗夏),서자통(徐自通),서응문(徐應文),서억만(徐億萬),서문숙(徐文淑),서원지(徐元之),서태원(徐兌元),서복기(徐復基),서몽희(徐夢曦),서상덕(徐尙德),서상남(徐尙男),서우량(徐友諒),서응회(徐應會),서자적(徐自適),서태수(徐台壽),서한남(徐漢男),서천일(徐千鎰),서할(徐劼),서승우(徐承佑),서만조(徐萬組),서효원(徐孝源),서문숙(徐文淑),서석린(徐錫麟),서우흠(徐于欽),서상렬(徐相烈),서강수(徐江水), 위항시인 서병옥(徐秉玉),서병수(徐秉수),서의석(徐義錫), 조선 화가 서문보(徐文寶), 조선음악가 서창서(徐昌瑞), 조선 효자 서즐(徐騭),서채량(徐采亮),서병홍(徐柄泓),서준여(徐俊汝),서태금(徐太金),서영측(徐永側),서영팔(徐永八),서봉주(徐鳳周),서덕길(徐德吉),서만(徐萬),서재대(徐再大),서언유(徐彦儒),서윤옥(徐崙玉),조선 혁명가 서림(徐林) 서윤련(徐閏連) 서양갑(徐羊甲),병조참판 서숭로(徐崇老 종2품),공조참의 서봉록(徐奉祿 정3품),부총관 서보우(徐補禹 종2품),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서홍련(徐鴻連),도호부사 서확(徐臒 정3품),도호부사 서일명(徐一明 정3품),군자감정 서의건(徐義健 정3품),군자감정 서효행(徐孝行 정3품),장례원 판결사 서사근(徐思近 정3품),공조참의 서지관(徐志寬 정3품),종성부사 서호(徐琥 정3품),동래부사 서경천(徐慶千 정3품),참군 서의민(徐義敏),부사 서택선(徐宅善 정3품) ,서윤박(徐潤璞), 수군절도사 서위(徐偉 정3품), 수군절도사 서상설(徐尙卨 정3품),수군절도사 서간세(徐幹世 정3품),상장군 서백수(徐百壽 정3품),서천수(徐千壽 정3품),호조정랑 서만수(徐萬壽),사직 서억수(徐億壽),판윤 서병덕(徐秉德 정2품),의주목사 서익(徐益 정3품),병조판서 서필원(徐必遠 정2품),수군절제사 서수천(徐壽千 정3품),공조참판 서무덕(종2품),목사 서경조(정3품),의금부도사 서정훈(정3품),돈령부도정 서운휘(정3품), 의금부도사 서후경(徐後慶 정3품),관찰사 서병순(徐秉淳 종2품),병마절도사 서우신(徐佑申 정3품),우승지 서숙(徐淑 종3품),도승지 서충수(徐忠守 정3품),사헌부 감찰 서영조(徐榮祖),형조참판 서영효(徐榮孝 종2품), 형조참판 서충우(徐忠佑 종2품), 호조참의 서정연(徐挺然),절제사 서몽량(徐夢良 정3품),좌승지 서온기(徐溫基 종3품),오위장 서종렬(徐鍾烈 종2품),상장군 서윤문(徐允文 정3품),의정부 좌찬성 서상국(徐相國 종1품), 관찰사 서인원(徐仁元 종2품),이조참판 서봉관(徐鳳寬 종2품),한성 부윤 서일손(徐逸孫 종2품),사인 서숙원(徐叔源),목사 서윤무(徐允武 정3품),의주부윤 서우신(徐佑申 종3품),도설리 서후갑(徐後甲), 병마절도사 서유화(徐有和 정3품),군수 서희언(徐希彦),중정대부 서훤(徐暄 종3품),성균제주 서의(徐誼),이조참판 서효지(徐孝止 종2품),병조참의 서극철(徐克哲 정3품),장령 서유찬(徐有賛),관찰사 서정규 (徐廷圭 종2품),장령 서순지(徐順止), 중추부사 서필리(徐必履 정3품), 부사 서후원(徐厚遠 정3품), 의금부도사 서경개(徐景介),오위장 서우량(徐禹良 종2품),부호군 서말룡(徐末龍),부총관 서종언(徐從彦 종2품), 승지 서사립(徐斯立 정3품),현감 서옥(徐沃),현감 서주(徐註),부호군 서광순(徐光淳),좌승지 서굉(徐肱 정3품), 중추부사 서일(徐鎰 정3품),사과 서전일(徐甸一),사복시정 서재대(徐載垈),중추부사 서몽린(徐夢麟 정3품),군자감정 서문걸(徐文傑 정3품),지평 서성(徐晟),목사 서홍철(徐弘喆 정3품), 선전관 서병헌(徐炳憲), 오위장 서중적(徐重積 종2품), 부호군 서행원(徐行遠), 절충장군 서복현(徐馥賢),부사 서덕원(徐德遠 정3품),부사 서사웅(徐士雄 정3품), 중추부사 서혼(徐混 정3품), 중추부사 서흥인(徐興仁 정3품), 이조참판 서용호(徐龍鎬 종2품),부호군 서범순(徐範淳),판윤 서숙명(徐叔明 정2품),오위장 서억무(徐億茂 종2품), 부호군 서언충(徐彦忠), 부사 서우경(徐禹卿 정3품),군수 서희신(徐希信),돈녕 서경돈(徐敬惇),함평군 서민국(徐敏國), 중추원의관 서주기(徐周基),중추부사 서홍도(徐弘道 정3품),판관 서희림(徐希霖),선릉참봉 서희종(徐希宗),중추부사 서홍필(徐弘必 정3품),찰방 서희노(徐希怒),중추부사 서춘기(徐春杞 정3품),이조참의 서필지(徐泌之 정3품),통덕랑 서언세(徐彦世),통정대부 서경래(徐慶來 정3품),통정대부 서신행(徐愼行 정3품),병조참의 서연복(徐連福 정3품),전략장군 서증(徐竲),부사과 서희설(徐希說),현감 서달(徐達),군수 서조(徐遭),현감 서홍순(徐弘淳),부사 서초(徐超 정3품),군자감정 서간(徐趕 정3품),지평 서규(徐赳),세마 서자도(徐自道),감찰 서자소(徐自逍),감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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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3품),상호군 서호(徐浩 정3품),오위장 서상백(徐相百 종2품),오위장 서봉좌(徐鳳佐 종2품),오위장 서재환(徐才煥),오위장 서계환(徐桂煥),오위장 서관택(徐寬澤),오위장 서인국(徐仁國),돈녕부도정 서상복(徐相福),상서원첨정 서유보(徐有輔),사복시정 서필관(徐必慣),돈녕부판관 서룡문(徐龍汶),중추부사 서봉서(徐鳳瑞),부호군 서범순(徐範淳),부호군 서광순(徐光淳),공조참판 서명호(徐命浩),중추부사 서경원(徐景元),중추부사 서덕원(徐德遠),중추부사 서필부(徐必復),중추부사 서상주(徐相周),중추부사 서창화(徐昌和),군수 서준지(徐俊之),원종공신 서창국(徐昌國),한성좌윤 서혁(徐赫),한성좌윤 서태수(徐泰守),호조참판 서의린(徐義麟),공조참의 서태록(徐泰祿),수군절제사 서뢰(徐瀨),제학 서룡언(徐龍彦),장령 서효우(徐孝虞),부교리 서유련(徐有鍊),이조좌랑 서성(徐省),원정 서극일(徐克一),승의랑 서국재(徐國材),의병장 서한중(徐漢重),부호군 서규현(徐圭賢),시강원좌빈객 서희신(徐希信),중추부사 서응하(徐應河),영장 서홍원(徐弘遠),오위장 서재식(徐在植),중추원의관 서홍진(徐鴻鎭),도정 서규연(徐奎衍),오위장 서상황(徐相黃),첨정 서세복(徐世福),중추부사 서춘성(徐春成),중추부사 서희유(徐希裕),중추부사 서지도(徐志度),공조참의 서경남(徐景男),공조판서 서후(徐逅),공조정랑 서의익(徐義益),판관 서간(徐諫),군자감정 서일동(徐一童),목사 서린(徐璘),중추부사 서영립(徐英立),내금위 서증(徐竲),좌승지 서효창(徐孝昌),군수 서자준(徐自遵),군수 서홍성(徐弘成),참봉 서덕눌(徐德訥),목사 서덕겸(徐德謙),판결사 서득부(徐得富),참찬관 서경엽(徐慶燁),진무원종공신 서신덕(徐信德),이조좌랑 서묵(徐黙),사재감정 서명원(徐命源),중추부사 서혼(徐混),장악원정 서급(徐汲),현감 서상(徐祥),현감 서달(徐達),현감 서현일(徐顯一),군자감위정 서혼(徐渾),종묘서령 서적(徐勣),훈련원참원 서탁(徐擢),순무사 서병상(徐秉常),중추부사 서진(徐津),중추부사 서성익(徐聖翼),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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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2품),사헌부지평 서호순(徐好淳),통례문통찬 서순원(徐順元),전력교위 서연지(徐連枝),군자감정 서경인(徐景仁 정3품),지평 서사인(徐士仁),판관 서순인(徐順仁),가맹건공장군 서봉손(徐奉孫),호군 서대창(徐大昌),안안공 서순동(徐順東),예빈시정 서옥(徐沃 종3품),판관 서희림(徐希林),사직 서미수(徐眉壽),모의당공 서석손(徐碩孫),연순교위 서세호(徐世豪),사용공 서희안(徐希顔),군수 서택환(徐宅煥),훈련랑도사 서국주(徐國柱),장락원첨정 서경린(徐敬麟),의금부도사 서행근(徐行根 정3품),비서원승 서인식(徐寅植),참봉 서담(徐淡),훈련주부 서인정(徐仁禎),진사 서윤화(徐允和),현감 서맹원(徐孟原),사간원직장 서우(徐遇),상장군 서윤문(徐允文 정3품),수문장 서광희(徐光希),부사정 서숙원(徐叔原),판관 서윤지(徐允志),병마우후 서창(徐昌),이조참판 서조(徐調 종2품),이천군 응교 서치감(徐致瑊),통례문통찬 서순강(徐順剛),공조참의 서성리(徐性履 정3품),직제학 서빈(徐玭),홍문관별좌 서흡(徐潝),무과합격 서봉기(徐鳳冀),서상룡(徐相龍),서병태(徐炳泰),서상태(徐相泰),서인길(徐仁吉),서명신(徐明信),서흠(徐欽),서필화(徐弼華),서왜토리(徐倭土里),서순만(徐順萬),서성좌(徐成佐),서상영(徐相英),서문상(徐文尙),서끝룡(徐唜龍),서경묵(徐敬默),전력부위 서차선(徐次善),통덕랑 서진번(徐進蕃),부호군 서치상(徐致祥),겸사복 서인경(徐仁京),금위군 서창익(徐昌益),보인 서효복(徐效福),진사 서윤찬(徐允贊),진사 서학문(徐鶴聞),생원 서지보(徐志輔),생원 서백윤(徐百倫),생원 서전회(徐甸淮),찰방 서인형(徐仁亨),찰방 서휘(徐彙),찰방 서의수(徐懿修),진사 서눌(徐訥),진사 서동제(徐東濟),진사 서관(徐灌),진사 서현(徐弦),진사 서경(徐競),생원 서보(徐補),생원 서윤충(徐允忠),생원 서재후(徐載厚),생원 서병태(徐炳泰),군수 서지학(徐志學),군수 서절(徐趃),교리 서지문(徐知文),교수 서윤(徐倫),사헌부 감찰 서민기(徐敏基),생원 서태환(徐泰煥),생원 서희익(徐希益),생원 서환(徐瓛),생원 서홍유(徐弘有),생원 서기홍(徐基弘),생원 서상태(徐相泰),진사 서학문(徐鶴聞),생원 서지보(徐志輔),생원 서백윤(徐百倫),생원 서필천(徐必天),생원 서윤조(徐胤祖),생원 서국조(徐國照),생원 서태호(徐台鎬),생원 서지언(徐芝彦),진사 서영적(徐榮頔),진사 서척(徐滌),진사 서영(徐嶸),진사 서몽룡(徐夢龍),진사 서조(徐涤),진사 서극진(徐克進),진사 서한풍(徐漢豊),진사 서한용(徐漢茸),찰방 서휘(徐彙),찰방 서의수(徐懿修),찰방 서윤석(徐胤錫),의금부도정 서기강(徐基江 정3품),진사 서귀종(徐貴宗),진사 서윤충(徐允忠),교수 서윤경(徐允敬),참봉 서윤신(徐允信),사마 서유령(徐有齡),호조참판 서필하(徐必夏 종2품),좌승지 서선최(徐善最 정3품),첨지 서필우(徐必遇),이조참판 서재해(徐載海 종2품),군자감정 서수진(徐粹珍 정3품),통정대부 서채영(徐采榮 정3품),통정대부 서창유(徐昌儒 정3품),사헌부 지평 서복유(徐復儒),좌승지 서기원(徐基元 정3품),가선대부 서갑기(徐甲基 종2품),중추원의관 서종성(徐鍾聲),유학자 서명종(徐明鐘),고승(대사) ,축원,치익,자흔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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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국무총리급(정1품): 0명, 부총리급(종1품): 2명,장관급(정2품): 12명 ,차관급(종2품): 50명,차관보(정3품 당상관): 165명, 조선 명신: 30명, 조선 공신: 10명,조선 충신: 15명, 조선 처사: 20명, 조선 화가: 1명, 조선 음악가: 1명, 조선 시인: 3명, 조선대사(고승):3명,조선 학자: 48명, 조선 의병장: 35명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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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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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지도자 서장옥(徐璋玉),서병학(徐丙鶴), 청산리전투 승리 총재 서일(徐一), 일제강점기 의병장 서상국(徐相國), 독립운동가 서종채(徐鍾採),서태석(徐邰晳),서광조(徐光朝),서상렬(徐相烈),서왈보(徐曰甫),서승태(徐承台),서기환(徐基煥),서영환(徐永煥),서봉화(徐鳳化),서기창(徐基彰),서성모(徐成模),서병하(徐炳河),서병하(徐丙夏),서달수(徐達洙),서동일(徐東日),서윤제(徐允濟),서상용(徐相庸),서학이(徐學伊),서병철(徐丙轍),서상봉(徐相鳳),서의배(徐義培),서영석(徐永錫),서원준(徐元俊),서성학(徐成學),서필환(徐必桓),서성군(徐成君),서운선(徐云先),서영백(徐英伯),서춘만(徐春萬),서광도(徐光道),서여선(徐汝善),서상기(徐相基),서쇄용(徐鎖用),서정만(徐貞萬),서태식(徐泰植),서병두(徐丙斗),서몽조(徐夢祚),서상업(徐相業),서화일(徐化壹),서승렬(徐承烈),서성윤(徐成允),서진령徐鎭(水令), 서청산(徐靑山), 서초(徐超), 서병선(徐秉善),서순채(徐淳彩),서삼진(徐三辰),서장주(徐璋珠),서병순(徐秉舜),서병수(徐丙需),서상호(徐尙虎),서세충(徐世忠),서점수(徐點守),서정규(徐正奎),서장관(徐壯寬),서병림(徐丙林),서영해(徐嶺海),서진구(徐鎭九),서재익(徐在益),서대순(徐大順),서상경(徐相庚),서경식(徐璟植),서단파(徐檀坡),서상오(徐相午),서동익(徐東翼),서동화(徐東和),서상우(徐相祐),서정오(徐廷五),서영달(徐迎達),서봉원(徐鳳元),서정렬(徐正烈),서삼종(徐三鍾),서석근(徐石根),서정기(徐正基),서기옥(徐琦玉),서재수(徐在守),서경태(徐敬兌),서성국(徐成局),서호순(徐鎬淳),서봉운(徐奉雲),서재록(徐在祿),서동식(徐東植),서용석(徐龍錫),서재옥(徐在玉),서순옥(徐順玉),서성근(徐成根),서병규(徐丙珪),서재석(徐載錫),서인환(徐仁煥),서은구(徐殷九),서기예(徐基澧),서병돈(徐丙敦),서영백(徐英伯),서완득(徐完得),서상린(徐相燐),서대순(徐大順),서창석(徐倉錫),서옥봉(徐玉奉),서응삼(徐應三),서재만(徐在萬),서몽조(徐夢祚),서인국(徐寅國),서우범(徐禹?),서민석(徐岷晳),서벽환(徐壁煥),서원태(徐元泰),서석주(徐錫柱),서성칠(徐星七),서순봉(徐淳鳳),서영완(徐永琬),서광진(徐洸璡),서인필(徐仁弼),서정량(徐廷亮),서병선(徐炳善),서우석(徐禹錫),서상석(徐象錫),서홍구(徐洪勾),서용하(徐用河),서영석(徐永錫),서형묵(徐亨默),서광주(徐光周),서달제(徐達悌),서재영(徐在英),서복손(徐福孫),서진(徐震),서상원(徐相沅),서하원(徐河源),서순석(徐舜錫),서병수(徐丙需),서낙서(徐洛西),서금룡(徐今龍),서정후(徐廷侯),서유준(徐有俊),서창림(徐昌林),서기풍(徐基?),서성근(徐成根),서응만(徐應萬),서창무(徐昌務),서흥석(徐興錫),서두성(徐斗星),서재윤(徐載閏),서삼식(徐三植),서학종(徐學鍾),서재순(徐在順),서신영(徐信榮),서동수(徐東洙),서난수(徐蘭洙),서응삼(徐應三),서재호(徐在皓),사진선구자 서순삼 (徐淳三),육탄 10용사 소위 서부덕,국회부의장 서민호(徐珉濠), 국회의원 서성달,서한샘, 서재관,서혜석, 서경원,서상섭, 서기호, 이천그룹 회장 서상록(徐相錄), 태평양그룹 회장 서성환(徐成煥),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徐慶培),재현산업 회장 서유석, 성원제강 회장 서원석, 세진무역 회장 서한옥, 서안개발 회장 서의열, 성균관대총장 서성우, 복천학원설립자 서우순, 숭문중고교설립자 서기원, 봉선학원부천여상고교설립자 서성길, 고원진선중학교설립자 서덕구, 서울식품공업회장 서준산, 조해산업회장 서준호,대한이화학사장 서정구,한국기술투자회장 서갑수, 국무총리 서영훈 , 총무처장관 서석순, 건설부장관 서영택 ,과기부장관 서정욱 ,농림부장관 서규용 ,한국은행 총재 서진수, 교육부장관 서남수 , 교육부차관 서범석, 건설부차관 서종대,국가정보원기획실장 서동만, 용인시장 서정석,서울시정연구원장 서준호, 세계불교법왕 서경보, 전 조계종총무원원장 서의현,카이스트 총장 서남표, 조선대총장 서재홍,한글학자 서정범, 서정수, 불교학자 서경수, 핵학자 서균렬, 의학자 서병설, 서활,서순팔, 신학자 서남동, 서예가 서희환,서태종 금감원 부원장,서근우 신용보증기금이사장, 서재경 서울신용보증재단이사장, 서기동 구례군수,서삼석 무안군수, 서종화 서울시의원, 피아니스트 서혜경, 발레리나 서희,가수 서현,서인영,배우 서인석, 서지혜,서현선 ,서희승, 서재경, 운동선수 서윤복, 서정원, 서향순,서재응,서장훈,서희경, 서훈 국정원 원장, 서윤택육군소장,서경석육군소장,서길원육군중장,서상국육군소장,서정열육군소장,서욱 국방부장관,서호 통일부차관, 연평해전 중사 서후원,하사 서정우, 천안함 하사 서승원,하사 서대호,서해길 충남대교수, 서정일 경희대교수, 서봉연 서울대교수, 서연호 한양대교수, 서태영 부산대교수, 서두환에너지연구소물리실장,서두옥 제주대교수,서남규,서진헌 텍사스공대교수, 서광벽 공학박사, 서종범 경북대교육대학원장, 서인석 순천대교수, 서경림 제주대교수, 서광민 강원대교수,서정규 계명대교수, 서수지 계명대교수, 서원벽 의학박사, 서성인 한양대교수, 서성봉 경북대교수, 서기옥 의학박사, 서성훈 경희대교수, 서성무 중앙대교수, 서운택 대구대교수, 서익환 한양대교수, 서해호 원광대교수, 서정기 광주교대교수, 서원호 대전실업전문대교수, 서태상 동국대경주분교교수, 서봉호 항공대교수, 서재현 목포대교수, 서창호 공주대교수, 서주노 해군사관학교교수, 서영환 창원대교수, 서진환 성공회대 교수,서용택 인창중고교교장, 서한제 순천금당고등학교교장, 서병재 광양다압다사중학교교장, 서강희 전주남중학교교장, 서동훈 소설가, 서혜정 음악박사, 서영종 서예가, 서원규 내과의원장, 서홍준 소아과의원장, 서정열 신경외과의원장, 서용하 서용하의원장, 서정진 삼선의원원장, 서창용 자선의원원장, 서근호 동부시립병원안과과장, 서창선 성제의원장, 서재선 삼원의원장, 서강석 천혜의원장, 서정성 안과원장, 서민환 환경부 이사관,서경환 서울회생법원장, 서향희 변호사, 서성환 변호사, 서영수 대전지검검사,서병조 정보통신부정책관,서해엽 환경부사무관,서규식 코멕스카본사장,서병선 한동대교수,서원철 미국듀폰대교수,서찬식 건양대교수,서병기 배제대교수,서수한 대구대 교수,서순식 춘천교대교수,서영식 충남대교수,서원석 미국펜실베니아연구교수,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원장.행복한아이연구소장,서흔수 화이자제약,서병화미국일리노이대학교연구원, 인권운동가 서승, 서준식, 서경식 , 서윤기 서울시의원, 서주선 서화가, 서인석 시인, 서정윤 시인, 서정인 소설가, 서영은 소설가, 서용달 모모야마가쿠인대 교수,오케스트라 지휘자 서훈, 서희태 등 인물이 있다.<br />
<br />
<br />
<br />
<br />
한국 현대사(韓國現代史)에서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동학지도자: 2명, 독립군 총재: 1명,항일의병장: 1명,독립운동가: 150명, 사진선구자: 1명, 대통령후보:1명, 정당대표: 2명, 국무총리급: 1명,국회부의장: 1명,국회의원: 9명, 그룹총수(회장): 3명, 장관:5명, 차관:3명, 종교지도자: 2명, 대학자:11명,시장: 1명, 군수: 2명, 세계적인 예술가: 2명, 연예인:6명, 운동선수:7명, 장군:6명, 역전의 용사:5명이다.<br />
<br />
<br />
== [[이천 서씨]] 분파 ==<br />
*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br />
* [[서눌]](徐訥) 원숙공파(元肅公派)<br />
* [[서념]](徐恬) 문한공파(文翰公派)<br />
* [[서선(조선)|서선]](徐選) 공도공파(恭度公派)<br />
* [[서윤]](徐玧) 시랑공파(侍郞公派) <br />
* [[서보]](徐輔) 전서공파(典書公派)<br />
* [[서광]](徐珖) 예빈공파(禮賓公派)<br />
* [[서익]](徐翼) 부령공파(副令公派)<br />
* [[서학종]](徐鶴踵) 참봉공파(參奉公派)<br />
* [[서첨]](徐詹) 소윤공파(少尹公派)<br />
* [[서릉]](徐稜) 절효공파(節孝公派)<br />
* [[서유(고려3)|서유]](徐愈) 양경공파(良景公派)<br />
* [[서척(조선)|서척]](徐陟) 창사공파(倉使公派)<br />
* [[서진(고려2)|서진]](徐晉) 교리공파(校理公派)<br />
<br />
<br />
서(徐)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93,954명으로 조사되었다.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3위이다.<br />
<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백제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부여씨]](扶餘氏) ==<br />
<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br />
<br />
== 가족 ==<br />
* 본인:[[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br />
* 부인: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 아들: [[서필]](徐弼) (종1품 내사령)<br />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br />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br />
*** 손자며느리 : [[청주 한씨]](淸州韓氏) <br />
**** 증손자 :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br />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증손자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증손자 :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손자: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동생: [[서신통]](徐新通)<br />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br />
<br />
== 가족 관계 ==<br />
* 본인: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br />
* 부인 :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br />
** 아들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br />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 <br />
*** 손자 : [[서염(고려3)|서염]](徐廉)<br />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br />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br />
***** 고손녀: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徐氏)<br />
***** 고손자: [[서수]](徐琇 종1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br />
****** 고고손자: [[서장기]](徐長己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br />
*******고고고손자 : [[서진부]](徐振扶 정2품 좌복야左僕射)<br />
********고고고고손자 : [[서희적]](徐希積 종3품 내의시랑內議侍郞)<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영보]](徐永甫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선(고려)|서선]](徐瑄 종3품 중정대부(中正大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찬]](徐文贊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찬]](徐希贊 정2품 이부시랑(吏部侍郞) 평장사平章事)<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계]](徐元桂 군수(君守) <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중계]](徐仲桂 검교사인(檢校舍人)<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5)|서의]](徐誼 성균제주(成均祭酒).정 3품.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간(고려)|서간]](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후장]](徐後長 군수(君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후상]](徐後祥 추밀원사(樞密院事 종 2품. 부총리). 이부시랑 평장사(吏部侍郞平章事). 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호(고려)|서호]](徐浩 정치도감(整治都監) 좌랑(佐郎) 차관. 공신.충신)<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맹원]](徐孟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br />
****** 고고손자: [[서준방]](徐俊邦 정3품 형부상서(刑部尙書). 평당 서씨(平當徐氏) 시조)<br />
******* 고고고손자: [[서약진]](徐若珍 봉성군鳳城君)<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숭조]](徐崇祖 종2품 중추원사(中樞院事)<br />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손자:[[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br />
******* 고고고손자: [[서원(고려)|서원]](徐元)(정2품 평장사)<br />
*********** 원손자:[[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br />
************아들 :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br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br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br />
***************고손자 ;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br />
****************고고손자 :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br />
*****************고고고손자:[[서순원(조선3)|서순원]](徐順元 승의랑(承議郞)) <br />
******************고고고고손자:[[서척]](徐滌 진사) <br />
****************고고손자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br />
*****************고고고손자: [[서필(조선1)|서필]](徐弼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손자: [[서윤충]](徐允忠 생원) <br />
***************** 고고고손자: [[서적(조선2)|서적]](徐積 통덕랑(通德郞 정 5품 문관.차관보)<br />
****************** 고고고고손자: [[서유령]](徐有齡 진사(進士)<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응성]](徐應星 진사(進士)<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홍제]](徐弘濟)<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홍도]](徐弘渡 의병장. 예빈시첨정(醴賓寺僉正).정3품 .차관)<br />
****************고고손자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br />
*****************고고고손자: [[서문형]](徐文亨 학생(學生))<br />
******************고고고고손자: [[서걸]](徐傑 진사)<br />
*******************고고고고고손자: [[서귀종]](徐貴宗 진사)<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방]](徐守邦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조선1)|서영]](徐泳 진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길]](徐吉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엽]](徐曄 학생(學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추(조선)|서추]](徐▼(王+追) 학생(學生))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이성]](徐以成 학생(學生))<br />
****************고고손자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br />
*****************고고고손자 : [[서지(조선1)|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 서울시장.장관)<br />
******************고고고고손자 : [[서혼(조선1)|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적(조선1)|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할]](徐劼.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br />
*****************고고고손자 :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br />
******************고고고고손자 :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br />
*******************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br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br />
******************고고고고손자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br />
***************** 고고고손자: [[서상]](徐祥)<br />
****************** 고고고고손자: [[서변(조선1)|서변]](徐汴 학생(學生)) <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정원(조선1)|서정원]](徐廷原 의병장)<br />
*************손자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br />
**************증자: [[서맹원(조선1)|서맹원]] (徐孟原)<br />
***************고손자 : [[서윤문]](徐允文 상장군(上將軍). 정 3품.차관)<br />
****************고고손자 : [[서효순]](徐孝純)<br />
*****************고고고손자 : [[서광희]](徐光希 수문장(守門將). 총경)<br />
***************고손자 : [[서윤화]](徐允和 진사(進士)<br />
****************고고손자 : [[서효기]](徐孝起)<br />
*****************고고고손자 : [[서하]](徐河)<br />
******************고고고고손자 :[[서인정]](徐仁禎 훈련주부(訓練主簿). 차관보) <br />
***************고손자 : [[서윤찬]](徐允贊 진사)<br />
****************고고손자: [[서효지]](徐孝止 이조참판. 종 2품.차관)<br />
*****************고고고손자 : [[서담]](徐淡 참봉(參奉).종 9품.사무관)<br />
**************증손자 : [[서숙원(조선1)|서숙원]](徐叔原 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 종 7품.이사관)<br />
***************고손자 : [[서윤무]](徐允武 정략장군(定略將軍).목사(牧使). 종 4품. 차관보)<br />
****************고고손자 : [[서순지]](徐順止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br />
*****************고고고손자: [[서관(조선2)|서관]](徐灌 진사(進士) <br />
******* 고고고손자: [[서영관(고려)|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br />
******* 고고고손자: [[서공(고려)|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고손자: [[서순(고려)|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br />
********고고고고손자: [[서저]](徐氐 병부낭중. 종 3품. 차관급)<br />
********고고고고손자: [[서평(고려)|서평]](徐坪 판도좌랑)<br />
********고고고고손자: [[서광(고려)|서광]](徐珖-예빈소경))<br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손자: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左承旨)정3품.장관)<br />
**********고고고고고손자: [[서온(고려)|서온]](徐溫.승지.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고려1)|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1)|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충(고려)|서충]](徐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신]](徐信 원주목사.문하시중. 종 1품. 국무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구(조선3)|서구]](徐矩 덕천군수(德川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조선3)|서수]](徐綏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종 2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모]](徐模)<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3)|서호]](徐皞 사인(起居舍人).충청도경차관(忠淸道敬差官).암행어사)<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고려)|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고려1)|서원]](徐遠 찬성사(贊成事). 정 2품.부총리)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선(조선)|서선]](徐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재상).우의정(右議政).정1품. 부총리)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달]](중훈대부교동현감(徐達中訓大夫喬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조(조선)|서조]](통정대부안성군수 徐遭通政大夫 安城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우]](徐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연(조선1)|서연]](徐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섬]](徐暹)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조선2)|서간]](군자감첨정증참의 徐趕軍資監僉正 贈叅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초]](徐超) 부사(府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적]](徐自孔): 감찰(監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규(조선1)|서규]](徐赳) 지평(持平)<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도]]:(徐自道) 세마(洗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자소]](徐自逍) 감찰(監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절]](徐趃) 군수(郡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고려1)|서유]](徐逾 비인현사(庇仁縣事) <br />
******* 고고고손자: [[서성(고려)|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br />
******* 고고고손자: [[서염(고려)|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br />
******** 고고고고손자: [[서익]](徐翼 부령(司僕部令). 종 2 품. 부총리)<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裕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기]](徐原奇. 계성군(桂城君).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제(고려)|서제]](徐梯)<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맹]](徐孟)<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극인(고려)|서극인]](徐克仁)<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건손(조선)|서건손]](徐建孫 참군)<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승(조선4)|서승]](徐繩 부사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백령]](徐百齡.동와(東窩). 조산대부(朝散大夫) 영천교수(永川敎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자통]](徐自通.군수(郡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자이]](徐自邇.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4)|서호]](徐浩)<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옥(조선4)|서옥]](徐沃.예빈시정(禮賓寺正), 중추부사(中樞副使)). 종3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적]](徐友積)<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후적]](徐後積 통덕랑(通德郞))<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적]](徐景積 훈도(訓導))<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조선)|서양]](徐瀁)<br />
**** 고고손자: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br />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br />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br />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br />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춘]](徐椿 부여서씨파(扶餘徐氏派 대종)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2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첨]](徐詹 예빈사(禮賓寺) 소윤(少尹)<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구덕]](徐仇德)<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고려)|서경]](徐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습]](徐雨習)<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장손]](徐障孫)<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조선5)|서호]](徐浩)<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호덕]](徐好德 봉정대부 진의부위(進義副尉))<br />
********** 손자: [[서익명(고려)|서익명]](徐益明 첨절제사)<br />
*********** 증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br />
************ 고손자: [[서희적(조선1)|서희적]]:(徐希積 관호당공파)<br />
*********** 증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br />
********** 손자: [[서언명(고려)|서언명]](徐彦明)<br />
*********** 증손자: [[서준(고려)|서준]](徐濬)<br />
************ 고손자: [[서린지]](徐麟趾)<br />
************* 고고손자: [[서신(조선2)|서신]](徐愼)<br />
************* 고고손자: [[서침(조선2)|서침]](徐忱)<br />
************* 고고손자: [[서념(조선)|서념]](徐恬)<br />
************* 고고손자: [[서협]](徐恊 부장공파)<br />
*********** 증손자: [[서저(고려2)|서저]](徐渚)<br />
*********** 증손자: [[서정(고려5)|서정]]:(徐汀 부사공파)<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릉]]([[서능]])(徐稜 장성서씨파(長城徐氏派)=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관(조선)|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손(조선)|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박]](徐樸(부여서씨(扶餘徐氏) 봉례공파(奉禮公派))<br />
********** [[서진(고려5)|서진]](徐進 판관)<br />
***********[[서열(고려)|서열]](徐悅 봉예랑)<br />
************[[서정수(고려1)|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 <br />
*************[[서희(고려1)|서희]](徐凞)<br />
************** [[서수손]](徐秀孫 장사랑)<br />
*************** [[서관(조선6)|서관]](徐寬 진사)<br />
**************** [[서진남]](徐震男 진사) <br />
***************** [[서익(조선)|서익]](徐益 목사(牧使)) <br />
****************** [[서룡갑]](徐龍甲)<br />
******************* [[서운준]](徐雲駿 현감)<br />
******************* [[서운기]](徐雲驥) <br />
******************** [[서필원]](徐必遠 병조판서):정의공파<br />
*********************[[서경조(조선)|서경조]](徐敬祖 목사(牧使))) <br />
********************** [[서정덕]](徐定德) <br />
*********************** [[서인달]](徐寅達) <br />
************************ [[서진태]](徐鎭泰) <br />
************************* [[서명록]](徐命祿) <br />
******************** [[서치원]](徐致遠 음직직장(蔭職直長))<br />
********************* [[서경선]](徐敬善) <br />
********************** [[서경지(조선)|서경지]](徐景智) <br />
*********************** [[서상진(조선)|서상진]](徐相晉)<br />
************************ [[서범례]](徐範禮) <br />
************************* [[서도유]](徐道裕 진사)<br />
****************** [[서호갑]]:(徐虎甲 참의공파)<br />
****************** [[서인갑]]:(徐寅甲 통정공파)<br />
****************** [[서양갑]](徐羊甲 혁명가.홍길동의 모델) : 석선공파<br />
****************** [[서영갑]]:(徐永甲 학생공파)<br />
****************** [[서옥갑]]:(徐玉甲 만죽파)<br />
*************[[서성(고려2)|서성]]:(徐盛 교위공파)<br />
***********[[서이(고려)|서이]](徐怡 성균관직장(直長)):직장공파<br />
************ [[서봉래]]:(徐鳳來 평용위공파)<br />
************* [[서치근]](徐致謹)<br />
************** [[서익희]](徐益禧)<br />
*************** [[서순경(조선2)|서순경]](徐順敬)<br />
************** [[서익상]](徐益祥)<br />
*************** [[서극경]](徐克敬)<br />
*************** [[서극신]](徐克信)<br />
************ [[서봉상]](徐鳳翔)<br />
************* [[서팔원]](徐八元)<br />
************** [[서영무(조선)|서영무]](徐永武)<br />
*************** [[서치령]]:(徐致齡 첨사공파)<br />
*************** [[서만령]]:(徐萬齡 사간공파)<br />
************* [[서팔개]]:(徐八凱 진사공파)<br />
************** [[서학정]](徐鶴禎)<br />
*************** [[서팽수]](徐彭壽)<br />
**************** [[서응진]](徐應進)<br />
*************** [[서귀수]](徐龜壽)<br />
**************** [[서응시(조선3)|서응시]](徐應時)<br />
**************** [[서응명]]:(徐應明 참봉공파)<br />
**************** [[서응남(조선)|서응남]](徐應男)<br />
**************** [[서응노]]:(徐應魯 진사공위응노파)<br />
************** [[서학령]](徐鶴齡)<br />
*************** [[서린수(조선2)|서린수]]:(徐麟壽 봉사공파)<br />
*************** [[서기수(조선)|서기수]](徐麒壽)<br />
************ [[서봉수(조선)|서봉수]](徐鳳壽)<br />
************* [[서치중]](徐致中)<br />
************** [[서령(조선2)|서령]](徐玲)<br />
*************** [[서윤무(조선1)|서윤무]](徐允武)<br />
************** [[서림(조선1)|서림]](徐琳)<br />
************** [[서린(조선5)|서린]](徐璘)<br />
*************** [[서사함]](徐士諴)<br />
**************** [[서응기(조선1)|서응기]](徐應期)<br />
**************** [[서응길(조선)|서응길]]:(徐應吉 매월암공파)<br />
*************** [[서사심]]:(徐士諶 선전공파)<br />
************** [[서류(조선)|서류]](徐瑠)<br />
*************** [[서사문]](徐士文)<br />
**************** [[서응명(조선)|서응명]](徐應命)<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남양(당성)서씨파(南陽((唐城)徐氏派) <br />
***************원손자: [[서숙]](徐淑)(우승지)<br />
**************아들: [[서충수]](徐忠守 도승지)<br />
***************원손자: [[서혼(조선2)|서혼]](徐混 부위)<br />
****************아들: [[서충필]](徐忠弼 부호군)<br />
****************아들: [[서충좌]](徐忠佐 학생(學生))<br />
****************아들: [[서충우]](徐忠佑 통정대부(通政大夫))<br />
*****************손자: [[서정연]](徐挺然 증 호조참판)<br />
******************증손자: [[서한장]](徐漢章 통덕랑(孝子通德郞)<br />
******************증손자: [[서한량]](徐漢亮)<br />
*****************손자: [[서정지]](徐挺之 선무랑(宣務郞))<br />
******************증손자: [[서한주]](徐漢柱 부사.학자)<br />
***********원손자: [[서원길]](교리공(校理公))<br />
************ 아들: [[서득부]](徐得富)<br />
************* 손자: [[서순경]](徐順卿 진용교위(進勇校尉)) <br />
************** 증손자: [[서호번]](徐好蕃 부위(副尉))<br />
*************** 고손자: [[서경덕]](徐敬德 학자.주기파(主氣派)의 거유)<br />
**************** 고고손자: [[서응기(조선)|서응기]](徐應麒)<br />
*************** 고손자: [[서형덕]](徐馨德 생원)<br />
*************** 고손자: [[서숭덕]](徐崇德)<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직]](徐稷(연산서씨파(連山徐氏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고려2)|서보]](徐寶).