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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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문(坦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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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탄문
한자 坦文
생몰년 900년(효공왕 3)-975년(광종 26)
시호 법인(法印)
법호 탄문(坦文)
탑호 보승(寶乘)
대오(大悟)
성씨 고씨(高氏)
출신지 경기도 광주(廣州)
승탑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승탑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정의

고려 초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은 900년(효공왕 3)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고씨(高氏)이다. 일찍이 선조 때부터 덕을 쌓은 훌륭한 집안이었으며 아버지도 고을을 잘 다스린 선비였다.[1]

Quote-left.png 대사는 법호가 탄문(坦文)이요 자는 대오(大悟)이며, 속성은 고씨(高氏)요, 광주(廣州) 고봉(高烽;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척(陟)이니, 덕을 심은 것이 끝이 없었고 공을 이룸에 넉넉함이 없었다. 일찍이 그 지역의 우두머리가 되어 마침내 세 가지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빛냈다. 아버지는 능(能)이니, 그 고을의 이름난 가문이며 좋은 가정의 번성한 집안으로 드디어 가풍(家風)의 경사를 이어 받고 성하게 읍장(邑長)의 높은 이가 되었다.

...(중략)...

건녕(乾寧) 7년(900, 효공왕 4) 세차(歲次) 경신(庚申) 가을 8월 14일 하늘이 밝아 올 때 대사가 탄생하였다. 대사는 태(胎)가 목을 둘러 드리운 것이 마치 방포(方袍; 비구가 입는 가사)를 입혀 놓은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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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4-2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탄생설화

어머니 전씨(白氏)는 꿈에서 범승(梵僧)을 만나고 국사를 잉태하였다.

Quote-left.png 어머니는 전씨(白氏)이니, 오직 훌륭한 어머니의 마음을 닦고 신통스러운 아들 얻기를 원하여 아내의 도를 받들어 행하고 어머니의 위의를 삼가 지켰다. 꿈에 어떤 인도 승려를 보았는데 그가 금빛 나는 기이한 과실을 주어 이로 인하여 임신을 하였다. 낳은 달이 다 되어 아버지 역시 꿈을 꾸었는데, 법당(法幢; 幢을 달기 위한 장대)이 마당 가운데에 세워져 있고 범패(梵旆; 당간에 다는 旗)가 그 위에 걸려 있으면서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햇빛을 받으며 나부끼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 모여 쳐다보는 것이 담을 두른 듯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출가수행

탄문은 5세 때 출가하여 향산(鄕山)에 있는 대덕화상(大德和尙)을 찾아갔으며,[2] 원효(元曉)의상(義想)이 살던 향성산(鄕聖山)의 옛 절터에 암자를 지어 수년간 수행하였다.[3] 신엄대덕(信嚴大德)장의사(莊義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화엄경』을 수학하며 독송하였다. 914년(신덕왕 3) 15세에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Quote-left.png 나이 겨우 5세에 속세를 벗어나려는 심정이 도타웠고 티끌세상을 떠날 뜻이 있었다. 자취를 불문에 의탁하고 마음을 절에 붙이기를 원하여 먼저 어민에게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옛날의 꿈을 생각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좋다. 오는 세상을 제도하기를 원한다. 내 다시는 문에 기대어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이후에 아버지를 뵈니 아버지도 기뻐하며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였다. 곧 머리를 깎고 부모님과 헤어졌으며, 마음을 닦고 불법을 배우기 위해 향산(鄕山)에 있는 큰 절의 대덕화상(大德和尙)을 뵈었다. 화상은 대사의 풍채가 기이한 상이고 지혜가 남다른 자태임을 보고서 말하기를, "나이는 어린데 이미 노성한 덕을 품고 있구나. 자네 같은 자가 나를 스승으로 삼는 것은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고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나은 곳으로 가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승려 중에 참된 자는 반드시 방문하고, 자취 중에 오래된 곳은 필히 찾아가 보고자 하여, 마침 떠나려고 뵈니 말하기를, "옛 늙은이들이 서로 전래 말하기를 향성산(鄕聖山) 안에 옛 절터가 있으니 옛날에 원효보살(元曉菩薩)]]과 의상대덕(義想大德)이 함께 지내면서 쉬던 곳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미 이 성스러운 자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어찌 저 현묘한 터에 가서 선(善)을 닦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옛 터에 초막을 짓고서 분주히 움직이는 마음을 잡아 가두고 안주하지 못하는 생각을 잡아매며, 발을 쉬고 마음을 재계하면서 수년을 보냈다. 당시 사람들이 성사미(聖沙彌)라 불렀다.