연성군(連城君)<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수(조선)|서종수]](徐宗秀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련]](徐潾 판관(判官))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령]](徐千齡 현감(縣監))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주]](徐澍)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후적(조선)|서후적]](徐後積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래]](徐必來)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조선1)|서익]](徐榏 현감(縣監))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규세]](徐奎世)<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도동]](徐道東)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택선]](徐宅善 부사(府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재(조선)|서윤재]](徐潤載 무과)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화(조선)|서윤재]](徐潤和)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간세(조선)|서간세]](徐幹世 무과)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徐秉▣)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극선]](徐克善)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헌(조선)|서병헌]](徐秉憲 군수(郡守))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집선]](徐集善)<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적]](徐效積)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성]](徐必成 첨정(僉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조선2)|서정]](徐椗)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명세]](徐名世 현감(縣監))<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행]](徐必行)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숙(조선)|서숙]](徐橚 증 호조참판)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조]](徐喜朝)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병덕]](徐秉德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해조]](徐海朝 참군(參議)) <br />
**** 증손자: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고손자: [[서면(고려)|서면]](徐冕 정4품 주부) <br />
****** 고고손자: [[서린(고려)|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br />
******* 고고고손자: [[서찬(고려6)|서찬]](徐瓚 (정4품 장령)<br />
******** 고고고고손자: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정3품 승지)<br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고려3)|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천]](徐思川)<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근]](徐楊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경흥]](徐敬興.정3품 목사(牧使)<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조선1)|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2)|서진]](徐晋 정3품 사재감정 교리공파(校理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혼(조선)|서혼]](徐混 정3품 우승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강(조선)|서강]](徐岡 정3품 대사성)<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산보]](徐山甫 정 4품 장령)<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운(조선)|서운]](徐運 동복현감(同福縣監).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항]](徐恒 하동현감(河東縣監).증 통예원 우통예(通禮院 右通禮). 군수)<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관(조선3)|서관]](徐瓘 북부주부(北部主簿).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국장)<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형(조선)|서형]](徐詗 종사랑(從仕郞).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차관)<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선원]](徐善元)<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1)|서인원]](徐仁元 호조참의(戶曹參議).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정2품.장관).명암공파(鳴巖公派))<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예원]](徐禮元 진주목사.장군.공신.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br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우(조선3)|서우]](徐遇 사간원직장(司諫院直長).차관보)<br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근]](徐赾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정3품.차관)<br />
**** 증손자: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손자: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고고고손자: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br />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br />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괄]](徐适 훈도(訓導))<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徐洗찰방(察訪))<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진원]](徐震元 진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감원]](徐次元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간원]](徐艮元)<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태원(조선)|서태원]](徐兌元)<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습]](徐漝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환]](徐渙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br />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후(조선)|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구]](徐久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업]](徐嶪 증 병조 판서 겸 부사(兵曹判書兼府使))<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수(조선)|서수]](徐洙 생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무]](徐景茂 절충 장군(折衝將軍)<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대]](徐岱 장사랑)<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엄]](徐崦 학자)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조선2)|서영]](徐嶸 서흥파(瑞興)<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팽려]](徐彭呂) 풍저창봉사(豊儲倉奉事)<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br />
*** 손자 : [[서영(고려3)|서영]](徐英)<br />
* 동생 : [[서신통]](徐新通)<br />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br />
<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 집성촌 ==<br />
=== 경기 ===<br />
* 경기도 안성시 금석동<br />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독립유공자 서용하가 이 마을 출신이다.]<br />
<br />
=== 전라·제주 ===<br />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 독립유공자 [[서종채]]가 이 마을 출신이다.]<br />
*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부용리<br />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가실리<br />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유촌리<br />
*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br />
*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신기리<br />
* 전라남도 광양시 중동<br />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산남리[독립유공자 서경식이 이 마을 출신이다.]·용곡리·운평리·죽천리<br />
*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송금리<br />
*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br />
*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br />
*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내리·대치리·봉명리<br />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br />
* 전라남도 여수시 월하동<br />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쌍풍리<br />
*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 육산리<br />
*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금곡리·백호리<br />
*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성천리<br />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신성리[독립유공자 서상룡이 이 마을 출신이다.]<br />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국동리·오동리[독립유공자 서기표가 이 마을 출신이다.]<br />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br />
<br />
=== 대구·경상 ===<br />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오산리<br />
*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br />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금구리·동부리·수서리<br />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회룡리[독립유공자 서진구가 이 마을 출신이다.]<br />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보미리<br />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br />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공덕리<br />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br />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br />
<br />
=== 북한 ===<br />
* 강원도 통천군 임남면 외염성리<br />
* 강원도 회양군 안풍면 풍미리<br />
*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서성환 태평양 창업주가 이 마을 출신이다.]<br />
*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 장미리<br />
* 평안북도 박천군 북면 사직리·원남리<br />
*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상사창리·하사창리<br />
* 함경남도 단천군 광천면 동원리<br />
*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오몽리[* 독립유공자 서봉화가 이 마을 출신이다.]<br />
* 함경남도 영흥군 복흥면 하국사리·형탄리<br />
* 함경남도 홍원군 보청면 나상리·나천리·신흥리·중평리<br />
<br />
== 유명인 ==<br />
* 서현진(배우) - 대한민국의 배우<br />
* 서미경 -대한민국의 배우.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부인.<br />
* 서은광 - 아이돌 비투비의 멤버<br />
* 서재희 - 대한민국의 유튜버, 범죄자<br />
* 서욱 - 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br />
* 서신애 - 대한민국의 배우<br />
<br />
== 기타 ==<br />
왕건이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러 가면서 복하천에 이르렀는데 이때 큰 비로 복하천을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현지인[* 이름이 '[[서목]]'으로, [[이천 서씨]]이다. 카더라에 따르면 [[서신일]]의 형제인 [[서신통]]의 아들로 [[서필]]의 사촌형제라고 한다.]의 도움을 받아 강을 무사히 건너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큰 내를 건너 이로웠다는 '이섭대천'이라는 이름이 줄여져 그곳의 지명이 이천이 되었다고 한다.<br />
<br />
<br />
== 기자와 기자조선의 왕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 ==<br />
* 청주 한씨<br />
* 선우씨<br />
* 행주 기씨<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br />
<br />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 [[이천서씨(利川徐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br />
[[이천서씨]] 상징 조형물<br />
<br />
작품명 : 은혜(恩惠) 갚은 사슴<br />
<br />
작가 : 한국환경조각연구소 신동수<br />
<br />
인간의 선한 본성을 통한 생명 존중과 존엄성을 표현하고<br />
이는 지혜와 온건함, 순수함과 신의, 높은 기상과 강한 의지,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천서씨]]의 본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br />
화강암 좌대위에 사슴 암수 한쌍을 새겨 사슴의 은혜를 상징화시킴.<br />
십장생과 일원 자연은 문중의 번영을 표시함.<br />
여섯 개의 산봉우리는 강동육주와 8성 280리를 획득한 구국의 영웅 [[서희]]선생의 업적을 표시함.<br />
하단의 좌대는 시조를 의미하며 그 위로 뻗어나가는 산의 형상은 [[이천서씨]]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함<br />
<br />
==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br />
<br />
== [[서희테마파크]]([[서희역사관]]) ==<br />
위치는 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130<br />
도로명: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130<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은 이천에서 태어나시어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태보내사령까지 오르셨던 문신이셨습니다. 특히 서기 993년 (성종12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당시, 단신으로 적장 소항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으로 내몰고, 위태롭던 나라를 구해내시고 끊이지 않는 북진개척 정신으로 우리 민족의 영토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8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 일대까지 넓힌 훌륭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이셨습니다. 이러한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의 위업을 되살려 그 업적을 확산, 보급하고 국가의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한 ‘이천시 [[서희]](徐熙)선양사업 추진위원회’를 통해 대대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서희역사관은 이 모든 것들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br />
<br />
== [[숭의전]](崇義殿) ==<br />
조선 시대 고려 태조와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성종(成宗)•목종(穆宗)•현종(顯宗) 및 정몽주(鄭夢周) 등 15인의 공신을 제사지내도록 한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음. 태조 6년(1397)에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정종 원년(1399)에 고려 7왕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세종 5년(1423)과 문종 2년(1452)에 중건하였는데 문종 때에 숭의전(崇義殿)이란 전호(殿號)를 내려 고려 왕씨의 후손들로 부사(副使) 혹은 사(使)로 삼아 봄•가을로 제사하고 관리하도록 하였음. 제전(祭田)으로 숭의전전(崇義殿田) 12결이 지급되었고, 매년 1차례씩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하여금 봉심(奉審)토록 하는 한편, 승지(承旨) 등을 보내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음. 그 소속 관원으로는 종3품의 사, 종4품의 수(守), 종5품의 영(令), 종6품의 감(監), 종9품의 여릉 참봉(麗陵參奉) 1원(員)이 있었음.<br />
<br />
숭의전.<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을 주었다. 세종 7년이 되어 유사가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습니다.” 하므로, 이에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으로 향축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로 삼았다. <br />
<br />
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徐熙)•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 등을 배향했다.<br />
<br />
崇義殿<在郡西五里 本朝太祖元年 命禮曹立廟於麻田縣 祭高麗太祖惠宗成宗顯宗文宗元宗忠烈王恭愍王 給祭田 至世宗七年 有司言 國家宗廟只祭五室 而前朝之廟乃祭八位 未合於禮 於是 只留太祖顯宗文宗元宗 以春秋二仲朔傳香祝致祭 文宗二年 求高麗後王循禮 俾主其祀 仍名其廟爲崇義殿 以循禮爲副使 以卜智謙洪儒申崇謙庾黔弼裴玄慶徐熙姜邯贊尹瓘金富軾金就礪趙冲金方慶安祐李芳實金得培鄭夢周配享>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13, 16장 앞쪽~뒤쪽, 경기 마전군 사묘]<br />
<br />
== [[잿머리성황당]](城頭里城隍堂) ==<br />
고려시대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성황당으로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산76에 위치해 있다.<br />
<br />
고려 성종 때 내부시랑이었던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 잿머리 해안에서 배를 타려고 하자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든 [[서희]]의 꿈에 소복을 입은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여인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장모 안씨였는데 그들은 사당을 마련해 경순왕과 두 모녀의 영정을 두고 제사를 지내 한을 풀어주면 파도를 잠재워 항해를 돕겠다고 했다. 잠에서 깬 [[서희]]가 그들의 바람대로 관아의 수장을 불러 사당을 짓게 하고 화공을 불러 영정을 그리게 하여 며칠 후 모두 완성되자 거칠던 바다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그 후로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사당에 제를 올리며 순탄한 항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현재 세워져 있는 성황당은 1990년에 개축된 것이며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았던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5년부터 안산의 문화행사로 이곳에서 가을성황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br />
<br />
== [[여주 상산재]] ==<br />
<br />
□ 소재지 : 산북면 후리<br />
□ 시 대 : 조선(현대 중수)<br />
<br />
상산재는 고려의 명재상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 901~965)과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942~998)를 모신 재실로, 후리 뒷골마을의 동쪽 외곽에 건립되어 있다. 단층의 양옥 건물로 지었으며 옥상에 별도의 구조물을 설치하여 “상산재”라 써 놓았다. 두 분의 묘소가 재실 앞쪽의 상두산(象頭山)에 자리 잡고 있어, 그 명칭을 상산재라 한 것이다. 재실의 앞쪽에는 최근에 건립한 [[서필]]과 [[서희]]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br />
<br />
==[[서필선생묘]](徐弼先生墓) ==<br />
<br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 /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함.<br />
<br />
<br />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나와 3번 도로를 타고 여주, 이천쪽으로 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양평 쪽으로 간다. 렉스필드 CC 입구를 지나 여주군 산북면으로 가다 상품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라는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작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묘소에 들어가기 전 입구 터가 나온다. 이 입구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과 [[서필]]와 [[서희]] 부자의 신도비(神道碑), 사적비, 그리고 묘소를 관리하는 [[여주 상산재]](象山齊)가 있다.<br />
<br />
[[서희]] 선생과 관련한 여러 유적에 ‘[[서희]] 장군’이라고 표기되어있고, [[서희]] 선생의 묘소도 ‘서희 장군의 묘’라 표기되어있으나 정확하게 [[서희]] 선생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으므로 ‘장군’이라는 표기는 잘못 된 것이다.<br />
<br />
신도비(神道碑)<br />
<br />
[[서필]] 선생의 것과 [[서필]] 선생의 아들 [[서희]] 선생의 것 2개가 서 있다. 정면에서 보자면 왼편의 것이 [[서필]] 선생, 오른편이 [[서희]] 선생의 것이다. 신도비의 하단부에는 거북상이 있고, 그 위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정면에는 고려시대에 두 선생들이 지냈던 벼슬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다. 옆면에는 두 선생과 관련된 일화가 한글로 기록되어있다.<br />
<br />
== [[서희선생묘]](徐熙先生墓)==<br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 / 경기기념물 제36호<br />
<br />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나와 3번 도로를 타고 여주, 이천쪽으로 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양평 쪽으로 간다. 렉스필드 CC 입구를 지나 여주군 산북면으로 가다 상품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라는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작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묘소에 들어가기 전 입구 터가 나온다. 이 입구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과 [[서희]]와 [[서필]] 부자의 신도비(神道碑), 사적비, 그리고 묘소를 관리하는 [[여주 상산재]](象山齊)가 있다.<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br />
새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듯이 “빛으로” 찬란하게 예술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또는 자신만의 색채로 우리 이천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합니다.<br />
우리 이천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이듯이 이천의 혼불로 르네상스를 이천예총 각협회가 만들어 가겠습니다.<br />
이천예총은 8개협회(국악협회/무용협회/문인협회/미술협회/사진작가협회/음악협회/연극협회/연예예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br />
이천예총이 창의적 생각과 열린마음으로 예술인들의 끼와 혼을 발산시키고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바로 [[이섭대천종합예술제]]입니다.<br />
<br />
== [[서희청소년문화센터]](徐熙靑少年文化center) == <br />
서희청소년문화센터는 청소년활동진흥법 11조(수련시설의 설치·운영 등)1항, 2조에 의거 이천시장이 설치한 기관으로 (재)이천시청소년재단이 운영하고 있습니다.<br />
<br />
‘꿈꾸는 자유공간! 즐거운 청소년활동! 청소년이 주인인 문화센터’ 라는 비전 아래 청소년들의 문화,예술,체육활동을 비롯한 리더십함양,진로탐색활동 지원은 물론 자율적인 청소년활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br />
또한 이천시민들을 위한 공연 및 세미나 평생교육프로그램 운영으로 이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br />
<br />
== [[설봉서원]](雪峯書院) ==<br />
1564년(명종 19)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서원<br />
<br />
경기도 이천시에 있었던 조선전기 [[서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br />
1564년(명종 19)에 이천부사 정현(鄭賢)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재상)·이관의(李寬義)·김안국(金安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1593년(선조 26)에 이천읍 관고리로 이건하였으며, 최숙정(崔淑精)을 추가 배향하였다. 2022년에 [[서선(조선)|서선]](徐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재상).증 우의정(右議政).정1품)선생이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단(壇)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 왔다.그 뒤 1977년 9월에 현충탑을 건립하여 네 명 선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는 글을 새겼으며, 그 옆에 설봉서원유허비(雪峯書院遺墟碑)를 세워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현충탑과 유허비 외에 하마비(下馬碑)와 6칸의 재실이 있으며, 서원 복원을 추진 중에 있다.<br />
<br />
== 전라도(나주) [[철천사]](哲川祠) ==<br />
위치는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br />
병부상서공파 중시조인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을 배향하고 있다.<br />
<br />
[[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중시조로,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던 고려시대의 문신 [[서린(고려1)|서린]](徐鱗 1222~1305)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1794년(정조 18) 지역 유림이 세운 사당이다.<br />
1947년 중건되었고, 그 후 한 번 더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br />
사우(祠宇)는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며,<br />
강당인 영덕재(永德齋)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다.<br />
그밖에 내삼문과 창고·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br />
<br />
== [[나주 사롱사]](四聾祠) ==<br />
세조가 단종으로 부터 강제로 왕위를 양위받자, [[서호(고려1)|서호]](徐顥(灝). 남원부사. 정 3품. 전남도지사.차관.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정 2품. 장관)의 큰 아들인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은 벼슬을 버리고,남평 본집에 돌아와 세 아우들과 사룡사를 구축하고 은퇴하여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 <br />
<br />
아우인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서효당]](徐孝堂. 익롱공(益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이 그 말을 듣고, 의리에 합당한 일이라고 여기고 역시 맏형을 따라 듣는 것을 피하는 귀머거리가 되니, 당시 마을 사람들이 사롱(四聾)이라 하였다. 또한 호도 귀머거리 롱(聾)자를 써서,예롱(豫聾),수롱(隨聾),점롱(漸聾),익롱(益聾)이라 하였다.<br />
<br />
== [[거가십훈]](居家十訓) ==<br />
「거가십훈」은 고려 고종 때 관료를 지냈던 [[서능]]이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 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만들어 가르쳤던 것이다. 모두 10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서 삼경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거가십훈」을 최초로 수록한 간본은 1578년 또는 직후에 간행된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가십훈」이다.<br />
<br />
==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br />
<br />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의 문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에 이르렀던 [[서능]](徐稜 ?~?)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의 터이다.<br />
<br />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의 용소(龍沼) 위쪽에 터가 있는데 현재 축대 일부만 남은 상태이다. 1919년 후손 서용호가 이 자리에 ‘절효 서선생 초당 유허비(節孝徐先生草堂遺墟碑)’를 세웠다.<br />
<br />
[[서능]]은 고려시대의 이름난 효자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기록된 10여 명 중 한 명이며,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에도 그의 효행 행적이 실려 있다. 또한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br />
<br />
== [[장성 서능 정려비]] (長城 徐稜 旌閭碑) ==<br />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서능]] 선생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br />
<br />
선생은 스무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의원이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때가 한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약탕기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약과 함께 짜서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종이 후에 이 사실을 듣고 표창을 하면서, 그의 효심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br />
<br />
정려각 안에 놓여 있는 이 비는 사암 박순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 글씨를 써 놓았다.<br />
<br />
== 전라도(장성) [[용전사]](龍田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br />
1587년(선조 20년) [[서릉]](徐稜)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br />
<br />
건립 당시의 명칭은 모암서원이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br />
1976년 [[서릉]]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건하면서 용전사로 변경되었다.<br />
<br />
서릉은 본관이 이천서씨(利川徐氏)로 절효공파((節孝公派) 중시조.<br />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모<br />
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였다.<br />
<br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226번지 용암마을에 위치한다.<br />
<br />
== 재각 [[용전재]](龍田齋) ==<br />
<br />
== [[모암서원]](慕巖書院) ==<br />
1587년에 서삼면 모암리에 세워진 [[모암서원]](慕巖書院)은 절효공 [[서능]](徐稜)을 모신 사당(祠堂)과 양편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앞에 큰 강당이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절효공의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벽에 걸어 높고 그 아래서 글을 읽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에 모암서원유허비(慕巖書院遺虛碑)와 칠현비(七賢碑)만 남아있다<br />
<br />
==[[화남사]](華南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br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현대에 [[서릉]](徐稜)·[[서식]](徐湜)·[[서숭로]](徐崇老)·[[서영우]](徐永佑)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우.<br />
<br />
==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br />
향토문화유산 제1호.<br />
<br />
전남 무안군 몽탄면 한재길 42-4.<br />
<br />
[[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br />
<br />
== [[경주 귀산서원]](龜山書院)==<br />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서원으로,<br />
<br />
1786년(정조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유(고려3)|서유]](徐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귀산서사(龜山書社)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48년에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지요.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198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br />
매년 2월 상정(上丁)과 8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br />
<br />
== 전라도(광양) [[옥평사]](光陽 玉坪祠) ==<br />
<br />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의 하평마을에 있는 사당이다.<br />
<br />
1959년에 건립된 것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문중 사우에 해당된다.<br />
<br />
이곳에 배향된 인물로는 원숙공(元肅公) [[서눌]](徐訥 고려 문하시중.종1품. 국무총리. 고려 현종 묘정 배향.재상)<br />
기은(箕隱) [[서희찬]](徐希贊 고려 명신.재상)<br />
문의공(文毅公) [[서호(고려)|서호]](徐浩 고려 충신.재상),[[서열]](徐悅 백운거사),[[서천일]](徐千鎰 암연처사) 등이 있다.<br />
<br />
== [[충현서원]](忠賢書院) ==<br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청도 최초로 세워진 사액 서원. <br />
공주시청에서 대전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8㎞ 달리면 공암이 나온다. 대략 27분여의 시간이 소요되며, 충현서원은 마을의 중앙에 있다.<br />
<br />
== [[충현서원유적]](忠賢書院遺跡) ==<br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조선시대 학자 [[서기]](徐起)가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시도기념물.<br />
<br />
== [[충현서원 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br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에 있는 서원 사적비. <br />
[[충현서원 사적비]]는 [[충현서원]](일명 공암서원) 안에 있는 서원 사적비로, 1712년(숙종 38) 연천의 임장서원에서 주자의 화상을 모사해와 신판 뒤에 봉안한 과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br />
<br />
== [[공주 충현서원 문화제]] ==<br />
충현문화제 등은 공주시 반포면 공암 옛 장터길 충현서원특설무대 등 일원에서 열린다.<br />
<br />
== [[화순 성산사]] ==<br />
1579년경 [[이천서씨]] [[서의립]](徐義立1547~1631)이 화순현 소곡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한 고촌이다.<br />
<br />
1907년 건립했던 강당 충의당(忠義堂)과 독특한 형태의 사당 성산사(星山祠)가 외삼문, 충의당 뒤로하고 자리하고 있다. 핑게 없는 무덤 없듯이 사연없는 목조물은 없다.<br />
<br />
이곳에는 고려말 절인이었던 여와(麗窩) [[서견]](徐甄)과 송담(松潭) [[서강(조선)|서강]](徐岡)을 향사하고 있다. 규모는 정 3칸, 측1칸, 맞배, T자형으로 구성됐다. 충의사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다,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내부에는 대청형으로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br />
<br />
== [[섬계서원]](剡溪書院) ==<br />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에 있는 조선 [[서즐]](徐騭) 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br />
<br />
==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br />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조선후기 강감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내용충현서원은 원래 1658년에 강감찬(姜邯贊), [[서견]](徐堅), 이원익(李元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고려의 강감찬이 주향되어있고, [[서견]], 이원익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사(三賢祠)라 불리었는데, 1676년에 충현서원(忠賢書院)고 사액이 내려지고 예조좌랑이던 박징(朴徵)이 치제하였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원래 창건된 곳이 금천현 한천동인데 그 지명을 따서 한천사(寒泉祠)라 하기도 하였다. 이원익의 영당(影堂)인 관감당이 1694년에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다. 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원 충현서원지가 현 위치가 아님이 밝혀져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br />
<br />
== [[김해성전투]](金海城戰鬪) ==<br />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에 [[서예원]](徐禮元) 등이 김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br />
<br />
== [[2차 진주전투]] ==<br />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br />
<br />
==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 ==<br />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br />
<br />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br />
<br />
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br />
<br />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br />
<br />
== [[육절려]](六節閭) ==<br />
강원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 산11에 있는 정려각.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 1817년(순조 17),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서예원]](徐禮元)과 그의 처, 아들, 며느리, 사위, 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br />
<br />
== [[진주성 비가- 조열태저자]] == <br />
1951년 가을, 밀양성 축조 공사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진주성 2차전 성주 [[서예원]](46세)과 밀양 평촌 마을의 최억술(41세)이다. 전반부 축성과 개전전야를 통해 그 당시 민초들이 전쟁준비로 해서 겪었던 고통이 그려진다. 1952년(임진년)에 전쟁이 터지는 것은 밀양 장날 최억술이 봉화 신호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억술이 장에 갔다가 봉화를 본 직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피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때 김해성에 있던 [[서예원]] 역시 봉화를 보고서는 즉각 교전태세에 들어가는데<br />
<br />
== [[남접]] ==<br />
동학의 분파 중 하나<br />
[[서장옥]]이 이끄는 동학으로 종교적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했던 북접과 달리 정치적 개혁을 추구했던 조직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인 전단계였던 1893년 3월 금구군 원평 집회([[금구취당]])는 남접파의 집회로 [[서장옥]]과 전봉준이 주도하였다. [[서장옥]]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으로 남접파의 거두이며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도하였다. 북접이란 용어가 남접에 대응하여 나왔을 정도였다.<br />
<br />
==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br />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br />
<br />
== [[삼례집회]](參禮集會) ==<br />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br />
<br />
== [[금구집회]](金溝集會) ==<br />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북도 금구에서 개최한 집회.<br />
<br />
== [[동학농민운동]] ==<br />
1894년([[조선 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br />
<br />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br />
<br />
== [[1차 동학농민운동]] ==<br />
1894년([[조선 고종|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br />
<br />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br />
<br />
== [[2차 동학농민운동]] ==<br />
1894년([[조선 고종|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br />
<br />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br />
<br />
==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 ==<br />
매년 양력 5월 개최되는 행사로서 조선시대 봉건제도의 학정에 대한 순수한 농민의 개혁혁명운동의 발상지로서 근대화를 앞당겼고 민족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의미있는 행사이다.<br />
<br />
== [[국수(國手) -김성동 역작]] ==<br />
한국문학의 살아 있는 거장, 김성동 작가의 장편소설 『國手』가 솔출판사에서 전 6권으로 출간되었다. 1991년 11월 1일 [문화일보]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27년 만에 완간한 『國手』는 오랜 시간 김성동 작가의 집념과 혼으로 완결시킨 작품으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를 잇는 대서사시이다.<br />
<br />
== [[고흥 죽산재]](高興 竹山齋) ==<br />
[[고흥 죽산재]]는 서재 겸 재실로 활용되었고, 기단이나 초석을 잘 다듬어 품격을 높인 근대기(1933년) 의 목조건축물이다. 건축적으로 부재의 기법이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민화풍의 해학적인 느낌과 단청은 불교적인 요소와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을 표현하는 등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사례이다. 특히 이 건물은 죽파 [[서덕봉]](字 [[서화일]], 1860~1933)이 서재로 쓰고자 지었으나 준공 후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월파 [[서민호](1903~1974)선생이 부친의 제실과 서재로 썼다. [[서화일]]은 지주로 사회사업과 복지, 교육 등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아들인 [[서민호]]는 조선어학회사건과 항일독립운동을 한 근대 역사인물이다.<br />
<br />
죽산재 건립연대는 1933년이다. 2013년 보수정비 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송병섭 찬)에 따르면 1933년 4월에 상량했음을 알 수 있고, 10월에 [[서화일]]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실과 서재로 활용 된 것을 알 수 있다. [[고흥 죽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ㄷ’자형 구조이다.<br />
<br />
==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br />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br />
<br />
== [[민중당]](民衆黨) ==<br />
1965년에 창당되었던 정당.연원 및 변천1963년 단일야당의 형성에 실패한 이래로 야권은 계속 통합노력을 기울인 끝에 1965년 5월 3일 민정·민주 양당이 통합선언대회에서 이 당의 창당을 선언하고, 같은 해 6월 14일 함당 전당대회를 통해 창당하였다.<br />
<br />
== [[대종교]](大倧敎) ==<br />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br />
<br />
==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br />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br />
<br />
== [[중광단]](重光團) ==<br />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br />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br />
<br />
==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br />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br />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br />
<br />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br />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br />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br />
<br />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br />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br />
<br />
== [[청산리대첩]] ==<br />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br />
<br />
==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br />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br />
<br />
==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br />
<br />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br />
<br />
==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br />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br />
<br />
==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br />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br />
<br />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br />
<br />
==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br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br />
<br />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br />
<br />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br />
<br />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br />
<br />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br />
<br />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br />
<br />
== [[회삼경]](會三經) ==<br />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br />
<br />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br />
<br />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br />
<br />
==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br />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br />
<br />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br />
<br />
== [[서오전]](鼠獒傳) ==<br />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br />
<br />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br />
<br />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br />
<br />
== [[매학선생유고]](梅壑先生遺稿) ==<br />
2권 1책(영본). 목활자본. 원래 본집 15권과 부록으로 되어 있었으나, 산질되어 현재는 권15 「존문록(尊聞錄)」과 부록만이 전한다. 자세한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권두에 1916년에 쓴 송인학(宋寅學)ㆍ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1729년(영조 5) 나이빈(羅以彬)이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안종학(安鍾鶴)이 쓴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br />
<br />
목차에 의하면 권1∼4에 시, 권5에 소(疏), 권6∼8에 서(書), 권9ㆍ10에 별지(別紙), 권11에 잡저, 권12에 휴암선생입사실기(休庵先生立祠實記), 권13에 불립당사우연원후(不立黨師友淵源後)ㆍ잠(箴)ㆍ명(銘)ㆍ송(頌)ㆍ제문ㆍ축문, 권14에 상량문ㆍ행장ㆍ유사, 권15에 존문록과 부록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br />
<br />
「존문록」은 제자가 스승 안방준에게서 들은 학문 강론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에는 조상우(趙相愚)가 쓴 연보와 종사록(從師錄)ㆍ동유록(同遊錄)과 윤증(尹拯)이 쓴 유사,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장, 윤상익(尹相翊)이 쓴 추장(追狀), 유지빈(柳之彬) 등이 지은 제문 등이 있다.<br />
<br />
당대의 석학인 윤증(尹拯),유필원(柳必源) 등과 교류 하였으며, <br />
<br />
[[요은집]](鬧隱集) 가운데 저자에 대한 부록을 지었다<br />
<br />
== [[용강사]](龍岡祠) ==<br />
[[용강사]](龍岡祠)는 용구(龍邱) [[서봉령]](徐鳳翎)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서봉령]]의 호를 따서 [[용구사]](龍邱祠)라 하였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br />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br />
<br />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br />
<br />
==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 <br />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br />
<br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br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br />
<br />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br />
<br />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1%B0%EA%B0%80%EC%8B%AD%ED%9B%88거가십훈2024-03-04T11:53:12Z<p>Jwseo21: </p>
<hr />
<div>[[거가십훈]](居家十訓)<br />
<br />
「거가십훈」은 고려 고종 때 관료를 지냈던 [[서능]]이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 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만들어 가르쳤던 것이다. 모두 10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서 삼경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거가십훈」을 최초로 수록한 간본은 1578년 또는 직후에 간행된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가십훈」이다.<br />
이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 있었다. 첫째, 「거가십훈」은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지켜나가야 할 규범과 덕목들로 구성되 어 있다. 참고한 문헌은 「논어」, 「맹자」, 「중용」, 「서경」, 「주역」 등 사서삼경이었다. 둘째, 저자는 「주자가례」에 대한 해석, 그리고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자의 상례에 대해 적합한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 내용은 「주자가례」가 13세기 전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셋째, 저자는 성균관 학생들을 지도하는 학록을 맡은 학자풍의 관료이자 효자였다. 넷째, 「거가십훈」을 만들었던 1232~3년은 조모상을 당해 시묘살이하던 중이었다. 다섯째, 1578년 혹은 그 직후에 간행된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 가십훈」과 후대 간본 및 족보에 전하는 내용은 문자의 차이가 제법 있다. 「고려시중절효선 생서공거가십훈」은 이들을 교정하는데 도움이 된다.<br />
<br />
Geogasiphoon(거가십훈) was written by Seo Nung(서능) in 1232 and used to teach his young relatives who lacked the knowledge of proper customs. This family precepts of ten items was written, based on the teachings from the Seven Chinese Classics. The first printed book of Geogasiphoon was Goryousijoongjeorhyoseonsaeng- seogong-geogasiphoon(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가십훈) published in or immediately after 1578. As a result of this study, the following facts were found: First, Geogasiphoon consists of ten virtues and moral standards that people should keep in mind for their life. Seo Nung’s bibliography for the Seven Chinese Classics includes The Analects of Confucius(논어), The Works of Mencius(맹자), The Doctrine of the Mean(중용), The Canon of History(서경), and The Book of Changes(주역). Second, Seo Nung presented his interpretation of Joojagarye(주자가례) and alternative proposals against the improper funeral rites of Jooja(주자). This record documents that Joojagarye was first originated in the Song Dynasty(송) and later introduced to Korea in the early 13th century during the Goryo Dynasty. Third, Seo Nung was a government official, a dutiful son, and a professor at Sunggyoongwan(성균관). Fourth, he was guarding his grandmother’s grave from 1232 to 1233, during which he wrote Geogasiphoon. Fifth, since there are some variances in texts of Goryousijoong-jeorhyoseonsaengseogong- geogasiphoon printed in or immediately after 1578, its later editions and the genealogical tables of his family, this first printed edition helps correct the errors found in the later documents.<br />
<br />
<br />
고려사(高麗史)는 오백년간 사서(史書)에 기록되고 정표된 십여인에 불과한 효우편(孝友篇)에 [[서능]] 선생을 포함하여 소개하고 있다.<br />
<br />
또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장성현 영이조(長城縣靈異條)에 [[서능]] 선생의 효행과 덕행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타와도(墮蛙圖)와 함께 효도하는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니 감응의 신묘함은 헤아리기 어렵도다 라고 적고 있다.<br />
<br />
[[서능]] 선생은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전해지기 전에 이미 유학(儒學)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행하신 선각자로서 모암(慕巖)에 초당(草堂)을 짓고 후학양성에 진력하시어 이 고장을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 되도록 그 초석을 놓고 다져 주셨다. [[서능]] 선생은 모친상을 당하여 진사(辰巳)년간 여막(廬幕)에 계셨는데 이 때 친척의 자제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게 된 바 그 중에 나이 어려 예절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대한 례법(禮法)을 취하여 1257년(고종44년)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지어 문인(門人)들은 물론 향민(鄕民)들에게도 인간이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하여 향풍(鄕風)을 순화시켰다.<br />
<br />
[[거가십훈]]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를 담은 교훈으로서<br />
<br />
부식삼강(扶植三綱:삼강을 바로세워라)<br />
<br />
돈서오륜(惇敍五倫:오륜을 돈독히 펴라)<br />
<br />
관이어하(寬以御下:아래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라)<br />
<br />
예이사상(禮以事上:윗사람은 예로서 섬겨라)<br />
<br />
임상치애(臨喪致哀:상을 당하거든 슬픔을 다하라)<br />
<br />
당제치경(當祭致敬:제사는 경건하게 모셔라)<br />
<br />
지심이공(持心以公:마음은 항상 공평하게 가져라)<br />
<br />
처사이의(處事以義:일 처리는 정의롭게 하라)<br />
<br />
교자이정(敎子以正:자식은 바르게 가르쳐라)<br />
<br />
대인이서(待人以恕:다른 사람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라)<br />
<br />
등 10덕목을 하나 하나 마음가짐과 행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밣히고 있는데 이를 우리나라 가훈의 효시(嚆矢)로 손꼽고 있다. 이 [[거가십훈]](居家十訓)을 통하여 우리는 [[서능]] 선생께서 대학자요 위대한 실천가이며 앞날을 내다보신 선각자임을 알수 있고 도덕적 자품과 대인의 품모를 짐작할 수 있다.<br />
<br />
이와 같은 [[서능]] 선생의 행적은 앞에 든 기록외 에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오산명인록(鰲山名人錄) 장성읍지(長城邑誌)등 문헌에 상세히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br />
<br />
[[서능]]([[서릉]])(徐稜)<br />
<br />
관직은 문하시중.고려 재상.<br />
<br />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 중시조.<br />
<br />
자는 대방(大方), 호는 송암(松庵). <br />
<br />
[[이천 서씨]] 시조의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의 10세손 .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br />
<br />
4세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左僕射).정 2품.부총리)<br />
<br />
5세 [[서존]](徐存 병부상서(兵部尙書).정 3품.장관)<br />
<br />
6세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br />
<br />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정 3품.장관)<br />
<br />
7세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br />
<br />
좌복야((左僕射).정 2품. 부총리)<br />
<br />
8세 [[서찬]](徐贊 백주지사(白州知事) 중현대부(中顯大夫).<br />
<br />
감문위 대호군(大護軍)(대장군). 종 3품.차관)<br />
<br />
9세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현재 군장성급). <br />
<br />
정당문학(政堂文學.) 종 2품 .부총리) <br />
<br />
<br />
<br />
형제는 1.[[서춘(고려)|서춘]](徐椿 부여파(扶餘 대종) .판내부시사.장관)<br />
<br />
2.[[서능]]([[서릉]])(徐稜 장성長城 파=이천서씨 절효공파.문하시중.국무총리)<br />
<br />
3.[[서박]](徐樸(부여扶餘 봉례공파)<br />
<br />
4.[[서적(고려)|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 장관.남양(당성)서파(南陽徐)<br />
<br />
5.[[서직]](徐稷(연산(連山)파)<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br />
아버지는 [[서희팔]](徐希八)이다. 고려 고종(高宗) 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장성서씨(長城徐氏)의 중시조(中始祖)이다. 그가 식읍(食邑)을 하사받고 장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아들 [[서준(고려)|서준]](徐俊)이 대장군(大將軍)을 지냈고 손자 [[서민경(고려)|서민경]](徐敏敬)은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내려갔다. 1245년(고려 고종 32)에 모친의 종기를 고치려고 약을 달이던 중,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겨울인데도 종기를 고칠 수 있는 청개구리가 나무 위에서 약탕기로 떨어져 모친의 병을 고쳤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유교적 생활 습관과 덕목을 규정한 가훈으로 〈가십훈(居家十訓)〉을 지었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다.<br />
<br />
1587년(선조 20) 장성현감 이계와 하곡 정운오 등이 그의 효행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가 강학하던 모암정사를모암서원(慕岩書院)으로 건립하여 배향하였다. 1638년(인조 16)에 하곡 정운오(1542∼1593)가 추배된 이후, 1658년(효종 9) 추담 김우급(1574∼1643), 1667년(현종 8) 양산 조영규(1535∼1592), 처사 조정로(1559∼1612) 부자, 1698년(숙종 24) 표정 최학령(1512∼?) 아곡 박수량(1491∼1554) 등이 각각 추배되어 모두 칠현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진 후로는,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에 있는 칠현유적지(七賢遺蹟址)에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이 유적지는 1984년에 전남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되었다.<br />
<br />
[참고문헌]<br />
<br />
大東韻府群玉<br />
三綱行實圖/徐稜感天<br />
徐稜得蛙<br />
高麗史 열전효우편<br />
思菴集/高麗侍中節孝徐公旌閭碑銘(朴淳, 한국문집총간 38)<br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徐稜旌閭碑(http://gsm.nricp.go.kr)<br />
朝鮮人名辭書<br />
海東人物志<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본관은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br />
<br />
<br />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정 2품.부총리) 10세손 . <br />
<br />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br />
<br />
4세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br />
<br />
5세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br />
<br />
6세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br />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br />
<br />
7세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br />
<br />
8세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br />
9세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br />
10세 [[서능]]([[서릉]])(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br />
<br />
11세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br />
<br />
12세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br />
13세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br />
14세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br />
15세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br />
16세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br />
<br />
17세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br />
<br />
18세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br />
<br />
19세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br />
<br />
20세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br />
<br />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br />
<br />
[[서관(조선)|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br />
<br />
21세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br />
<br />
22세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br />
<br />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br />
<br />
23세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br />
<br />
24세 [[서의손(조선)|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br />
<br />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br />
<br />
25세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br />
<br />
26세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br />
<br />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br />
<br />
<br />
<br />
== 가족 ==<br />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br />
<br />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br />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br />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br />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br />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br />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br />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br />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br />
******* 형: [[서춘(고려)|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br />
******* 본인: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br />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br />
******* 동생: [[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br />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br />
* 작은고고고조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br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린(고려)|서린]](徐嶙) (종2품 판대부사)<br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br />
<br />
== 가족 ==<br />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정 2품.부총리)<br />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br />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br />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br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br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br />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br />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br />
**********[[서능]]([[서릉]])(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br />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br />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br />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br />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br />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br />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br />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br />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br />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br />
********************[[서관(조선)|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br />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br />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br />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br />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br />
************************[[서의손(조선)|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br />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br />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br />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br />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br />
<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br />
<br />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 [[거가십훈]](居家十訓) ==<br />
「거가십훈」은 고려 고종 때 관료를 지냈던 [[서능]]이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 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만들어 가르쳤던 것이다. 모두 10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서 삼경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거가십훈」을 최초로 수록한 간본은 1578년 또는 직후에 간행된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가십훈」이다.<br />
<br />
==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br />
<br />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의 문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에 이르렀던 [[서능]](徐稜 ?~?)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의 터이다.<br />
<br />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의 용소(龍沼) 위쪽에 터가 있는데 현재 축대 일부만 남은 상태이다. 1919년 후손 서용호가 이 자리에 ‘절효 서선생 초당 유허비(節孝徐先生草堂遺墟碑)’를 세웠다.<br />
<br />
[[서능]]은 고려시대의 이름난 효자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기록된 10여 명 중 한 명이며,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에도 그의 효행 행적이 실려 있다. 또한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br />
<br />
== [[장성 서능 정려비]] (長城 徐稜 旌閭碑) ==<br />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서능]] 선생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br />
<br />
선생은 스무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의원이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때가 한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약탕기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약과 함께 짜서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종이 후에 이 사실을 듣고 표창을 하면서, 그의 효심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br />
<br />
정려각 안에 놓여 있는 이 비는 사암 박순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 글씨를 써 놓았다.<br />
<br />
== 전라도(장성) [[용전사]](龍田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br />
1587년(선조 20년) [[서릉]](徐稜)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br />
<br />
건립 당시의 명칭은 모암서원이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br />
1976년 [[서릉]]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건하면서 용전사로 변경되었다.<br />
<br />
서릉은 본관이 이천서씨(利川徐氏)로 절효공파((節孝公派) 중시조.<br />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모<br />
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였다.<br />
<br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226번지 용암마을에 위치한다.<br />
<br />
== 재각 [[용전재]](龍田齋) ==<br />
<br />
== [[모암서원]](慕巖書院) ==<br />
1587년에 서삼면 모암리에 세워진 [[모암서원]](慕巖書院)은 절효공 [[서능]](徐稜)을 모신 사당(祠堂)과 양편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앞에 큰 강당이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절효공의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벽에 걸어 높고 그 아래서 글을 읽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에 모암서원유허비(慕巖書院遺虛碑)와 칠현비(七賢碑)만 남아있다<br />
<br />
==[[화남사]](華南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br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현대에 [[서릉]](徐稜)·[[서식]](徐湜)·[[서숭로]](徐崇老)·[[서영우]](徐永佑)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우.<br />
<br />
==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br />
향토문화유산 제1호.<br />
<br />
전남 무안군 몽탄면 한재길 42-4.<br />
<br />
[[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D%8C%A8(%EC%A4%91%EA%B5%AD)서패(중국)2024-03-02T04:58:07Z<p>Jwseo21: </p>
<hr />
<div>[[서패(중국)|서패]](徐覇)<br />
<br />
== 가계 ==<br />
* 할아버지: [[서황(중국)|서황]](徐晃)<br />
** 아버지 : [[서개(중국)|서개]](徐蓋)<br />
*** 본인 : [[서패(중국)|서패]](徐覇)<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br />
<br />
<br />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br />
<br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br />
<br />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br />
<br />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br />
<br />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br />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br />
<br />
== [[숭렬전]](崇烈殿) ==<br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br />
<br />
== [[온조왕묘]](溫祚王廟) ==<br />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br />
<br />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br />
<br />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br />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br />
<br />
== [[삼충제]](三忠祭) ==<br />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br />
<br />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br />
<br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br />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br />
<br />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br />
<br />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br />
<br />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br />
<br />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A%B0%9C(%EC%A4%91%EA%B5%AD)서개(중국)2024-03-02T04:57:33Z<p>Jwseo21: </p>
<hr />
<div>[[서개(중국)|서개]](徐蓋)<br />
<br />
== 가계 ==<br />
* 아버지: [[서황(중국)|서황]](徐晃)<br />
** 본인 : [[서개(중국)|서개]](徐蓋)<br />
*** 아들 : [[서패(중국)|서패]](徐覇)<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br />
<br />
<br />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br />
<br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br />
<br />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br />
<br />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br />
<br />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br />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br />
<br />
== [[숭렬전]](崇烈殿) ==<br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br />
<br />
== [[온조왕묘]](溫祚王廟) ==<br />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br />
<br />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br />
<br />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br />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br />
<br />
== [[삼충제]](三忠祭) ==<br />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br />
<br />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br />
<br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br />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br />
<br />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br />
<br />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br />
<br />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br />
<br />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8B%B4%EC%84%B1(%EC%8A%B9%EB%A0%A4)담성(승려)2024-03-01T01:58:01Z<p>Jwseo21: </p>
<hr />
<div>담성(湛性)<br />
<br />
담신(湛汛)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때의 승려. 강소(江蘇) 단도(丹徒)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서(徐)씨며, 자는 약근(藥根) 또는 약암(藥庵)이다. 옹정(雍正) 연간에 강소 양주(揚州) 기원암(祇園庵)에서 지냈다. 시를 잘 지었는데, 왕사진(王士禛)의 시풍을 추종했다. 저서에 『쌍수헌시초(雙樹軒詩鈔)』가 있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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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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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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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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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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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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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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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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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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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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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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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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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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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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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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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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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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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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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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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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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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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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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5%AC%EB%A0%81%EB%8D%A9%EB%8D%A9_%EC%84%9C(%E5%BE%90)%EC%84%A0%EB%B9%84구렁덩덩 서(徐)선비2024-03-01T01:27:23Z<p>Jwseo21: </p>