대사는 신엄대덕(信嚴大德)이 장의산사(莊義山寺; 지금의 종로구 세검정 부근에 있던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한다는 말을 들었다. 명공(名公)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진불(眞佛)의 법손이 되기를 원하여 특별히 그 절로 찾아갔다. 겨우 제자가 되자마자 곧 『화엄경』을 독송하였는데, 1권을 하루에 외우는데 빠뜨려 남기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엄공(嚴公)이 그릇이라 여겨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옛 스승이 말하기를, '현명한 이는 하루에 30명의 사나이를 대적하고 뒤에 출발했으나 먼저 이른다'라고 했는데, 장차 이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으니, 과연 '정성을 다해 마음에 남기어 잃지 아니 한다'는 말과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공은 배나 되었다'라는 말을 징험한 것이다. 용수(龍樹)가 사람을 교화한 설법으로 바로 심전(心傳)을 얻게 되었으니, 부처가 도를 강론한 말씀이 어찌 눈과 귀를 수고롭히랴.

비록 그러하나 묘한 깨달음에는 오히려 율의(律儀)가 있는 것이니, 나이 15세에 드디어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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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활동

탄문은 계법을 잘 실천하고 수행 능력이 뛰어나 고려 태조로부터 별화상(別和尙)으로 불렸다. 926년(태조 9) 왕후 유씨(劉氏)가 잉태하였을 때 왕의 부탁으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왕자(후에 광종)가 태어나자 태조는 법력을 빌려 아들을 낳았다며 탄문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5]

Quote-left.png 태조는 대사가 승려들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앞으로 크게 깨달음을 빛낼 지혜의 가지임을 듣고서 명을 내려 말하기를, "이미 어려서 남다름을 드러내어 성사미(聖沙彌)라 불리었으니, 마땅히 금일에는 기이함을 나타내어 별화상(別和尙)이라 칭해져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르되, '명예를 피하려 해도 명예가 나를 따르고 명성을 피하려 해도 명성이 나를 쫓는다'는 것이다.

...(중략)...

동광(同光) 병술년(926, 태조6) 태조는 유왕후가 임신하여 특별한 꿈을 꾸었으므로 대추 열매 같은 마음에 의지하여 옥같이 넉넉한 영명스러운 자질을 낳고자 하여, 드디어 대사를 청하여 법력을 기원하였다. 이에 금로(金鑪)에 향을 불사르고 옥축(玉軸)에서 불경을 열어 남자 아이 낳기를 원하고 순산하기를 바랬다. 후일 광녀 징험해 보니 왕자(王者)가 될만한 상으로 기이한 자태였으며 천자 같은 얼굴은 특이한 관상이었다. 단정히 궁궐에 거처하면서 나라를 이어받아 지키게 되니 이 분이 바로 대성왕(大成王) 광종(光宗)이시다. 실로 대사는 부처를 터득한 마음이 깊고 하늘을 받드는 힘이 두터워서 신묘(神妙)한 감응(感應)은 복이 자손에게 드리워지기를 빌었고 유현(幽玄)한 공적(功績)은 복이 밝은 덧 잇기를 원했다. 태조가 심히 좋게 여겨 편지를 띄워 노고를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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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탄문은 구룡산사(九龍山寺)에서 화엄(華嚴)을 강론하고, 별대덕(別大德)이 되었다.[6]

Quote-left.png 이후 구룡산사(九龍山寺)로 옮겨 머물면서 『화엄경』을 강설하였는데 뭇 새가 방 앞에 둘러 있었고 호랑이가 뜰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문인들이 등그러니 둘러서서 보고 떠니 대사는 편안한 얼굴로 태연히 말하기를, "너희들은 시끄럽게 하지 마라. 이것들은 진기한 날짐승이요 달리는 짐승으로 법에 귀의하고 승려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봄 대사는 행실(行實)은 풀에 묶인 비구(比丘)의 마음을 닦았고 덕(德)은 화엄의 수장들 중 으뜸이 되어 별대덕(別大德)에 제수되었다. 이에 배우는 자들을 잘 가르치니 이로부터 배움을 청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실로 문도가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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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6-2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942년(태조 25) 염주(鹽州)와 백주(白州) 지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들판의 곡식을 해치자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외우니 벌레가 사라져 풍년이 들었다.[7]

Quote-left.png 천복(天福) 7년(942, 태조 25) 가을 7월 염주(鹽州;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와 백주(白州;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배천) 두 주의 땅이 메뚜기 떼로 농사에 피해를 입었다. 대사가 법주(法主)가 되어 『대반야경(大般若經)』을 강설하니 한 마디 겨우 법을 연설하자마자 온갖 벌레들이 더 이상 재앙이 되지 못했다. 이 해에 풍년이 들어 도리어 만물이 태평해졌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태조가 죽고 2대 혜종, 3대 정종 때에도 탄문은 왕실을 위한 법회와 사경(寫經)을 계속하였으며,[8] 혜종정종이 지극히 공경하여 예로써 받들었다.[9]