<hr />
<div>뱀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내용을 다룬 한국의 전래민담.<br />
<br />
<br />
《구렁덩덩 신선비》 또는 《[[구렁덩덩 서(徐)선비]]》라고도 한다. 변신을 다룬 전래민담 중 가장 흔한 유형인 동물변신형 설화이다. 뱀에게 시집간 셋째 딸이 뱀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행복한 결혼생활이 깨지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을 주제로 한다.<br />
<br />
옛날 어느 할머니가 자식갖기를 원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커다란 뱀이었다. 이웃집 세 딸들이 아이를 보러 왔다가 두 언니는 뱀아들을 보자 기겁을 하고 물러섰으나, 셋째딸만은 뱀아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이윽고 뱀아들이 자라서 어머니에게 이웃집 딸과 혼인시켜 달라고 졸랐다. 이에 어머니가 나서서 청혼하자, 두 언니는 거절했고 셋째 딸은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첫날밤에 뱀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생긴 남자로 변신했는데, 이 때부터 낮에는 뱀으로 지내고 밤에는 사람으로 지내다가 얼마 후 완전히 뱀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뱀신랑은 셋째 딸에게 자신의 뱀허물을 주면서 절대로 남에게 보이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는 과거를 보러 떠났다. 그런데 셋째 딸의 부주의로 질투심 많은 두 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니들은 동생 몰래 뱀허물을 찾아내 불에 태워버렸다. 뱀신랑은 자신의 허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딸은 겨우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냈으나, 뱀신랑은 이미 지하세계에서 새로운 여자와 혼인해 살고 있었다. 셋째 딸은 남편이 자기를 알아보게 하려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뱀신랑의 새 아내와 물긷기, 호랑이눈썹 가져오기 등의 내기를 하여 이긴 뒤 다시 부부로 맺어져 행복하게 살았다.<br />
<br />
이 설화는 신비스런 내용 속에 애정과 질투, 갈등과 대립 등이 극적으로 전개되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쟁취해 행복을 누린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원형비평적 차원에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설화로 평가된다.<br />
<br />
극작가 오영진(吳泳鎭)은 《뱀신랑》 설화에서 소재를 취해 인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외모나 가문·권력 등에 매달리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의 희곡 《맹진사댁경사》을 집필하기도 했다.<br />
<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B1%80%EC%8B%A0%EB%9E%91뱀신랑2024-03-01T01:26:15Z<p>Jwseo21: </p>
<hr />
<div>뱀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내용을 다룬 한국의 전래민담.<br />
<br />
<br />
《구렁덩덩 신선비》 또는 《[[구렁덩덩 서(徐)선비]]》라고도 한다. 변신을 다룬 전래민담 중 가장 흔한 유형인 동물변신형 설화이다. 뱀에게 시집간 셋째 딸이 뱀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행복한 결혼생활이 깨지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을 주제로 한다.<br />
<br />
옛날 어느 할머니가 자식갖기를 원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커다란 뱀이었다. 이웃집 세 딸들이 아이를 보러 왔다가 두 언니는 뱀아들을 보자 기겁을 하고 물러섰으나, 셋째딸만은 뱀아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이윽고 뱀아들이 자라서 어머니에게 이웃집 딸과 혼인시켜 달라고 졸랐다. 이에 어머니가 나서서 청혼하자, 두 언니는 거절했고 셋째 딸은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첫날밤에 뱀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생긴 남자로 변신했는데, 이 때부터 낮에는 뱀으로 지내고 밤에는 사람으로 지내다가 얼마 후 완전히 뱀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뱀신랑은 셋째 딸에게 자신의 뱀허물을 주면서 절대로 남에게 보이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는 과거를 보러 떠났다. 그런데 셋째 딸의 부주의로 질투심 많은 두 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니들은 동생 몰래 뱀허물을 찾아내 불에 태워버렸다. 뱀신랑은 자신의 허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딸은 겨우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냈으나, 뱀신랑은 이미 지하세계에서 새로운 여자와 혼인해 살고 있었다. 셋째 딸은 남편이 자기를 알아보게 하려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뱀신랑의 새 아내와 물긷기, 호랑이눈썹 가져오기 등의 내기를 하여 이긴 뒤 다시 부부로 맺어져 행복하게 살았다.<br />
<br />
이 설화는 신비스런 내용 속에 애정과 질투, 갈등과 대립 등이 극적으로 전개되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쟁취해 행복을 누린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원형비평적 차원에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설화로 평가된다.<br />
<br />
극작가 오영진(吳泳鎭)은 《뱀신랑》 설화에서 소재를 취해 인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외모나 가문·권력 등에 매달리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의 희곡 《맹진사댁경사》을 집필하기도 했다.<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5%AC%EB%A0%81%EB%8D%A9%EB%8D%A9_%EC%8B%A0%EC%84%A0%EB%B9%84구렁덩덩 신선비2024-03-01T01:24:41Z<p>Jwseo21: </p>
<hr />
<div>구렁덩덩서(徐)선비, 뱀신랑<br />
<br />
설화의 하나. 뱀에게 시집간 딸이 금기를 어겨 생겨난 파탄을 잘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으로 신이담(神異譚) 가운데 변신담에 속한다. '구렁덩덩서(徐)선비' 또는 '뱀신랑'이라고도 한다.<br />
<br />
어떤 할머니가 자식을 기원하여 뱀아들을 낳았다. 이웃집의 세 딸이 아이를 구경하러 왔다가 뱀아들을 보고는 셋째딸만이 호감을 보였다. 뱀아들이 자라서 어머니에게 이웃집 딸과 혼인시켜 달라고 해서 어머니가 가서 청혼을 하니, 두 딸은 거절하고 셋째딸이 좋다 하여 혼인하였는데, 첫날밤에 뱀은 허물을 벗고 잘생긴 남자가 되었다.<br />
<br />
그 뒤 낮에는 뱀으로, 밤에는 사람으로 지내다가, 얼마 뒤 완전히 뱀 허물을 벗었다. 뱀신랑은 셋째딸에게 뱀허물을 주면서 남에게 절대로 보이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는 과거를 보러 떠났다. 그 사이에 셋째딸의 실수로 두 언니들이 뱀허물을 발견하고는 태워버렸다. 뱀신랑은 허물타는 냄새를 맡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br />
<br />
남편을 찾아나선 셋째딸은 밭 가는 사람, 빨래하는 여자나 까치한테까지 길을 물어 마침내 지하세계로 들어가 남편이 사는 곳을 찾아갔다. 뱀신랑은 새 여자와 혼인해 살고 있었는데, 셋째딸은 노래를 불러 남편이 자기를 알아보게 하였다. 셋째딸은 새 여자와 물 길어오기, 호랑이눈썹 가져오기 등의 내기를 하여 이기고, 드디어 뱀신랑과 다시 결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설화이다.<br />
<br />
이 설화는 세계 여러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각 편에 따라 할머니 대신 과부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아이를 낳기에 부적합한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허물을 벗고는 잘살게 되었다고 끝맺거나 막내딸이 지하세계로 찾아가는 부분이 생략되고, 대신 그냥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다시 만나게 되어 잘 살았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 변이형도 있다.<br />
<br />
또한 언니들의 시기심 때문에 뱀신랑이나 막내딸이 죽는다는 비극적 결말로 된 경우도 있다. 결국 완형담보다는 짧아진 변이형이 구전되는 사례가 더욱 많은데, 이는 이 설화가 소멸기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막내딸이 뱀신랑을 찾아가는 노정기나 시험과정은 매우 깊은 신화적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막내딸의 시련은 한국 서사문학의 저층에 뿌리박혀 있는 여성수난과도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설화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고난을 극복하고 온전한 행복을 향한 투지를 보여준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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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C%9E%AC%EA%B3%A8서재골2024-03-01T01:22:53Z<p>Jwseo21: </p>
<hr />
<div>말메골. 평안남도 평성시 하단리 두릉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말메가 많이 자라고 있다. 지난날 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던 골이라 하여 서재골이라고도 한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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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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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C%A0%81%EA%B3%A8서적골2024-03-01T01:21:49Z<p>Jwseo21: </p>
<hr />
<div>평안남도 대동군 팔청리 도림동 앞에 있는 골짜기. 서개동다리골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골 안에 어느 한 홀어머니가 서씨 성을 가진 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온종일 집안에 드러누워 도를 닦는답시고 눈을 감고 있다가는 선반 위의 엿만 축내고 있는 아들을 앉혀놓고 “너는 크거들랑 선비는커녕 도적이 되겠다”고 꾸짖었다. 아들은 어머님의 꾸중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그 길로 집을 떠났다.<br />
<br />
그 후 3년 동안 도를 닦고 나서 어엿한 장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찬물에 치맛자락을 적시며 순화강을 건너다니는 어머니를 염려하여 어머니가 건너다니는 물골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를 서개동다리라 하였다 한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A%B0%9C%EA%B3%A8서개골2024-03-01T01:20:06Z<p>Jwseo21: </p>
<hr />
<div>평양시 역포구역 대현동에 있는 골짜기. 지난날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의 사유지가 있었다. 서가골이라고도 한다.<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3%A0%EB%B4%89%ED%99%94%EC%83%81%EC%84%A0%EC%9A%94(%EC%A7%80%EB%A6%AC%EC%82%B0)고봉화상선요(지리산)2024-03-01T01:13:17Z<p>Jwseo21: </p>
<hr />
<div>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br />
<br />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불서이다. 이 불서는 송의 고봉화상(高峰和尙)이 남긴 『선요(禪要)』를 간행한 목판본 불서 1책이다. 이 덕기사본은 1358년에 원나라 운집정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입수하여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1399년에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판본은 보림사·규장각 등에만 보관되어 있는 희귀본이다. 법장사 도서는 표지가 개장되어 있고 권수의 서문이 빠져 있으나, 본문과 발문 부분은 가장 초기 판본으로 원간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br />
<br />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불서.<br />
<br />
<br />
『고봉화상선요』는 송나라 고봉화상 원묘(原妙, 1238~1295)가 남긴 어록과 서간 중에서 선(禪) 수행의 요체를 간추려서 해설한 선 수행의 지침서로, 그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참학거사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禪要)’라는 이름을 붙였다.<br />
<br />
고봉화상은 1238년(고종 25) 강소성(江蘇省) 소주부 오강현(吳江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서(徐)씨로 법명은 원묘(原妙)이고, 법호가 고봉(高峰)이다. 남송(南宋) 말기인 1238년(고종 25)부터 원대(元代) 초기인 1295년(충렬왕 21)까지 송원 교체기에 일생을 보낸 선승(禪僧)이다.<br />
<br />
그는 15세에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출가하여 1254년(고종 41)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1295년에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하였다.<br />
<br />
<br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법장사 도서는 1399년에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덕기사본으로 현전본 중 가장 오래된 고판본이다.<br />
<br />
이 책은 복장에서 수습한 이후 근래 오침으로 개장하고 표지에 ‘고봉화상선요’로 표제가 묵서되어 있으며, 전체 크기는 세로 22.8㎝, 가로 14.3㎝이다.<br />
<br />
일반적으로 권수에는 1354년(공민왕 3)에 쓴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있으나, 성룡사본에는 빠져 있는 상태이다.<br />
<br />
권말에는 중국 광선사 주지 진원(眞圓) 등이 쓴 발문이 있으며, 발문 끝부분에 “지리산덕기사개판 건문원년기묘팔월일중간(智異山德奇寺開板 建文元年己卯八月日重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수록되어 있어 1399년에 지리산의 덕기사(德奇寺)에서 중간(重刊)된 사실을 알 수 있다.<br />
<br />
간기 아래에 간선도인 ‘지봉(志峯)’과 각수(刻手) ‘신지(信智)’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이들이 중심적으로 개판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이듬해 덕기암에서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을 간행한 사실도 보이고 있다.<br />
<br />
그리고 본문과 발문의 맨 끝에 1358년(공민왕 7)에 원나라 집운정사(集雲精舍)에서 중간한 중국 원판의 원간기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br />
<br />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과 좌우쌍변이 혼재되어 있으며, 반곽(半郭)을 기준으로 크기는 세로 17㎝, 가로 13㎝이며, 행자수는 10행 18자이다.<br />
<br />
판심부(版心部)에는 위쪽에 흑어미(黑魚尾)가 아래로 하향하고 그 아래에 판심제 ‘요(要)’와 장차가 표시되어 있다.<br />
<br />
본판은 모두 2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앞쪽의 12장은 무계판(無界版)이고 13장 이후는 유계판(有界版)으로 혼재되어 있다.<br />
<br />
이러한 판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덕기사판은 이전에 원판(元板)을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별도로 보판(補板)하여 중간한 사실을 알 수 있다.<br />
<br />
현재 덕기사본과 동일본이 전라도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사천왕상(四天王像)에서 수습한 복장본을 비롯하여 규장각과 국립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br />
<br />
<br />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덕기사판이 중국에서 1358년에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개판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원나라에서 전래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br />
<br />
조선 전기에 고승 벽송 지엄(智嚴)이 이 책을 매우 중시하여 수행인은 반드시 읽고 장애를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br />
<br />
이후 청허(淸虛)의 4세 법손인 설제(雪霽)가 사집과에 편입시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교 전문강원의 교재로 채택 학습되어 왔기 때문에 전국 사찰에서 30여 차례 간행되었다.<br />
<br />
현재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1399년 지리산 덕기사에서 개판된 것을 비롯하여 1731년(영조 7) 영변 보현사(普賢寺) 판본 등 30여 종이 현전하고 있다.<br />
<br />
<br />
선요 내용은 개당보설(開堂普說) 1편, 시중(示衆) 14편, 결제시중(結制示衆) 2편, 해제시중(解制示衆) 3편, 입양시중(立陽示衆) 1편, 제야소참(除夜少參) 2편, 만참(晩參) 1편, 직옹(直翁) · 신옹(信翁) · 이통(理通)에게 내린 법어 3편, 통앙산화상의사서(通仰山和尙疑嗣書) 1편, 실중삼관(室中三關) 1편 등 모두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br />
<br />
이 중 고봉의 첫 법문인 개당보설에서는 자기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의정(疑情: 의심)을 크게 가져서 도를 깨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br />
<br />
그리고 제7편 시중에서는 마음을 밝히려면 일체의 선악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제26편 시중에서는 참선할 때 밝고 밝지 않음을 논하지 말고 큰 분발심과 큰 의심으로 일관해서 수행하여야 함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제29편 실중삼관은 고봉의 3대 가풍을 소개하고 있다.<br />
<br />
이 지정본은 조선시대 간행된 30여 종 가운데 조선 초기 1399년 지리산 덕기사에서 개판한 판본이다.<br />
<br />
덕기사본은 1358년에 원나라 운집정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입수하여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것이다.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은 보림사와 규장각 등에 보관되어 있다.<br />
<br />
비록 법장사 도서는 표지가 개장되어 있고 권수의 서문이 빠져 있으나, 본문과 발문 부분은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br />
<br />
『고봉화상선요』의 가장 초기 판본으로 원간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2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br />
<br />
<br />
고봉(高峰)<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원나라 때의 승려.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이름은 원묘(原妙)며,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이다. 15살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했고, 17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살 때부터 천태(天台)의 교상(敎相)을 공부하다가 20살 때 선(禪)을 배워, 3년을 기한하고 정진했지만 도를 깨닫지 못했다. 24살 때 삼탑사(三塔寺)에 있으면서 3월 16일 밤 꿈에 문득 전에 들었던 ‘만법귀일화(萬法歸一話)’ 즉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화두(話頭)가 나타나자, 그 때부터 의심이 일어 60일간을 그 화두에만 몰두했다. 뒷날 같이 자던 도우(道友)가 잠결에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했다. 저서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참선하는 이의 길잡이로 유명하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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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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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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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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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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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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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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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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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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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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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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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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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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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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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D%83%9C%EC%8B%9C서태시2024-03-01T01:10:04Z<p>Jwseo21: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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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서태시]](徐泰時)<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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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에는 4대 명원이 있다. 졸정원(拙政園)·유원(留園)·창랑정(滄浪亭)·사자림(獅子林) 등이 그것이다. 유원은 여문(閭門) 밖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명대 가정(嘉靖) 연간에 [[서태시]](徐泰時)가 소유한 동원(東園)의 터다. 유원의 명칭은 '천지간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長留天地間)' 정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원의 면적이 약 2만 평방미터로, 그 규모가 크고, 중앙의 연못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서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br />
<br />
입구를 들어서면 사당(祠堂)-문청(門廳)-대청(大廳)의 순으로 지나가게 된다. 주택의 규모가 크기 때문인지 진입하는 공간마다 중정이 배치되어 있어 찾아오는 이를 잠시 머물게 한다. 바닥 포장의 문양이나 수목의 배치 형태가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마치 포켓파크(Pocket Park), 즉 소공원(小公園)을 보는 것 같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대 도시의 고층건물 사이에 겨우 숨쉴 공간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포켓파크는 비록 그 규모가 작지만 도시민들에게 더할 나이 없는 휴식의 공간이요, 삶의 쉼터가 된다.<br />
<br />
이곳 소주에 있는 고대광실(高臺廣室)과도 같은 대저택에 있는 포켓파크는 어떤 의미로 만들어졌을까?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방문객들을 잠시나마 멈추고 숨 돌리게 하려는 배려일까? 아니면 앞으로 펼쳐질 더 넓은 정원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상의 묘미를 더욱 배가시키기 위한 솜씨일런가?<br />
<br />
이곳을 지나 장랑으로 들어서다 보면 장방형 동문 위에 있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장유천지간(長留天地間)"이라는 그 유명한 현판이다. 과연 '세상에 둘도 없는 별유천지인가?'에 대한 대답은 보는 이에 달려있을 것이다.<br />
<br />
장랑을 따라 가다보면 넓게 펼쳐진 연못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함벽산방(涵碧山房)과 명슬루(明膝樓)가 평대(平臺)를 끼고 배치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곡계루(曲溪樓)와 오봉선관(五峰仙館)이 펼쳐져 있다. 명슬루는 함벽산방의 동쪽에 딸린 2층 누각이다. 지붕의 모습이 날렵하고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곡선을 이룬다. 중국 건축 특유의 지붕선이다. 2층 누각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누창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오른쪽에 있는 곡계루로 연결된 장랑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형태의 동문을 만나게 된다. 어떤 동문에는 태호석이 연못을 배경으로 마치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려는 듯이 단정히 서 있다.<br />
<br />
연못의 중앙에는 소봉래(小蓬萊)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불로장수에 대한 염원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중심으로 변형·발전되어 온 도교(道敎)는 중국인들의 심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관념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와 만물의 현상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과 같은 삼신산(三神山)은 신선이 살고 있는 신성한 산으로 존중 받아왔다. 그러한 관념을 이곳 유원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연못의 가운데에 만든 소봉래(小蓬萊)! 그곳을 가기 위해 이곳 원주(園主)는 서씨를 멀리 동해의 해뜨는 나라로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구곡교를 건너기만 하면 되니까.<br />
<br />
동쪽으로 더 가다보면 긴 장랑이 있는 원취각(遠翠閣)이 나온다. 이곳에는 석가산이 자리 잡고 있어 함벽산방에서 바라보면 우뚝 솟은 산으로 보이는 곳이다. 이곳 원취각 주변에는 돌로 된 식재대(植栽臺)가 하나 있다. 명대(明代)의 유물로 전해지는 것으로, 네 모서리를 자세히 보면 기이한 부조(浮彫)를 발견할 수 있다. 두 마리 사자가 가운데 구슬을 놓고 서로 희롱하는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다.<br />
<br />
쌍용쟁주(雙龍爭珠)의 모습이 아니라 쌍사쟁주(雙獅爭珠)의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다. 식재대는 나무를 심어두는 곳을 말한다. 영어로 말하면 플랜터박스(Planter Box),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에도 정성을 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사자는 신성하면서도 친근한 민속 동물 중의 하나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사자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곳 유원도 마찬가지였다.<br />
<br />
원취각을 지나면 오봉선관(五峰仙館)이 나오고 읍봉헌(揖峰軒)과 임천기석지관(林泉嗜碩之館)이 있는 동원(東園)이다. 임천기석지관 앞에는 관운봉(冠雲峯)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곳은 명대 서(徐)씨가 소유한 동원의 흔적으로, 이곳의 수석과 누각들은 모두 '운(雲)'자를 넣어 이름 지었다. 관운봉이 있는 방지(方池)를 관운소(冠雲沼)라 했고, 이를 보다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운루(冠雲樓)를 맞은편에 세웠다. 여기서 북원(北園)으로 진입하면 우일촌(又一村)이라 새겨진 동문을 만난다. 이 문을 지나면 분재원(盆裁園)에 이르게 된다.<br />
<br />
분재원에는 관운봉과 관운소를 모티브로 한 커다란 분경(盆景)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분경은 분 위에 올린 경치가 아니라, 땅 바닥에 올린 커다란 분경인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쪽 부분의 정원에 올라서면 산림 풍경이 남쪽에 전개된다. 북쪽 부분은 전원 경색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쪽 부분은 산림 풍광이 자연스러운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곳이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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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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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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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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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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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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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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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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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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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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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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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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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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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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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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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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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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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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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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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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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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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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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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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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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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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9C%A0%EC%9B%90(%EC%86%8C%EC%A3%BC)유원(소주)2024-03-01T01:08:23Z<p>Jwseo21: </p>
<hr />
<div>소주에는 4대 명원이 있다. 졸정원(拙政園)·유원(留園)·창랑정(滄浪亭)·사자림(獅子林) 등이 그것이다. 유원은 여문(閭門) 밖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명대 가정(嘉靖) 연간에 [[서태시]](徐泰時)가 소유한 동원(東園)의 터다. 유원의 명칭은 '천지간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長留天地間)' 정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원의 면적이 약 2만 평방미터로, 그 규모가 크고, 중앙의 연못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서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br />
<br />
입구를 들어서면 사당(祠堂)-문청(門廳)-대청(大廳)의 순으로 지나가게 된다. 주택의 규모가 크기 때문인지 진입하는 공간마다 중정이 배치되어 있어 찾아오는 이를 잠시 머물게 한다. 바닥 포장의 문양이나 수목의 배치 형태가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마치 포켓파크(Pocket Park), 즉 소공원(小公園)을 보는 것 같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대 도시의 고층건물 사이에 겨우 숨쉴 공간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포켓파크는 비록 그 규모가 작지만 도시민들에게 더할 나이 없는 휴식의 공간이요, 삶의 쉼터가 된다.<br />
<br />
이곳 소주에 있는 고대광실(高臺廣室)과도 같은 대저택에 있는 포켓파크는 어떤 의미로 만들어졌을까?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방문객들을 잠시나마 멈추고 숨 돌리게 하려는 배려일까? 아니면 앞으로 펼쳐질 더 넓은 정원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상의 묘미를 더욱 배가시키기 위한 솜씨일런가?<br />
<br />
이곳을 지나 장랑으로 들어서다 보면 장방형 동문 위에 있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장유천지간(長留天地間)"이라는 그 유명한 현판이다. 과연 '세상에 둘도 없는 별유천지인가?'에 대한 대답은 보는 이에 달려있을 것이다.<br />
<br />
장랑을 따라 가다보면 넓게 펼쳐진 연못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함벽산방(涵碧山房)과 명슬루(明膝樓)가 평대(平臺)를 끼고 배치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곡계루(曲溪樓)와 오봉선관(五峰仙館)이 펼쳐져 있다. 명슬루는 함벽산방의 동쪽에 딸린 2층 누각이다. 지붕의 모습이 날렵하고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곡선을 이룬다. 중국 건축 특유의 지붕선이다. 2층 누각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누창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오른쪽에 있는 곡계루로 연결된 장랑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형태의 동문을 만나게 된다. 어떤 동문에는 태호석이 연못을 배경으로 마치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려는 듯이 단정히 서 있다.<br />
<br />
연못의 중앙에는 소봉래(小蓬萊)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불로장수에 대한 염원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중심으로 변형·발전되어 온 도교(道敎)는 중국인들의 심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관념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와 만물의 현상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과 같은 삼신산(三神山)은 신선이 살고 있는 신성한 산으로 존중 받아왔다. 그러한 관념을 이곳 유원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연못의 가운데에 만든 소봉래(小蓬萊)! 그곳을 가기 위해 이곳 원주(園主)는 서씨를 멀리 동해의 해뜨는 나라로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구곡교를 건너기만 하면 되니까.<br />
<br />
동쪽으로 더 가다보면 긴 장랑이 있는 원취각(遠翠閣)이 나온다. 이곳에는 석가산이 자리 잡고 있어 함벽산방에서 바라보면 우뚝 솟은 산으로 보이는 곳이다. 이곳 원취각 주변에는 돌로 된 식재대(植栽臺)가 하나 있다. 명대(明代)의 유물로 전해지는 것으로, 네 모서리를 자세히 보면 기이한 부조(浮彫)를 발견할 수 있다. 두 마리 사자가 가운데 구슬을 놓고 서로 희롱하는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다.<br />
<br />
쌍용쟁주(雙龍爭珠)의 모습이 아니라 쌍사쟁주(雙獅爭珠)의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다. 식재대는 나무를 심어두는 곳을 말한다. 영어로 말하면 플랜터박스(Planter Box),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에도 정성을 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사자는 신성하면서도 친근한 민속 동물 중의 하나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사자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곳 유원도 마찬가지였다.<br />
<br />
원취각을 지나면 오봉선관(五峰仙館)이 나오고 읍봉헌(揖峰軒)과 임천기석지관(林泉嗜碩之館)이 있는 동원(東園)이다. 임천기석지관 앞에는 관운봉(冠雲峯)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곳은 명대 서(徐)씨가 소유한 동원의 흔적으로, 이곳의 수석과 누각들은 모두 '운(雲)'자를 넣어 이름 지었다. 관운봉이 있는 방지(方池)를 관운소(冠雲沼)라 했고, 이를 보다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운루(冠雲樓)를 맞은편에 세웠다. 여기서 북원(北園)으로 진입하면 우일촌(又一村)이라 새겨진 동문을 만난다. 이 문을 지나면 분재원(盆裁園)에 이르게 된다.<br />
<br />
분재원에는 관운봉과 관운소를 모티브로 한 커다란 분경(盆景)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분경은 분 위에 올린 경치가 아니라, 땅 바닥에 올린 커다란 분경인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쪽 부분의 정원에 올라서면 산림 풍경이 남쪽에 전개된다. 북쪽 부분은 전원 경색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쪽 부분은 산림 풍광이 자연스러운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곳이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br />
==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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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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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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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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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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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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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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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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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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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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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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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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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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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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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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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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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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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B6%95%EC%9B%90축원2024-03-01T01:04:24Z<p>Jwseo21: </p>
<hr />
<div>축원(竺源)<br />
<br />
출생 - 사망 1862년(철종 13) ~ 1926년<br />
<br />
1862(철종 13)∼1926. 조선 말기의 승려.<br />
<br />
성은 서씨(徐氏). 호는 진하(震河). 12세에 금강산신계사(神溪寺)로 출가하여 상운화상(常雲和尙)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하였고, 서호화상(西灝和尙)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탄종(坦鍾)의 법맥을 이었다.<br />
<br />
그 뒤 유형(有炯)과 해주(海珠)에게 불경을 배워 이름있는 강사가 되었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천암율사(天庵律師)에게 다시 구족계를 받아 율사가 되었다. 만년에는 법주사에 머무르면서 교학을 강의하였으며, 1926년 제주도에 갔다가 아라교당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이 있는데, 백파(白坡)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을 반박한 글이다.<br />
<br />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br />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은 조선 말과 근대기의 승려 진하 축원(震河竺源)이 백파 긍선(白坡亘璇)과 초의 의순(草衣意恂) 이후의 선 논쟁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불교서이다. 『선문재정록』은 기존의 선 논쟁에 나타난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선 논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책이다.<br />
<br />
조선 말과 근대기, 승려 진하 축원이 백파 긍선과 초의 의순 이후의 선 논쟁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불교서.<br />
<br />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쓴 진하 축원(震河竺源, 1861~1926)은 강원도 고성의 서(徐)씨 집안에서 태어났다.<br />
<br />
축원은 12살 때 금강산 신계사(神溪寺)로 출가하였으며, 대응 탄종(大應坦鐘)의 법을 이었다. 그는 참선과 간경에 전념하였고, 1886년 개강하여 17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다. 1892년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法住寺)의 부교정(副敎正)이 되었으며, 이후 주지까지 역임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절강성 영파(寧波)의 천동사(天童寺)에서 기선 경안(寄禪敬案)의 방명계회(放冥戒會)에 참가하였다. 법주사에서 교학을 강의하다가 1926년 제주도에 간 지 3일 만에 포교당인 아라교당(我羅敎堂)에서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br />
<br />
축원의 제자로는 근대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인 박한영(朴漢永, 1870~1948),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등 다수가 있다.<br />
<br />
『선문재정록』은 법주사에서 개판(開板)된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에다 도시오[江田俊雄]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필사본도 있다.<br />
<br />
『선문재정록』의 내용은 백파 긍선(1767~1852)이 『선문수경(禪文手鏡)』에서 선(禪)을 조사선(祖師禪) · 여래선(如來禪) · 의리선(義理禪)으로 구분하고, 이를 임제삼구(臨濟三句) 등에 배대한 것에 반박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긍선은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格外禪)에 두고, 의리선은 문자의 습기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로 보아 격외선의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축원은 긍선이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통칭하고 의리선을 그 아래에 두면서 교승(敎乘)이라 설명한 것은 원돈교(圓頓敎)를 선에 배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 보았다. 이어 축원은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은 모두 교(敎)가 아닌 ‘교외(敎外)’이며, 의리선이 격(格)이고 다른 두 선은 ‘격외(格外)’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또 의리선을 별도의 선으로 세웠다면 격외선도 별도의 선으로 세워 모두 4종의 선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br />
<br />
축원은 백파 긍선의 문손인 설두 봉기(雪竇奉琪, 1824~1889)가 쓴 『선원소류(禪源溯流)』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하였다. '화엄(華嚴)의 이사무애(理事無礙)와 사사무애(事事無碍)를 각각 여래선과 조사선에 배당한다면 화엄은 양자를 모두 갖추는 교외의 법이 되는데, 어째서 삼처전심(三處傳心)만을 선의 별전(別傳)의 기준으로 삼는지 의문이다'라고 한 것이다.<br />
<br />
한편 축원은초의 의순(1786~1866)이 쓴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우담 우행(優曇禹行, 1822~1881)이 쓴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에 대해서도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선 논쟁이 불필요한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저서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br />
<br />
축원은 분류된 선들이 이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며 일심(一心)을 선의 근원으로 내세웠다. 이처럼 축원은 『선문재정록』을 통해 선 논쟁에서 드러난 모순과 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축원이 앞서의 논점들을 종합한 뒤 그 위에서 새로운 차원의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선 논쟁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후학들에게 선과 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던 것이다.<br />
<br />
19세기 불교계에서는 선을 분류하고 각 선의 우열을 가리고 특징을 논하는 '선 논쟁'이 펼쳐졌다. 먼저 백파 긍선은 선을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의 3종으로 차등화하여 구분했고, 그에 대해 초의 의순은 사람이 가진 능력의 차이를 두고 선을 나누고 수직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우담 우행은 의순이 주장한 조사선=격외선, 여래선=의리선의 구도를 지지했고, 설두 봉기는 조사인 긍선의 선종 분류를 옹호하였다. 이에 대해 진하 축원은 『선문재정록』을 통해 선 논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선 분류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고, 분류된 선들의 본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축원의 『선문재정록』에 이르러 19세기 불교계의 선 논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선 논쟁은 선과 교가 함께 어우러져 형성되어 온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선과 교 양자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하는 선과 교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3%A0%EB%B4%89%ED%99%94%EC%83%81%EC%84%A0%EC%9A%94(%EB%B6%80%EC%82%B0)고봉화상선요(부산)2024-03-01T00:59:54Z<p>Jwseo21: </p>
<hr />
<div>『고봉 화상 선요』(高峯和尙禪要)<br />
<br />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br />
<br />
<br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승려 고봉(高峰)의 법문집.<br />
<br />
고봉[1238~1295]은 중국 소주(蘇州) 출생으로 속성은 서(徐), 이름은 원묘(原妙)이다. 스스로 고봉이라고 불렀다. 15세에 밀인사에서 출가해 16세 때 구족계를 받고, 18세에 천태 교학을 공부했다. 20세 때 선을 배우기 위해 항주(杭州)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간 고봉은 단교 화상 밑에서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수행하였다.<br />
<br />
3년 기한은 다가왔지만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던 고봉은 1260년 북간탑에 있던 설암조흠 선사를 찾아가 깨달음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1271년 임안 용수사에서 잠자던 도반이 떨어뜨린 목침 소리를 듣고 활연(豁然) 대오(大悟)하였다. 1279년 남송이 멸망하면서 고봉은 천목산 서봉 사자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고봉은 사관(死關)을 세운 뒤 산문 출입을 삼가고 정진에만 몰두하였다. 사관에서 15년간 수행하다가 1295년 12월 세수 58세 법랍(法臘) 43세로 입적하였다.<br />
<br />
『고봉 화상 선요(高峯和尙禪要)』는 제자인 영중(永中)과 홍교조(洪喬祖)가 고봉 선사의 어록에서 요점만을 추려서 수행자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고자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 『고봉 화상 선요』가 전래된 때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간본으로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본(德奇寺本)이 가장 앞선 것으로 볼 때, 여말선초로 추정된다.<br />
<br />
부산광역시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4종의 목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은 1573년(선조 6)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월정사(月精寺)에서 판각된 목판본으로, 1책으로 된 선장본(線裝本)이다. 크기는 24.5×16.1㎝이며, 반곽(半郭)은 19.0×12.5㎝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행자 수는 8행 18자이다.<br />
<br />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는 참학 문인들이 엮은 호주쌍계암법어(湖州雙髻庵法語)·항주서천목산사자선사법어(杭州西天目山師子禪寺法語) 등 수편의 법어가 실려 있고, 하권에는 염고(拈古)·송고(頌古)·법어(法語)·보유(補遺)·게송(偈頌)이 있으며 권말(卷末)에 행장(行狀) 2종과 탑명(塔銘)이 실려 있다.<br />
<br />
원묘는 『고봉 화상 선요』에서 화두(話頭)를 참구(懺咎)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나 경계해야 될 사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 화두참구에 필요한 대신심(大信心)·대의정(大疑情)[의심]·대분지(大憤志)의 3요소, 화두참구 과정에 만나는 각종 병통, 향상사(向上事) 등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br />
<br />
『고봉 화상 선요』는 고려 말 이후 조선 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벽송당(碧松堂) 지엄(智嚴)[1464~1534]이 이 책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휴정(休靜)의 4세 법손인 설제(雪霽)가 강원(講院)의 중등 과정인 사집과(四集科)에 편입시킨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계종 강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주석서로는 연담(蓮潭) 유일(有一)의 『선요사기(禪要私記)』 1권, 백파(白坡) 긍선(亘璇)의 『선요기(禪要記)』 1권이 있다.<br />
<br />
<br />
고봉(高峰)<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원나라 때의 승려.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이름은 원묘(原妙)며,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이다. 15살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했고, 17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살 때부터 천태(天台)의 교상(敎相)을 공부하다가 20살 때 선(禪)을 배워, 3년을 기한하고 정진했지만 도를 깨닫지 못했다. 24살 때 삼탑사(三塔寺)에 있으면서 3월 16일 밤 꿈에 문득 전에 들었던 ‘만법귀일화(萬法歸一話)’ 즉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화두(話頭)가 나타나자, 그 때부터 의심이 일어 60일간을 그 화두에만 몰두했다. 뒷날 같이 자던 도우(道友)가 잠결에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했다. 저서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참선하는 이의 길잡이로 유명하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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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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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br />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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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br />
<br />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3%A0%EB%B4%89%ED%99%94%EC%83%81%EC%84%A0%EC%9A%94(%EC%9A%B8%EC%82%B0)고봉화상선요(울산)2024-03-01T00:56:38Z<p>Jwseo21: </p>
<hr />
<div>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br />
<br />
지역: 울산광역시 동구 등대로 80-42[일산동 913]<br />
<br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등용사에 소장되어 있는 남송의 승려 고봉의 법문집.<br />
<br />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의 저자인 고봉(高峰)[1238~1295]은 13세기 송말원초의 선사로서 남송 건희2년 무술년[1238]에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서(徐), 이름은 원묘(原妙)이다. 스스로 ‘고봉’이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고불(古佛)’이라고 불렀다. 15세에 교종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20세에 선종으로 출가 행로를 바꾸었다. 잠자던 도반이 떨어뜨린 목침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닫고, 천목산 서봉 사자암으로 거처를 옮겨 사관(死關)을 세운 뒤 산문 출입을 삼가고 정진에만 몰두하였다. 사관에서 15년간 수행하다가 1295년 12월 세수 58세 법랍(法臘) 43세로 입적하였다.<br />
<br />
1294년 쓴 서문에 따르면, 고봉의 제자인 지정(持正)이 고봉의 법어를 듣고 기록한 것을, 재가 제자인 직옹(直翁) 홍교조(洪喬祖)가 요점만을 간추려 수행자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고자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 고봉화상선요가 전래된 때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것으로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본(德奇寺本)이 가장 앞선 것으로 볼 때, 여말선초로 추정된다. 고봉화상선요는 『고봉화상어록(高峰和尙語錄)』의 일부이다. 2016년 2월 4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br />
<br />
강원의 교재로 채택되어 사용했던 만큼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등용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표제가 ‘선요(禪要)’ 인 85면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범어사에는 단권으로서 사주단변에 계선이 있으며, 1면 8행 1행의 자수가 18자인 선장본이 소장되어 있다.<br />
<br />
「개당보설(開堂普說)」에서 「실중삼관(室中三關)」까지 고봉의 설법[普說], 훈시[示衆], 편지[書信]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봉은 고봉화상선요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 화두 참구에 필요한 대신심(大信心)·대의정(大疑情)[의심]·대분지(大憤志)[분발심]의 3요소, 화두 참구 과정에서 만나는 각종 병통, 향상사(向上事)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봉화상선요는 조계종 강원(講院)의 중등 과정인 사집(四集)[書狀·都書·禪要·節要]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많이 간행되었고, 오늘날에도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br />
<br />
고려 말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고봉화상선요는 구절마다 구결(口訣)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구결 연구에 도움이 된다.<br />
<br />
고봉(高峰)<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원나라 때의 승려.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이름은 원묘(原妙)며,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이다. 15살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했고, 17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살 때부터 천태(天台)의 교상(敎相)을 공부하다가 20살 때 선(禪)을 배워, 3년을 기한하고 정진했지만 도를 깨닫지 못했다. 24살 때 삼탑사(三塔寺)에 있으면서 3월 16일 밤 꿈에 문득 전에 들었던 ‘만법귀일화(萬法歸一話)’ 즉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화두(話頭)가 나타나자, 그 때부터 의심이 일어 60일간을 그 화두에만 몰두했다. 뒷날 같이 자던 도우(道友)가 잠결에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했다. 저서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참선하는 이의 길잡이로 유명하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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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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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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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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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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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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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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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br />
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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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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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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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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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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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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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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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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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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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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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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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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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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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A7%80%EC%9B%90(%EC%8A%B9%EB%A0%A4)지원(승려)2024-03-01T00:53:59Z<p>Jwseo21: </p>
<hr />
<div>지원(智圓)<br />
<br />
출생 - 사망 976년 ~ 1022년<br />
<br />
송나라 때의 승려. 천태종(天台宗) 산외파(山外派)의 대사(大師)다. 전당(錢塘, 杭州)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자는 무외(無外)며, 호는 잠부(潛夫) 또는 중용자(中庸子)다. 8살 때 전당의 용흥사(龍興寺)에서 출가했다. 처음에는 유학(儒學)을 익혀 시문(詩文)에 능했는데, 나중에 봉선사(奉先寺) 청원(靑原)에 의지해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청원이 입적한 뒤 세속을 떠나 경론(經論)을 연구하면서 의관(義觀)을 찾는 한편 동문 경소(慶昭), 오은(晤恩) 등과 함께 산외파 학설을 규명했고, 산가파(山家派)의 대표 사명지례(四明知禮)와 논변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례의 설이 천태(天台)의 정통으로 인정받고 산외파는 배척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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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서호(西湖) 고산(孤山) 마노파(瑪瑙坡)에 은거하면서 요양했는데, 따라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이로부터 저술에 전념하여 『한거편(閑居編)』 60권(51권 현존)과 『금광명경현의표징기(金光明經玄義表徵記)』 1권 등을 편찬했다. 『금광명경현의표징기』에서 사난(四難)을 들어 『금광명현의광본(金光明玄義廣本)』의 관심석(觀心釋)을 부인하면서 산가파에 대항했다. 또 주·공·순·맹(周孔荀孟)과 양웅(揚雄), 왕통(王通)의 책에도 정통해 항상 유학(儒學)으로 수신(修身)하고, 석교(釋敎)로 몸을 다스린다고 말하면서 유·석·도(儒釋道) 삼교(三敎)의 통합을 꾀했다. 건흥(乾興) 원년 2월 제문(祭文)과 만시(挽詩)를 남기고 편안하게 입적했다. 세수(世壽) 47세다. 유명(遺命)에 따라 도기(陶器)에 유해를 거두어 머물던 바위에 안장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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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반야경소(文殊般若經疏)』와 『유교경소(遺敎經疏)』,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서응경소(瑞應經疏)』, 『사십이장경주(四十二章經注)』, 『불사의법문경소(不思議法門經疏)』, 『무량의경소(無量義經疏)』, 『관보현행법경소(觀普賢行法經疏)』,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수능엄경소(首楞嚴經疏)』 등 10종을 써서 도중(徒衆)을 가르쳤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로 인해 십본소주(十本疏主)라 불렀다. 또 고산에 은거하여 고산지원(孤山智圓)으로도 불렸다.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 칙명으로 법혜대사(法慧大師)란 시호가 내려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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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저서에 『열반경소삼덕지귀(涅槃經疏三德指歸)』 20권과 『유마경략소수유기(維摩經略疏垂裕記)』 10권, 『수능엄경소곡향초(首楞嚴經疏谷響鈔)』 5권, 『금광명경문구색은기(金光明經文句索隱記)』 1권, 『열반현의발원기요(涅槃玄義發源機要)』 1권, 『십불이문정의(十不二門正義)』 1권 등 무릇 170여 권에 이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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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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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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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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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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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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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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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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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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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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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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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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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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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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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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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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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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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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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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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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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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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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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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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B2%9C%EC%84%9D%EA%B3%A8_%EC%84%A4%ED%99%94천석골 설화2024-03-01T00:51:29Z<p>Jwseo21: </p>
<hr />
<div>「천석골 설화」-千石-說話-<br />
<br />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br />
<br />
천석골(千石谷) 및 우마(牛馬)고개의 지명유래 전설.<br />
<br />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에 천석골[千石谷]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는 매년 천석의 수확을 거두는 서(徐)씨 성의 장자(長者)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서천석(徐千石)이라고 불렀다. 서천석은 부를 기반으로 온갖 호강을 누렸지만, 끊임없이 드나드는 손님들 때문에 늘 시달려야 했다.<br />
<br />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승이 서천석의 집에 들러 시주를 요구했다. 서천석은 한 눈에 노승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손님들의 발길을 끊을 수 있는 비법을 전해 달라며 막무가내로 간청했다.<br />
<br />
노승은, “부자로 살자면 번거로운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며 서천석의 간청을 만류했다. 그러나 서천석은 요지부동했다. 결국 노승은 ‘어떤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서천석의 다짐을 받고, ‘집 뒤편에 있는 능선을 끊고 길을 왼쪽으로 돌리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천기를 누설했다.<br />
<br />
서천석은 기뻐라 하며 석공에게 능선을 끊고 길을 돌리도록 했다. 그런데 때마침 이 곳을 지나던 지관이 있었다. 지관은 황급히 서천석을 찾아, “이 능선은 우마요혈(牛馬腰穴)의 형국이어서 재물을 가득 실은 마소의 정기가 이 집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인데, 이 혈을 끊으면 곧 환란이 닥칠 것입니다.”며 경계하였다. 그러나 서천석은 곧이 듣지 않고 오히려 석공을 독려하였다.<br />
<br />
그런데 능선을 끊는 과정에서 석공이 암반을 깨뜨리자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쳤다. 그리고 깨어진 암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결국 서천석의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근 삼 년만에 몰락했다.<br />
<br />
비록 예전에 누렸던 서천석의 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직도 ‘서천석이 살던 마을’이라고 해서 이 곳을 ‘천석골’이라고 부르고 있고, 끊어진 능선을 ‘우마고개’라고 부르고 있다.<br />
<br />
풍수는 천지간의 기가 특정 공간의 지맥을 통하여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 짓는다고 여기는 민간신앙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 의식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이 작품은 ‘천석골’ 및 ‘우마고개’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인데, 전체적인 흐름이 풍수와 관계한다.<br />
<br />
여기서 부의 원천으로서 우마요혈의 명당은 서천석, 즉 가진 자의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결국 파괴되고 만다. 이른바 '자연과 인간의 부조화'에 대한 경계이면서, 동시에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다.<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br />
<br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br />
<br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br />
<br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br />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9D%B4%EA%B2%BD(%EB%82%A8%EB%8B%B9)이경(남당)2024-03-01T00:48:49Z<p>Jwseo21: </p>
<hr />
<div>이경(李璟)<br />
<br />
중국 5대10국 시대 남당의 제2대 황제(재위 943~961).<br />
<br />
출생-사망 916 ~ 961<br />
<br />
국적/왕조 중국 남당<br />
<br />
재위기간 943〜961년<br />
<br />
시대 5대10국 시대<br />
<br />
별칭 원종(元宗), 명도숭덕문선효황제(明道崇徳文宣孝皇帝)<br />
<br />
활동분야 정치<br />
<br />
자는 백옥(伯玉)이며, 원래의 성은 서(徐), 이름은 경통(景通)이다. 남당(南唐)이 건설된 뒤에 당나라 종실의 성인 ‘이(李)’ 성을 사용하고, 이름도 경(璟)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후주(後周)에 복속한 뒤에는 곽위(郭威)의 고조부인 곽경(郭璟)의 이름을 피해 ‘경(景)’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묘호는 원종(元宗), 시호는 명도숭덕문선효황제(明道崇徳文宣孝皇帝)이다. 재위 기간에 보대(保大)ㆍ중흥(中興)ㆍ교태(交泰)라는 연호를 사용했다.<br />
<br />
이경은 916년에 남당의 제1대 황제 열조(烈祖) 이변(李昪)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원경황후(元敬皇后) 송씨(宋氏)이다. 광목황후(光穆皇后) 종씨(鍾氏) 등의 비빈들과의 사이에서 문헌태자(文獻太子) 이홍기(李弘冀), 후주(後主) 이욱(李煜) 등의 자녀를 낳았다.<br />
<br />
937년 아버지 이변이 남당을 세우자 오왕(吳王)으로 봉해졌다가, 뒤에 다시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943년(승원 7) 3월 30일(음력 2월 22일) 아버지 이변이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 그는 아버지 때와는 달리 군사행동을 자주 벌였는데, 945년에 민(閩)을 침공해 멸망시켰으며, 951년에는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새로 7개의 주(州)를 점령해 남당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하지만 잇따른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고, 풍연사(馮延巳)·풍연로(馮延魯)와 같은 총신들이 전횡을 하면서 정치도 부패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br />
<br />
이런 상황에서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시영(柴榮)이 956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잇달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각지의 장수들이 잇달아 투항하면서 남당은 양쯔강[揚子江] 수로를 지키는 요충지들이 잇달아 함락되었고, 수도인 금릉부(金陵府)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이경은 958년 후주에 화의를 청했다. 4개 주 60개 현을 후주에 넘겨주고, 남당이 후주에 군신의 관계로 복속한다는 조건으로 두 나라는 화의를 맺었다. 그 뒤 이경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남당국주(南唐國主)’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남당은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br />
<br />
이경은 961년 8월 12일(음력 6월 28일)에 죽었고, 여섯째아들인 이욱(李煜)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한편, 이경은 서예가와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아, 마찬가지로 시인으로 유명한 아들 이욱과 함께 ‘남당이주(南唐二主)’라고 불리기도 한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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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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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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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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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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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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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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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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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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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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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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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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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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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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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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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3%A0%EB%B4%89%ED%99%94%EC%83%81%EC%84%A0%EC%9A%94고봉화상선요2024-03-01T00:45:13Z<p>Jwseo21: </p>
<hr />
<div>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br />
<br />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영평사길 124[산학리 441]<br />
<br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산학리 영평사에 소장된 승려 고봉의 법문집.<br />
<br />
고봉화상선요는 고려시대부터 교육 교재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사집과(四集科)[승려의 수행과 교육을 위한 강원(講院) 과정]의 세 번째 과목으로 채택되어 교재로 사용하였다.<br />
<br />
고봉(高峰)[1238~1295]은 원나라의 승려이다. 속성은 서(徐), 이름은 원묘(原妙)이다. 쑤저우[蘇州] 우장[吳江]에서 태어났다.<br />
<br />
1539년(중종 34) 봄 도인(道人) 영지(靈祉)가 선요(禪要)[불교 사집(四集)의 하나로, 중국 승려 고봉이 선법(禪法)의 중요한 뜻을 적은 책]를 널리 전하여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법보시(法普施)하고자 신흥사(神興寺)에 전하여져 오던 책을 다시 간행하였다. 지리산의 남대암(南臺庵)에서 간행한 한문본이다.<br />
<br />
선장(線裝)[인쇄된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책장의 가운데를 접고 책의 등 부분을 끈으로 튼튼하게 묶는 책 장정(裝幀) 방법.]으로 전체 크기는 25.5×16.8㎝이다.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문장의 행(行)과 행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없다. 반곽(半郭)은 18.3×12.9㎝이고, 항자수는 8항 18자이다. 위아래로 흑구(黑口)가 있다. 권수제는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판심제는 ‘요(要)’이다.<br />
<br />
개당보설(開堂普說) 1편, 시중(示衆) 14편, 결제시중(結制示衆) 2편, 해제시중(解制示衆) 3편, 입양시중(立陽示衆) 1편, 제야소참(除夜小參) 2편, 만참(晩參) 1편, 법어(法語) 3편, 통앙산화상의사서(通仰山和尙疑嗣書) 1편, 실중삼관(室中三關) 1편 등 모두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말에 책을 만들 때 시주(施主)한 사람과 각수(刻手)로 참여한 사람이 쓰여 있다.<br />
<br />