Quote-left.png 혜종(惠宗)이 왕위를 이어 『화엄경』삼본을 사경(寫經)하여 일이 끝나자 천성전(天成殿)에 법연을 제대로 베풀고서 대사를 청하여 그 경을 강설 열람하고 겸하여 경찬불사(慶讚佛事)를 펴서 보배로운 게송을 널리 선양하고 꽃다운 인연을 길이 맺었다. (일이 끝나자) 대사에게 (『화엄경』삼본을) 붙여 구룡산사에 보내 드렸고 별도로 법의를 드리고 진귀한 차를 폐백으로 드렸으며 선향(仙香)을 딸려서 드렸다.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드디어 구룡산사에 설법의 자리를 두고 대사를 법주로 삼았다. (대사는) ……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많은 복이 있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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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968년(광종 19)에 처음으로 국사(國師)·왕사(王師)의 2사(師) 제도가 실시되자 혜거(惠居)국사로, 탄문을 왕사로 삼아 귀법사(歸法寺)에 머무르게 하였다.[10]

Quote-left.png 이 해 겨울 10월에 대왕은 대사가 석문(釋門)의 종주(宗主)요 험한 길에서 이끄는 스승으로서 불경(佛經)이 비밀스런 종지를 연설하고 우리나라의 ……을 교화한다고 하여, 이에 오랜 덕망을 높이 숭상하며 큰 자비에 깊이 감응하여 승려와 속인의 사신을 보내 소(疏)를 받들어 왕사(王師)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대사가 잉에 사양하여 말하기를, "마음 구슬은 밝지 않고 눈 거울은 달리지 않았으니 승(僧)이 어찌 감히 그릇되게 왕사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왕이 이에 말하기를, "덕 높으신 스님을 사모하고 있으니 어느 날엔들 잊겠습니까. 장차 혼돈의 근원을 열고자 진실로 공동산(崆峒山)의 청을 간절히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승은 부처에 귀의하고자 하는 데에만 마음이 있을 뿐 진실로 임금을 위하는 데는 무력합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지나치게 …… 입었으므로 굳게 사양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상(太相) 김준암(金遵巖) 등으로 하여금 휘호(徽號)를 받들게 하여 왕사홍도삼증대사(王師弘道三重大師)라 하였다. 다음날 대왕이 몸소 내도량으로 가서 절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임금이 되어 나라를 경영하는 방법은 하늘을 본받아 뜻을 기울였고 부처에 의지하여 사람을 교화하는 법도는 바다를 바라보아 마음을 기름지게 했다. 이에 드디어 좋은 말을 드리고 잠계(箴誡)를 베푸니 (대왕은) 법력에 우러러 의지하고 정성스런 마음을 배로 기울여 별도로 계금가사와 아울러 황흑마노염주를 드렸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975년(광종 26)에는 국사가 되어 당시 중요한 사찰 중 하나였던 서산 보원사로 옮겨갔는데,[11] 이때 왕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하였으며, 어의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Quote-left.png (대왕은) 금생(今生)에 만남이 여러 겁(劫)에 걸친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겸손하게 공경을 다하였고 정성스럽게 생각을 말하여, 휘호를 받들어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대사는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했다. 대왕이 마음을 기울여 청하여 머리를 조아려 말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승(僧)이 도를 배웠으되 공은 적고 스승이 되기에는 덕이 엷은데도 오히려 성은을 입은 것이 얕지 않으니 인(仁)을 행하는 마당에 겸할 이유가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은 몸소 도량에 나아가 예복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절하여 국사로 삼고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하고 서신(書紳)의 예를 펴고서 도를 묻고 말을 청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승은 이제 몸이 늙어 허약해서 한적한 자연의 깨끗한 곳에서 쉬고자 합니다. 몸은 절에 돌아가더라도 마음은 궁궐에 있으면서 용안을 우러러 그리워하며 오직 대왕의 복을 빌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감사하며 말하기를, "법운(法雲)이 잇닿아 그늘 드리우고 감로(甘露)가 이어서 내려 제자는 불법의 교화를 입은 것이 멀지 않으니 정성 펴기를 더욱 간절히 합니다."라고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입적

975년(광종 26) 3월, 탄문은 보원사에서 승도들에게 "사람의 노소는 있어도 법에는 선후가 없다"는 유훈(遺訓)을 남기고 나이 76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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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탄문의 입적 소식을 들은 광종은 글로써 조문하고 곡식 등의 공양을 보내어 명복을 빌었으며, 진영 1위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리탑은 가야산 서쪽 능선에 조성되었다. 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종은 탄문을 태자 때부터 섬겨왔으므로, 대사에게 시호를 법인(法印), 탑호를 보승(寶乘)이라 추증하였다.[13] 또한 김정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고, 978년(경종 3) 탑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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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2.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3. 이해준, "탄문", 『디지털서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이해준, "탄문", 『디지털서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탄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이해준, "탄문", 『디지털서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9. 장충식, "탄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장충식, "탄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이해준, "탄문", 『디지털서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탄문",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3.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참고문헌

  • 이지관, "해미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74-116쪽.
  •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장충식, "탄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탄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탄문",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탄문",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이해준, "탄문", 『디지털서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