간행연도가 확인된 현존하는 판본 30종 중 1399년 덕기사(德奇寺)본, 1501년 봉서사(鳳棲寺)본, 1525년 심원암(深源菴)본, 1528년 용문사(龍門寺)본, 1537년 표훈사(表訓寺)본에 이어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16세기 초·중반의 목판 인쇄 문화와 불교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2014년 6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br />
<br />
<br />
고봉(高峰)<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원나라 때의 승려.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이름은 원묘(原妙)며,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이다. 15살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했고, 17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살 때부터 천태(天台)의 교상(敎相)을 공부하다가 20살 때 선(禪)을 배워, 3년을 기한하고 정진했지만 도를 깨닫지 못했다. 24살 때 삼탑사(三塔寺)에 있으면서 3월 16일 밤 꿈에 문득 전에 들었던 ‘만법귀일화(萬法歸一話)’ 즉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화두(話頭)가 나타나자, 그 때부터 의심이 일어 60일간을 그 화두에만 몰두했다. 뒷날 같이 자던 도우(道友)가 잠결에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했다. 저서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참선하는 이의 길잡이로 유명하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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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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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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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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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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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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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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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br />
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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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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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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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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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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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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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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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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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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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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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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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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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B3%B4%EA%B2%BD(%EC%8A%B9%EB%A0%A4)보경(승려)2024-03-01T00:41:54Z<p>Jwseo21: </p>
<hr />
<div>보경(寶瓊)<br />
<br />
출생 - 사망 504년 ~ 584년<br />
<br />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때의 승려. 보경(寶璚)으로도 불린다. 동완(東莞, 山東 沂水)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나중에 난을 피해 비릉곡아(毘陵曲阿, 江蘇 丹陽)에서 살았다. 젊은 나이로 출가하여 사문(沙門) 법통(法通)을 사사하고, 도기(道器)로 인정을 받았다. 15살이 지난 뒤 광택사(光宅寺) 법운(法雲)에게 성실종의(成實宗義)를 수업받고, 그 후 남간선사(南澗仙師)의 거처로 와서 비담학(毘曇學)을 연구했다. 선사가 그의 사기(私記)를 읽고 크게 격상(激賞)하면서 제자들에게 전사(傳寫)하도록 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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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계(具足戒)를 받던 해에 강경(講經)하는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기술할 수 있었고, 5년 뒤에는 법주(法主)의 직책을 맡아 선사와 함께 항주(杭州)와 형주(衡州) 등지에서 널리 교화했다. 일찍이 양무제(梁武帝)의 부름을 받아 수광전(壽光殿)에 들어가 담론하기도 했다. 그 후 귀향하여 건안사(建安寺)에서 강설했는데, 흰 호랑이가 강석에 와서 들으니 경이롭게 여기며 스님을 ‘백경(白瓊)’이라 불렀다. 간자(簡子) 주홍정(周弘正)의 요청으로 다시 입경(入京)하여 『성실론(成實論)』 등을 강설했는데, 이때도 여러 가지 신령한 이적을 보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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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제(陳武帝)와 문제(文帝) 때 경읍대승정(京邑大僧正)이 되어 묵은 폐단을 개혁하는 데 힘쓰면서 승려들이 스스로 검숙(檢肅)하도록 했다.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들도 사신을 보내 스님의 도상(圖像)을 구하면서 멀리서 예경(禮敬)을 보였다. 진(陳)나라 지덕(至德) 2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81세다. 종산(鍾山)의 남쪽에 장례했다. 저서도 대단히 많아 『성실현의(成實玄義)』 20권과 『성실문소(成實文疏)』 16권, 『열반소(涅槃疏)』 17권, 『대품소(大品疏)』 13권, 『대승의(大乘義)』 10권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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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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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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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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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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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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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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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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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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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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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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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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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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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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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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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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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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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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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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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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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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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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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9D%BC%EC%8B%A0%EC%9E%AC일신재2024-03-01T00:39:04Z<p>Jwseo21: </p>
<hr />
<div>일신재(一新齋)<br />
<br />
[[용담재]](龍潭齋) <br />
<br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134-1번지에 있는 재실.<br />
<br />
용담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효종 1년(1605)경에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 대지는 그 당시 서사진이 강학소를 만들어 교육에 전념하던 곳이라 한다.<br />
<br />
상량문에 보이는 ‘숭정기원후오무자(崇禎紀元後五戊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연대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터를 매각하고 1976년 1km쯤 떨어진 북쪽 종중산에 그대로 옯긴 것이다. 웃면을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 전면에는 원주를, 나머지는 모두 네모 기둥을 세웠다.<br />
<br />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맨좌측에 2칸의 우물마루 대청을 두고 그 우측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 온돌방의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놓인 제형판대공이 마루 도리를 받는 3량가로, 장혀와 상인방 사이에는 소로로 수장하였다. 용담재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견실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대체로 양호한 조선후기 재실이다.<br />
<br />
<br />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br />
<br />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도호부 출신의 의병장.<br />
<br />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진보(進甫), 호는 이재(怡齋). 증조할아버지는 예빈시 직장(禮賓寺 直長)을 지낸 [[서필(조선)|서필]](徐弼), 증조할머니는 숙부인 대구 배씨(大邱裵氏)이며,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基), 할머니는 찰방(察訪)을 지낸 박사림(朴士林)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함]](徐涵), 어머니는 부장(部長)을 지낸 하한수(河漢壽)의 딸 숙부인(淑夫人)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민림(閔霖)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서사진의 후손 중 일부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신당리와 대구광역시 하빈면 무등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br />
<br />
[[서사진]](徐思進)[1568~1645]은 1568년[선조 1] 대구 도호부 산격동(山格洞)[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대구 도호부에는 읍내와 3개 속현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는데, 서사진은 읍내 6개리 중 북산리(北山里) 유사(有司)를 맡았다.<br />
<br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br />
<br />
서사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용담재(龍潭齋)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해 있다.<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br />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 가족 ==<br />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br />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br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br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br />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br />
*********** 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br />
************ 고조할아버지 : [[서맹원(조선)|서맹원]](徐孟源 충순위)<br />
************* 증조할아버지 : [[서필(조선)|서필]](徐弼 예빈시 직장)<br />
************** 할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br />
*************** 큰아버지 : [[서형]](徐泂 진사)<br />
**************** 사촌(양자.[[서흡]]의 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학자)<br />
**************** 큰아버지 :[[서흡]](徐洽 전교)<br />
**************** 큰아버지 : [[서식(조선)|서식]](徐湜 의병장)<br />
***************** 사촌: [[서사선]](徐思選 학자)<br />
**************** 아버지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br />
***************** 형: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br />
****************** 조카: [[서변]](徐忭 학자)<br />
***************** 본인: [[서사진]](徐思進 의병장 이재(怡齋)) <br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br />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br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br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br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82%A8%EA%B3%84%EC%A0%95%EC%82%AC남계정사2024-03-01T00:36:44Z<p>Jwseo21: </p>
<hr />
<div>남계정사(南溪精舍)<br />
<br />
[[체화당]](棣華堂)<br />
<br />
체화당(棣華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공을 세운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아들 삼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체화’는 『시경(詩經)』「상체(常棣)」에 출전을 둔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br />
<br />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9[산격동 913]<br />
<br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창건된 재실.<br />
<br />
[[체화당]](棣華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공을 세운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아들 삼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체화’는 『시경(詩經)』「상체(常棣)」에 출전을 둔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br />
<br />
[[서사진]]의 첫째 아들 서신(徐愼)[1585~1641]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증직(贈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받았다. 둘째 아들 서율(徐慄)[1606~1687] 은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셋째 아들 서업(徐)[1612~1676]도 손처눌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대구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였다.<br />
<br />
[[체화당]]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913에 있다. 연암산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어서 연암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달성서씨의 집성촌이다. [[달성서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서당 [[용담재]](龍潭齋)와 [[일신재]](一新齋) 등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골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br />
<br />
[[체화당]]이 있는 곳에는 원래 300년 정도 내력이 있는 달성서씨의 문중 건물과 서율의 [[남계정사]](南溪精舍) 건물이 있었다. 1959년에 달성서씨의 문중 건물과 남계정사를 통합하여 새롭게 ‘체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중건하였다.<br />
<br />
체화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악문(花萼門)’이라는 솟을대문이 있다.<br />
<br />
[[체화당]]은 [[달성서씨]]의 재실로서 [[달성서씨]] 문중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br />
<br />
[[체화당]]은 16세기~17세기에 [[달성서씨]] 문중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음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br />
<br />
<br />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br />
<br />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도호부 출신의 의병장.<br />
<br />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진보(進甫), 호는 이재(怡齋). 증조할아버지는 예빈시 직장(禮賓寺 直長)을 지낸 [[서필(조선)|서필]](徐弼), 증조할머니는 숙부인 대구 배씨(大邱裵氏)이며,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基), 할머니는 찰방(察訪)을 지낸 박사림(朴士林)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함]](徐涵), 어머니는 부장(部長)을 지낸 하한수(河漢壽)의 딸 숙부인(淑夫人)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민림(閔霖)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서사진의 후손 중 일부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신당리와 대구광역시 하빈면 무등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br />
<br />
[[서사진]](徐思進)[1568~1645]은 1568년[선조 1] 대구 도호부 산격동(山格洞)[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대구 도호부에는 읍내와 3개 속현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는데, 서사진은 읍내 6개리 중 북산리(北山里) 유사(有司)를 맡았다.<br />
<br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br />
<br />
서사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용담재(龍潭齋)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해 있다.<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br />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 가족 ==<br />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br />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br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br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br />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br />
*********** 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br />
************ 고조할아버지 : [[서맹원(조선)|서맹원]](徐孟源 충순위)<br />
************* 증조할아버지 : [[서필(조선)|서필]](徐弼 예빈시 직장)<br />
************** 할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br />
*************** 큰아버지 : [[서형]](徐泂 진사)<br />
**************** 사촌(양자.[[서흡]]의 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학자)<br />
**************** 큰아버지 :[[서흡]](徐洽 전교)<br />
**************** 큰아버지 : [[서식(조선)|서식]](徐湜 의병장)<br />
***************** 사촌: [[서사선]](徐思選 학자)<br />
**************** 아버지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br />
***************** 형: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br />
****************** 조카: [[서변]](徐忭 학자)<br />
***************** 본인: [[서사진]](徐思進 의병장 이재(怡齋)) <br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br />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br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br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 [[용담재]](龍潭齋) ==<br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134-1번지에 있는 재실.<br />
<br />
용담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효종 1년(1605)경에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 대지는 그 당시 서사진이 강학소를 만들어 교육에 전념하던 곳이라 한다.<br />
<br />
상량문에 보이는 ‘숭정기원후오무자(崇禎紀元後五戊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연대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터를 매각하고 1976년 1km쯤 떨어진 북쪽 종중산에 그대로 옯긴 것이다. 웃면을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 전면에는 원주를, 나머지는 모두 네모 기둥을 세웠다.<br />
<br />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맨좌측에 2칸의 우물마루 대청을 두고 그 우측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 온돌방의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놓인 제형판대공이 마루 도리를 받는 3량가로, 장혀와 상인방 사이에는 소로로 수장하였다. 용담재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견실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대체로 양호한 조선후기 재실이다.<br />
<br />
== [[체화당]](棣華堂) ==<br />
체화당(棣華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공을 세운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아들 삼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체화’는 『시경(詩經)』「상체(常棣)」에 출전을 둔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br />
<br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br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B2%B4%ED%99%94%EB%8B%B9체화당2024-03-01T00:36:12Z<p>Jwseo21: </p>
<hr />
<div>[[체화당]](棣華堂)<br />
<br />
체화당(棣華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공을 세운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아들 삼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체화’는 『시경(詩經)』「상체(常棣)」에 출전을 둔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br />
<br />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9[산격동 913]<br />
<br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창건된 재실.<br />
<br />
[[체화당]](棣華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공을 세운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아들 삼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체화’는 『시경(詩經)』「상체(常棣)」에 출전을 둔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br />
<br />
[[서사진]]의 첫째 아들 서신(徐愼)[1585~1641]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증직(贈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받았다. 둘째 아들 서율(徐慄)[1606~1687] 은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셋째 아들 서업(徐)[1612~1676]도 손처눌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대구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였다.<br />
<br />
[[체화당]]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913에 있다. 연암산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어서 연암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달성서씨의 집성촌이다. [[달성서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서당 [[용담재]](龍潭齋)와 [[일신재]](一新齋) 등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골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br />
<br />
[[체화당]]이 있는 곳에는 원래 300년 정도 내력이 있는 달성서씨의 문중 건물과 서율의 [[남계정사]](南溪精舍) 건물이 있었다. 1959년에 달성서씨의 문중 건물과 남계정사를 통합하여 새롭게 ‘체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중건하였다.<br />
<br />
체화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악문(花萼門)’이라는 솟을대문이 있다.<br />
<br />
[[체화당]]은 [[달성서씨]]의 재실로서 [[달성서씨]] 문중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br />
<br />
[[체화당]]은 16세기~17세기에 [[달성서씨]] 문중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음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br />
<br />
<br />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br />
<br />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도호부 출신의 의병장.<br />
<br />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진보(進甫), 호는 이재(怡齋). 증조할아버지는 예빈시 직장(禮賓寺 直長)을 지낸 [[서필(조선)|서필]](徐弼), 증조할머니는 숙부인 대구 배씨(大邱裵氏)이며,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基), 할머니는 찰방(察訪)을 지낸 박사림(朴士林)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함]](徐涵), 어머니는 부장(部長)을 지낸 하한수(河漢壽)의 딸 숙부인(淑夫人)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민림(閔霖)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서사진의 후손 중 일부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신당리와 대구광역시 하빈면 무등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br />
<br />
[[서사진]](徐思進)[1568~1645]은 1568년[선조 1] 대구 도호부 산격동(山格洞)[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대구 도호부에는 읍내와 3개 속현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는데, 서사진은 읍내 6개리 중 북산리(北山里) 유사(有司)를 맡았다.<br />
<br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br />
<br />
서사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용담재(龍潭齋)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해 있다.<br />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br />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 가족 ==<br />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br />
<br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br />
<br />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br />
<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br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br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br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br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br />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br />
*********** 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br />
************ 고조할아버지 : [[서맹원(조선)|서맹원]](徐孟源 충순위)<br />
************* 증조할아버지 : [[서필(조선)|서필]](徐弼 예빈시 직장)<br />
************** 할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br />
*************** 큰아버지 : [[서형]](徐泂 진사)<br />
**************** 사촌(양자.[[서흡]]의 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학자)<br />
**************** 큰아버지 :[[서흡]](徐洽 전교)<br />
**************** 큰아버지 : [[서식(조선)|서식]](徐湜 의병장)<br />
***************** 사촌: [[서사선]](徐思選 학자)<br />
**************** 아버지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br />
***************** 형: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br />
****************** 조카: [[서변]](徐忭 학자)<br />
***************** 본인: [[서사진]](徐思進 의병장 이재(怡齋)) <br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br />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br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br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br />
<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 [[용담재]](龍潭齋) ==<br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134-1번지에 있는 재실.<br />
<br />
용담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효종 1년(1605)경에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 대지는 그 당시 서사진이 강학소를 만들어 교육에 전념하던 곳이라 한다.<br />
<br />
상량문에 보이는 ‘숭정기원후오무자(崇禎紀元後五戊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연대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터를 매각하고 1976년 1km쯤 떨어진 북쪽 종중산에 그대로 옯긴 것이다. 웃면을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 전면에는 원주를, 나머지는 모두 네모 기둥을 세웠다.<br />
<br />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맨좌측에 2칸의 우물마루 대청을 두고 그 우측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 온돌방의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놓인 제형판대공이 마루 도리를 받는 3량가로, 장혀와 상인방 사이에는 소로로 수장하였다. 용담재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견실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대체로 양호한 조선후기 재실이다.<br />
<br />
== [[체화당]](棣華堂) ==<br />
체화당(棣華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공을 세운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아들 삼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체화’는 『시경(詩經)』「상체(常棣)」에 출전을 둔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br />
<br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br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B2%94%EC%84%A0(%EC%8A%B9%EB%A0%A4)범선(승려)2024-03-01T00:29:49Z<p>Jwseo21: </p>
<hr />
<div>범선(梵僊)<br />
<br />
출생 - 사망 1292년 ~ 1348년<br />
<br />
원나라 때 임제종(臨濟宗) 승려. 명주(明州, 浙江) 상산(象山)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자는 축선(竺僊)이며, 호는 내래선자(來來禪子) 또는 적승당(寂勝幢), 사귀수(思歸叟) 등을 썼다. 8살 때 오흥(吳興, 浙江) 자복원(資福院)에 들어가 별원류(別源流)의 시동(侍童)이 되었다. 18살 때 영산(靈山)의 서운은(瑞雲隱)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얼마 뒤 여러 명찰을 다니는 한편 회기원희(晦機元熙)와 운외운수(雲外雲岫), 원수행단(元叟行端), 중봉명본(中峰明本) 등을 참알(參謁)했다. 나중에 고림청무(古林淸茂)의 법사(法嗣)가 되었다.<br />
<br />
천력(天曆) 2년(1329) 경산(徑山)의 명극초준(明極楚俊)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북조고시(北條高時)와 족리존씨(足利尊氏)의 존숭(崇信)을 받았다. 다음 해 겸창(鎌倉)에 이르러 건장사(建長寺) 제일좌(座)에 임명되고, 정묘사(淨妙寺)와 정지사(淨智寺) 주지를 지냈다. 건무(建武) 2년(1335) 무량사(無量寺)의 개산(之開山) 제1조(祖)가 되었다. 영응(曆應) 4년(1341) 경도(京都) 남선사(南禪寺)에 주지로 있을 때 조정에서 이 사찰의 사격(寺格)을 천하제일로 삼으려 했다. 이어 능가원(楞伽院)과 진여사(眞如寺), 건장사 주지를 지냈다. 정평(正平) 3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57세고, 법랍(法臘) 39세다. 법을 이은 제자로 대년법연(大年法延)과 춘정해수(椿庭海壽) 등이 있고, 이 법계(法系)를 축선파(竺僊派, 또는 古林派 梅林門徒)라 하며, 일본선종(日本禪宗) 24류(流)의 하나가 되었다.<br />
<br />
저서에 『추선화상어록(竺僊和尙語錄)』과 『천주집(天柱集)』, 『내래선자가(來來禪子歌)』, 『내래선자동도집(來來禪子東渡集)』, 『고림화상행실(古林和尙行實)』 각 1권이 있다.<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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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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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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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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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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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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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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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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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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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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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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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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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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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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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B2%95%ED%97%8C(%EC%8A%B9%EB%A0%A4)법헌(승려)2024-03-01T00:28:00Z<p>Jwseo21: </p>
<hr />
<div>법헌(法獻)<br />
<br />
출생 - 사망 423년 ~ 497년<br />
<br />
남조 때의 역경승(譯經僧). 서해(西海) 연수(延水)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양주(梁州)에서 출가하여 유송(劉宋) 때 건강(建康) 상정림사(上定林寺)에서 지냈다. 경률(經律)에 정통해 사람들이 절을 수리해 주었다. 원휘(元徽) 3년(475) 서쪽으로 파촉(巴蜀)을 여행하다가 우전(于闐)에 닿아 총령(葱嶺)을 넘으려고 했지만, 잔도(棧道)가 끊어져 돌아왔다. 불아(佛牙) 1매와 사리 15과, 『관세음참회제업주경(觀世音懺悔除罪呪經)』 호본(胡本) 및 구자국(龜茲國) 금추섭상(金鎚鍱像)을 얻고, 또 고창군(高昌郡)에서 『묘법연화경제파달다품(妙法蓮華經提婆達多品)』을 얻어 경성(京城)으로 돌아오니 나이 55살이었다.<br />
<br />
처음에 스님의 업적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중에 문선왕(文宣王)이 꿈을 꾸고 난 뒤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율행(律行)이 바르고 근면해서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했기 때문에 낭야왕(瑯耶王) 왕숙(王肅)과 왕융(王融), 오국(吳國) 장융(張融)과 장권(張綣), 사문(沙門) 혜령(慧令), 지장(智藏) 등이 모두 몸을 맡기고 훈계를 받들었다. 남제(南齊) 영명(永明) 8년(490) 와관사(瓦官寺) 선방법의(禪房法意)와 함께 『관세음참회제죄주경(觀世音懺悔除罪呪經)』 1권을 번역하고, 나중에 『묘법연화경제파달다품』도 번역했다. 영명(永明) 중에 황제가 장간사(長干寺) 원창과 함께 승주(僧主)로 임명해 남북 양안(兩岸)을 맡도록 했다.<br />
<br />
저서에 『서역행기(西域行記)』가 있다. 승우(僧祐)가 존칭하여 선사헌정(先師獻正)이라 불렀다. 『양고승전(梁高僧傳)』 권13에 따르면 건무(建武) 말년에 입적했고, 세수(世壽) 75세라 한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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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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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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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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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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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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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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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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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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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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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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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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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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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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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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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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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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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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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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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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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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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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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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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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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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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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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A7%80%EC%A3%BC(%EC%8A%B9%EB%A0%A4)지주(승려)2024-03-01T00:25:49Z<p>Jwseo21: </p>
<hr />
<div>지주(智周)<br />
<br />
출생 - 사망 668년 ~ 723년<br />
<br />
당나라 때의 승려. 사주(泗州, 江蘇)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19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23살 때 혜소(慧沼) 문하(門下)에 들어가 법상(法相)을 깊이 공부하고 자은종(慈恩宗)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나중에 복양(濮陽) 보성사(報城寺)에 머물면서 법상종(法相宗)의 교의(敎義)를 전하고, 항상 저술에 전념했다. 인명학(因明學)에 대해서도 보충한 것이 많아 세칭 복양대사(濮陽大師)로 불렸다. 무후(武后) 장안(長安) 3년(703) 신라(新羅)의 스님 지봉(智鳳)과 지란(智鸞), 지웅(智雄)이 당나라에 들어와 스님에게 법상종지(法相宗旨)를 배웠다. 개원(開元) 5년(717) 일승(日僧) 현방(玄昉)이 당나라에 들어와 역시 문하에서 공부했다.<br />
<br />
규기(窺基)와 혜소(慧沼)의 뒤를 이어 법상종 제3조(祖)가 되고, 평생 마음을 서방(西方)에 두었다. 전하는 말로 일찍이 서방정토원(西方淨土院) 안에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음(觀音), 세지(勢至) 등 52보살(菩薩)의 상을 모셨는데, 영서(靈瑞)를 감득했다고 한다. 개원 21년 6월 입적했고, 세수(世壽) 56세다. 저서에 『성유식론연비(成唯識論演秘)』 7권과 『범망보살계본소(梵網菩薩戒本疏)』 5권, 『법화경현찬섭석(法華經玄贊攝釋)』 4권, 『대승법원의림장결택기(大乘法苑義林章決擇記)』 4권, 『인명입정이론소전기(因明入正理論疏前記)』와 『후기(後記)』 각2권, 『성유식론요의등기(成唯識論了義燈記)』 2권, 『유가론소(瑜伽論疏)』 40권 등이 있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br />
==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br />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br />
기자조선의 영역<br />
<br />
<br />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D%98%84%EC%97%84(%EC%8A%B9%EB%A0%A4)현엄(승려)2024-03-01T00:23:57Z<p>Jwseo21: </p>
<hr />
<div>현엄(玄儼)<br />
<br />
출생 - 사망 675년 ~ 742년<br />
<br />
당나라 때의 승려. 제기(諸曁, 浙江)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12살 때 부춘(富春)의 승휘(僧暉)에게 배웠다. 증성(證聖) 원년(695) 현류사(懸溜寺)에서 출가하여 광주도안(光州道岸)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나중에 장안(長安)에 나와 숭복만의율사(崇福滿意律師)와 융제율사(融濟律師)를 만나 인가를 얻었다. 이때부터 경사(京師)에 이름을 날렸고, 안국사(安國寺)와 수기사(授記寺)의 대덕(大德)을 맡았다. 얼마 뒤 강좌(江左)로 돌아와 『사분율(四分律)』을 널리 알리고, 『행사초보기편(行事鈔輔篇記)』 10권과 『갈마술장(羯磨述章)』 3편, 『금강의소(金剛義疏)』 7권을 저술했다. 월주(越州) 법화사(法華寺)에 있으면서 30여 년 동안 연좌(宴坐)한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br />
<br />
개원(開元) 24년(736) 현종(玄宗)이 직접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주를 달고 천하의 반포하여 선강(宣講)하려 할 때 원언중(元彦仲)의 요청을 받아 다시 밖으로 나와 선강(宣講)했다. 당시 서교(徐嶠), 서안정(徐安貞), 강희선(康希銑), 하지장(賀知章), 왕필(王弼) 등과 같은 인사들이 도우(道友)로 스님을 공경했다. 천보(天寶) 원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68세다. 제자에 신옹(神邕)과 담준(曇俊), 숭묵(崇黙), 숭효(崇曉), 유담(唯湛), 도소(道昭) 등이 있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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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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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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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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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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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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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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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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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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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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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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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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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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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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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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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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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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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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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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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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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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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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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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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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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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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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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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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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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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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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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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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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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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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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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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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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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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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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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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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D%86%B5%EC%9A%B4(%EC%8A%B9%EB%A0%A4)통운(승려)2024-03-01T00:22:14Z<p>Jwseo21: </p>
<hr />
<div>통운(通雲)<br />
<br />
출생 - 사망 1594년 ~ 1663년<br />
<br />
명나라 때 임제종(臨濟宗) 승려. 강소(江蘇)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자는 석기(石奇)며 세칭(世稱) 석기통운선사(石奇通雲禪師)다. 어릴 때부터 질병이 많아 남광사(南廣寺)에서 출가하여 내외 학문에 정통했다. 우연히 강소(江蘇) 가정(嘉定) 호국사(護國寺) 벽에 써진 중봉명본(中峰明本)의 게송(偈頌)을 읽고 느낀 바 있어 현성사(顯聖寺)의 담연원징(湛然圓澄)을 뵈었고, 이어 밀운원오(密雲圓悟)를 찾아 여러 차례 깨달은 바를 보였지만 모두 원오의 질책만 들었다. 어느 날 입실하여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원오가 몽둥이를 들어 후려치니 그 때 비로소 대오(大悟)하고 의문에서 벗어났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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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崇禎) 14년(1641) 절강(浙江) 영취선사(靈鷲禪寺)에 머물면서 법화(法化)를 크게 떨쳤다. 천태(天台) 경성암(景星巖) 정거선사(淨居禪寺)와 절강(浙江) 설두산(雪竇山) 자성사(資聖寺), 보윤선원(普潤禪院), 향산선사(香山禪寺), 절강(浙江) 영가(永嘉) 두타산(頭陀山)의 밀인선사(密印禪寺) 등에 머물렀다. 순치(順治) 17년(1660) 남광(南廣)으로 돌아왔다. 강희(康熙) 2년 동쪽으로 설두산에 가려다가 얼마 뒤 병을 얻어 입적했다. 세수(世壽)는 70세다. 저서에 『설두석기선사어록(雪竇石奇禪師語錄)』 15권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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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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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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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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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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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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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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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br />
==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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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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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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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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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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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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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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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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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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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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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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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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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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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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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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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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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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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B3%B4%EB%9F%89(%EC%8A%B9%EB%A0%A4)보량(승려)2024-03-01T00:20:17Z<p>Jwseo21: </p>
<hr />
<div>보량(寶亮)<br />
<br />
출생 - 사망 444년 ~ 509년<br />
<br />
남북조시대 때의 승려. 동래(東萊, 山東 掖縣)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12살 때 청주(靑州) 도명법사(道明法師)에게 출가하고 경론(經論)을 배웠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남쪽으로 경읍(京邑)에 이르러 중흥사(中興寺)에 머무르며 선사(禪思)에 전념했다. 그 때 제(齊)나라 경릉문선왕(竟陵文宣王)이 스님의 도예(道譽)를 듣고 직접 거처로 찾아와 법장(法匠)이 되기를 요청했다. 얼마 뒤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면서 『열반(涅槃)』과 『성실(成實)』, 『법화(法華)』, 『무량수(無量壽)』 등 경전을 강론했는데, 변설이 종횡으로 뻗어 막힘이 없었다.<br />
<br />
또 보지(寶誌)와 교유하면서 납의(納衣)를 받았다. 양(梁)나라 때도 무제(武帝)의 존경을 받았다. 천감(天監) 8년(509)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열반경집해(涅槃經集解)』 7권을 편찬하니 무제가 직접 서문을 써 주었다. 8년 10월 영미사에서 입적했고, 세수(世壽) 66세다. 문선왕이 스님의 초상을 그려 보홍사(普弘寺)에 두었다. 제자에 장엄사(莊嚴寺) 승민(僧旻)과 광택사(光宅寺) 법운(法雲), 영근사(靈根寺) 승천(僧遷) 등이 있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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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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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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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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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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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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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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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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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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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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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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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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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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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9B%90%EB%AC%98(%EC%86%A1%EB%82%98%EB%9D%BC%EA%B3%A0%EC%8A%B9)원묘(송나라고승)2024-03-01T00:18:17Z<p>Jwseo21: </p>
<hr />
<div>원묘(原妙), yuán miào<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오강(吳江) 사람으로 속세의 성은 서(徐)이고, 호는 고봉(高峰)이다. 송말원초(宋末元初)의 고승으로 15세에 가화(嘉禾) 민인사(密印寺) 법주(法住)선사에게 출가하여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일찍이 천태교의(天台教義)를 익히고, 20세에 교종(教宗)을 버리고 선종(禪宗)에 입문했다. 항주(杭州) 정자사(淨慈寺)에서 단교묘륜(斷橋妙倫)선사와 설암조흠(雪岩祖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 강절(江浙) 일대에서 수행하다가 조흠(祖欽)선사를 따라 천녕사(天寧寺)에 머물렀다가 홀로 임안(臨安) 용정산(龍須山)에서 고행수행을 했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 사자암(師子岩)에서 작은 방을 짓고 거주하면서 호를 사관(死關)이라고 했다. 1291년 원묘선사에 머물고 있는 봉우리 아래에 대각선사(大覺禪寺)가 건립되었고, 사방에서 수 만 명의 불도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외국의 승려들도 있었고, 원묘선사를 ‘고봉고불(高峰古佛)’이라고 존칭하였다. 저서로 《고봉원묘선사어록(高峰元妙禪師語錄)》이 있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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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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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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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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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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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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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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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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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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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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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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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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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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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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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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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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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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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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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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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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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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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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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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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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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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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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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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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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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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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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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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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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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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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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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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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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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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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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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2%B4%EA%B5%AC%EA%B8%B0(%ED%9D%AC%EA%B3%A1)살구기(희곡)2024-03-01T00:15:54Z<p>Jwseo21: </p>
<hr />
<div>살구기(殺狗記)<br />
<br />
중국 명대(明代)의 희곡.<br />
<br />
서진(徐) 작. 원대(元代)의 잡극(雜劇) 《살구권부(殺狗勸夫)》에 따른다. 동경(東京)의 부호 손화(孫華)가 주야로 주색에 빠지고 건달들과 어울리자, 성실한 동생 손영(孫榮)이 못마땅하여 집에서 내쫓는다. 손화의 처 양씨(楊氏)는 형제간의 불화를 우려하던 중 좋은 꾀가 떠올라, 개를 죽이고 사람의 옷을 입혀 문전에 버려 두었다. 한밤중에 술에 취해 귀가한 손화는 이것을 피살자로 오인하고, 살인혐의를 받을 것이 두려워 아내의 권고대로 건달들에게 시체의 처리를 부탁한다.<br />
<br />
그러나 무정하게 거절당하고, 급한 김에 평소에 학대만 일삼던 동생에게 부탁을 했더니 쾌히 승낙한다. 비로소 눈이 뜬 손화는 동생 손영과 의좋게 지내게 되었는데, 건달들이 손화를 살인죄로 고소한다. 그러나 검시한 결과 진상이 밝혀져, 건달들은 처벌되고, 손영과 양씨는 표창을 받는다. 《형차기(荊釵記)》 《백토기(白兎記)》 《배월정(拜月亭)》와 더불어 4대 남희(南戱)라 일컬어지며, 초기 남곡(南曲)의 대표작품 가운데 하나이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br />
==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br />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br />
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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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9B%90%EB%AC%98(%EC%8A%B9%EB%A0%A4)원묘(승려)2024-03-01T00:13:36Z<p>Jwseo21: </p>
<hr />
<div>원묘(原妙)<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남송 때 임제종(臨濟宗) 승려. 강소(江蘇) 오강(吳江)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호는 고봉(高峰)이다. 15살 때 체발(剃髮)하고, 17살 때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 법주(法住)에게 배웠다. 처음에 천태(天台)를 익혔다가 바꿔 참선(參禪)하고 먼저 단교묘륜(斷橋妙倫)에게 나갔다. 나중에 설암조흠(雪巖祖欽)을 참례(參禮)하여 심법(心法)을 얻었다. 함순(咸淳) 2년(1266) 임안(臨安) 용수사(龍鬚寺)에 은거했다. 5년(1269) 우연히 베개를 당기다가 땅에 떨어졌는데 그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 10년(1274) 무강(武康) 쌍계봉(雙髻峰)에 머물렀다. 지원(至元) 16년(1279)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峰)에 올라 사자(獅子)와 대각(大覺) 두 사찰을 여니 제자 수백 명에 수계자(受戒者)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정원(元貞) 원년 분향(焚香)한 뒤 게송(偈頌)을 말하고 좌화(坐化)했고, 세수(世壽) 58세다. 시호(諡號)는 보명광제선사(普明廣濟禪師)다. 저서에 『어록(語錄)』 2권이 있다. 제자로 명본(明本) 등이 있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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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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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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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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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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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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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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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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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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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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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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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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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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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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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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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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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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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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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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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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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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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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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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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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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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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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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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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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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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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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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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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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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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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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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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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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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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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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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AC%98%EB%A5%9C(%EC%8A%B9%EB%A0%A4)묘륜(승려)2024-03-01T00:10:46Z<p>Jwseo21: </p>
<hr />
<div>묘륜(妙倫)<br />
<br />
출생 - 사망 1201년 ~ 1261년<br />
<br />
남송 때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 승려. 절강(浙江) 황암송산(黃巖松山)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호는 송산자(松山子) 또는 단교(斷橋)다. 18살 때 영가(永嘉) 광자원(廣慈院)에서 출가했다. 사방을 떠돌다가 서암사(瑞巖寺) 곡원원도(谷源源道)를 참알(參謁)하고 깨달은 바 있었다. 나중에 설두산(雪竇山)에 가 무준사범선사(無準師範禪師)를 뵙고 그 법을 이었다. 순우(淳祐) 원년(1241) 대주(臺州) 기원사(祇園寺)에 들어갔고, 그 후 서암(瑞巖) 정토선사(淨土禪寺)와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 임안(臨安) 정자사(淨慈寺) 등에 머물렀다. 경정(景定) 2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61세다. 시자(侍者) 문보(文寶)와 선정(善靖)이 『단교화상어록(斷橋和尙語錄)』 2권을 편찬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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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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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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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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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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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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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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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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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br />
==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br />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br />
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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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3%A0%EB%B4%89(%EC%8A%B9%EB%A0%A4)고봉(승려)2024-03-01T00:08:55Z<p>Jwseo21: </p>
<hr />
<div>고봉(高峰)<br />
<br />
출생 - 사망 1238년 ~ 1295년<br />
<br />
원나라 때의 승려.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이름은 원묘(原妙)며,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이다. 15살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했고, 17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살 때부터 천태(天台)의 교상(敎相)을 공부하다가 20살 때 선(禪)을 배워, 3년을 기한하고 정진했지만 도를 깨닫지 못했다. 24살 때 삼탑사(三塔寺)에 있으면서 3월 16일 밤 꿈에 문득 전에 들었던 ‘만법귀일화(萬法歸一話)’ 즉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화두(話頭)가 나타나자, 그 때부터 의심이 일어 60일간을 그 화두에만 몰두했다. 뒷날 같이 자던 도우(道友)가 잠결에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했다. 저서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참선하는 이의 길잡이로 유명하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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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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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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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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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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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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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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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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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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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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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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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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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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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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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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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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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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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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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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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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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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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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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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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A7%80%EC%84%A0(%EC%8A%B9%EB%A0%A4)지선(승려)2024-03-01T00:07:07Z<p>Jwseo21: </p>
<hr />
<div>지선(智詵)<br />
<br />
출생 - 사망 539년 ~ 618년<br />
<br />
수나라 때의 승려. 강소(江蘇) 서주(徐州)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고, 자는 혜성(慧成)이다. 촉(蜀)에서 율(律)을 닦았다. 주무(周武)가 훼불(毁佛)하자 마침내 영남(南嶺)에 은거했다. 수문제(隋文帝)가 즉위하여 정법(正法)을 열면서 석덕(碩德)을 널리 초빙하자 승수(僧首)가 되어 장안(長安)에 가 율장(律藏)을 널리 알렸다. 나중에 촉왕(蜀王) 수(秀)의 요청에 따라 촉으로 돌아와 법취사(法聚寺)에 머물면서 도속(道俗)의 귀의를 받아 대재회(大齋會)를 베풀었다. 나중에 용거산사(龍居山寺)에 은거하고, 다시 촉왕의 요청으로 촉으로 돌아왔다. 무덕(武德) 원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80(또는 83)세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br />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br />
==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br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br />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br />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br />
기자조선의 영역<br />
<br />
<br />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br />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br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br />
<br />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br />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br />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br />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br />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br />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br />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br />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br />
<br />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br />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br />
<br />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br />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br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br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br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br />
<br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br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br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br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br />
==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AC%B8%EC%97%B4(%EC%8A%B9%EB%A0%A4)문열(승려)2024-03-01T00:05:21Z<p>Jwseo21: </p>
<hr />
<div>문열(文悅)<br />
<br />
출생 - 사망 998년 ~ 1062년<br />
<br />
송나라 때 임제종(臨濟宗) 승려. 강서(江西) 남창(南昌)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7살 때 용흥사(龍興寺)에서 체발(剃髮)하고, 19살 때 여러 지역을 유람했다. 균주(筠州, 江西)에서 대우수지(大愚守芝)를 참알(參謁)하고 개오(開悟)한 뒤 그 법을 이었고, 8년 동안 모셨다. 수지가 입적한 뒤 다시 여러 곳을 다녔는데, 동안원(同安院) 혜남(慧南)을 참알하여 수좌(首座)가 되었다. 취암사(翠巖寺)와 남악법륜사(南嶽法輪寺) 등에서 주지를 지냈고, 나중에 다시 남악운봉(南嶽雲峰)에 살아 운봉문열(雲峰文悅)로 불리기도 한다. 가우(嘉祐) 7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65세다. 『어록(語錄)』 2권이 전한다.<br />
<br />
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br />
<br />
<br />
<br />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br />
<br />
[[서씨]](徐氏xúshì)는<br />
<br />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br />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br />
<br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br />
<br />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br />
<br />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br />
<br />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br />
<br />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br />
<br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br />
<br />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br />
<br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br />
<br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br />
<br />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br />
<br />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br />
<br />
<br />
<br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br />
<br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br />
<br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br />
<br />
<br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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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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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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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후손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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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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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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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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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영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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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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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br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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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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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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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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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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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br />
<br />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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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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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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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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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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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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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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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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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분파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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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br />
<br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br />
<br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br />
<br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br />
<br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br />
<br />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br />
<br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br />
<br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br />
<br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br />
<br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br />
<br />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br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br />
<br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br />
<br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br />
<br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br />
<br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br />
<br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br />
<br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br />
<br />
== [[부여]]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br />
<br />
[[여현]]<br />
<br />
[[여울]]<br />
<br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br />
<br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br />
<br />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br />
<br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br />
<br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br />
<br />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br />
<br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br />
<br />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br />
<br />
== 백제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br />
<br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br />
<br />
[[우복]](優福)<br />
<br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br />
<br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br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br />
<br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br />
<br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br />
<br />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br />
<br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br />
<br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br />
<br />
[[부여기]]<br />
<br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br />
<br />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br />
<br />
[[부여력]](夫餘歷)<br />
<br />
[[부여고]](夫餘固)<br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br />
<br />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br />
<br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br />
<br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br />
<br />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br />
<br />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br />
<br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br />
<br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br />
<br />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br />
<br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br />
<br />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br />
<br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br />
<br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br />
<br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br />
<br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br />
<br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br />
<br />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br />
<br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br />
<br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br />
<br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br />
<br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br />
<br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br />
<br />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br />
<br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br />
<br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br />
<br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br />
<br />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br />
<br />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br />
<br />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br />
<br />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br />
<br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br />
<br />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br />
<br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br />
<br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br />
<br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br />
*[[약목]](若木)<br />
**[[서구왕]](徐駒王)<br />
***[[서구군]](徐句君)<br />
****[[서왕 차우]](徐王次又)<br />
*****[[서언왕]](徐偃王)<br />
******[[서왕 자우]](徐王𠂔又)<br />
*******[[서왕 자선]](徐王子旋)<br />
********[[서왕 지후]](徐王旨後)<br />
*********[[서왕 계량]](徐王季糧)<br />
**********[[서왕 경]](徐王庚)<br />
***********[[서왕 의초]](徐王義楚)<br />
************[[서왕 장우]](徐王章禹)<br />
<br />
== 부여왕 계보 ==<br />
*[[동명왕]](東明王)<br />
**[[해모수왕]](解慕漱王)<br />
***[[부루왕]](解夫婁王)<br />
****[[금와왕]](解金蛙王)<br />
*****[[대소왕]](解帶素王)<br />
******[[갈사왕]](解曷思王)<br />
*******[[시왕]](解始王)<br />
********[[부태왕]](解夫台王)<br />
*********[[우태]](解尉仇台王)<br />
**********[[간위거왕]](解簡位居王)<br />
***********[[마여왕]](解麻余王)<br />
************[[의려왕]](解依慮王)<br />
*************[[의라왕]](解依羅王)<br />
**************[[현왕]](玄王)<br />
***************[[여울]](扶餘蔚王)<br />
****************[[잔왕]](孱王)<br />
<br />
== 백제왕 계보 ==<br />
*[[온조왕]](溫祚王)<br />
**[[다루왕]](多婁王)<br />
***[[기루왕]](己婁王)<br />
****[[개루왕]](蓋婁王)<br />
*****[[초고왕]](肖古王)<br />
******[[구수왕]](仇首王)<br />
*******[[사반왕]](沙伴王)<br />
********[[고이왕]](古爾王)<br />
*********[[책계왕]](責稽王)<br />
**********[[분서왕]](汾西王)<br />
***********[[비류왕]](比流王)<br />
************[[계왕]](契王)<br />
*************[[근초고왕]](近肖古王)<br />
**************[[근구수왕]](近仇首王)<br />
***************[[침류왕]](枕流王)<br />
****************[[진사왕]](辰斯王)<br />
*****************[[아신왕]](阿莘王)<br />
******************[[전지왕]](腆支王)<br />
*******************[[구이신왕]](久爾辛王)<br />
********************[[비유왕]](毗有王)<br />
*********************[[개로왕]](蓋鹵王)<br />
**********************[[문주왕]](文周王)<br />
***********************[[삼근왕]](三斤王)<br />
************************[[동성왕]](東城王)<br />
*************************[[무령왕]](武寧王)<br />
**************************[[성왕]](聖王)<br />
***************************[[위덕왕]](威德王)<br />
****************************[[혜왕]](惠王)<br />
*****************************[[법왕]](法王)<br />
******************************[[무왕(백제)|무왕]](武王)<br />
*******************************[[의자왕]](義慈王)<br />
********************************[[부여융]](扶餘隆)<br />
*********************************원손[[서신일]](徐神逸)<br />
**********************************[[서필]](徐弼)<br />
***********************************[[서희]](徐熙)<br />
************************************[[서유걸]](徐惟傑)<br />
*************************************[[서존]]서존(徐存)<br />
<br />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br />
<br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br />
<br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br />
<br />
== 서씨 분파 ==<br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br />
<br />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br />
<br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br />
[[https://open.kakao.com/o/gBQB1q6c]]<br />
<br />
<br />
<br />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br />
<br />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br />
<br />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br />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br />
<br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br />
<br />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br />
<br />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br />
<br />
== [[서광(동진)|서광]](徐廣) ==<br />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br />
<br />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br />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br />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br />
<br />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br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br />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br />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br />
<br />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br />
중국 송나라의 문신.<br />
<br />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br />
<br />
== [[서수휘]](徐壽輝) ==<br />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br />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br />
<br />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br />
<br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br />
<br />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br />
<br />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br />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br />
<br />
== [[서특립]](徐特立) ==<br />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br />
<br />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br />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br />
<br />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br />
중화민국 군벌<br />
<br />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br />
중화민국 국방부장관<br />
<br />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br />
청말민초의 정치인<br />
<br />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br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br />
<br />
== [[서극(중국)|서극]](徐克) ==<br />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br />
<br />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br />
대만 배우<br />
<br />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br />
중국 가수<br />
<br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br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br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br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br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br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br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br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br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br />
<br />
== [[곡창]](鹄蒼) ==<br />
곡창(鹄蒼)<br />
<br />
세계 최초 개이름.<br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br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br />
<br />
== 泰山(태산)=[[서산]](徐山) ==<br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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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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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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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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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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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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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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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병]](月餠) ==<br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br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br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br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br />
<br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br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br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br />
<br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br />
<br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br />
<br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br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br />
<br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br />
<br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br />
<br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br />
<br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br />
<br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br />
<br />
== [[토루]](土樓) ==<br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br />
<br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br />
<br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br />
<br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br />
<br />
== [[고려도경]](高麗圖經) ==<br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br />
<br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br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br />
<br />
== [[고군산군도]] ==<br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br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br />
<br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br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br />
<br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br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br />
<br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br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br />
<br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br />
<br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br />
<br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br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br />
<br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br />
<br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br />
<br />
== [[서불과차]](徐不過此) ==<br />
<br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br />
<br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br />
<br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br />
<br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br />
<br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br />
<br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br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br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br />
<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br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br />
<br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br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br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br />
<br />
== [[이섭대천]](利涉大川) ==<br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br />
<br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br />
<br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br />
<br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br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br />
<br />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br />
<br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br />
<br />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br />
<br />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br />
<br />
<br />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br />
<br />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br />
<br />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br />
<br />
== 같이 보기 ==<br />
* [[이천 서씨]] <br />
* [[대구 서씨]]<br />
* [[달성 서씨]]<br />
* [[부여 서씨]]<br />
* [[연산 서씨]]<br />
* [[남양 서씨]]<br />
* [[당성 서씨]]<br />
* [[봉성 서씨]]<br />
* [[절강 서씨]]<br />
* [[중국 서씨]]<br />
* [[일본 서씨]]<br />
* [[몽고서씨]]<br />
* [[러시아서씨]]<br />
* [[튀르키예서씨]]<br />
* [[멕시코서씨]]<br />
* [[불가리아서씨]]<br />
* [[중앙아시아서씨]]<br />
* [[카자흐스탄서씨]]<br />
* [[우즈베키스탄서씨]]</div>Jwseo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