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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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최치원 초상(운암영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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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崔致遠
 
|한자표기= 崔致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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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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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는데,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아찬(阿飡)]]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ref>윤희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0년 3월 2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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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년 당나라로 건너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으며,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ref>윤희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0년 3월 2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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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황소격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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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과거에 합격한 2년이 지난 무렵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ref>윤희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0년 3월 2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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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ref>윤희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0년 3월 2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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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황소격문]]'은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3220&cid=40942&categoryId=33375 토황소격문]",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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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십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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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8) 2월에 최치원이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이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당나라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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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ref>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해볼 때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다만, 귀족개념에는 진골 독점의 귀족개념이 아니라 6두품과 여타의 대호족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신분의 귀족개념이었을 것이다. 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최치원의 이같은 [[시무십여조|시무책]]은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아찬(阿飡)]]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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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은 이 시무책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아찬(阿飡)]]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때의 신라사회는 이 [[시무십여조|시무책]]을 수용할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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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비명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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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비명|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신라의 불교사를 비롯하여 한문학사·사상사 등 여러 면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은 네 편을 뽑아 엮은 책이다. <ref>최병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11 최치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황토소격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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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비문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보령 성주사지|성주사(聖住寺)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하동 쌍계사|쌍계사(雙磎寺)]]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문경 봉암사|봉암사(鳳巖寺)]]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ref>최병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11 최치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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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ref>최병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11 최치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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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8년 ||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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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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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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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최치원 초상(운암영당).jpg|최치원 초상(운암영당)<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870000,38 운암영당고운선생영정]",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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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최치원 초상(구회당).jpg|최치원 초상(구회당)<ref>피츠, "[http://m.blog.daum.net/by80150/22 << 경주최씨 문창후 고운 최 치 원님 유^^적^^지 >> NO 2.]", <html><online style="color:purple">『다음 블로그 - 崔致遠記念館』<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6년 03월 23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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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최치원 초상(학남서원).jpg|최치원 초상(학남서원)<ref>臥草-조성재,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NATB&articleno=45&categoryId=1&regdt=20081128213813 고운영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다음 블로그 - 강산애드』<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6년 03월 23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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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최치원_표준영정.jpg|최치원 표준영정<ref>"[http://www.kculture.or.kr/korean/portrait/portraitView.jsp?sp_seq=25 최치원]", 선현의 표준영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민족정보마당』<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정보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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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영상===
 
* 고종훈 한국사, "[https://www.youtube.com/watch?v=Xl3wvNv758I (생생 한국사) 최치원]", YouTube, 게시일: 2016년 8월 3일.
 
* 고종훈 한국사, "[https://www.youtube.com/watch?v=Xl3wvNv758I (생생 한국사) 최치원]", YouTube, 게시일: 2016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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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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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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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1327 최치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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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99&cid=59015&categoryId=59015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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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3220&cid=40942&categoryId=33375 토황소격문]",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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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11 최치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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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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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culture.or.kr/korean/portrait/portraitView.jsp?sp_seq=25 최치원]", 선현의 표준영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민족정보마당』<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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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13:04 기준 최신판

최치원(崔致遠)
"운암영당고운선생영정",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대표명칭 최치원
한자표기 崔致遠
생몰년 857년-미상
본관 경주(慶州)
고운(孤雲), 해운(海雲)
출생지 경주(慶州)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시대 통일신라
대표저서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산비명(四山碑銘)
대표직함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최견일(崔肩逸)



정의

신라 하대의 학자이자 문장가.

내용

개요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1]

업적

당나라를 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는데,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阿飡)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2]

868년 당나라로 건너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으며,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3]

토황소격문을 짓다

최치원이 과거에 합격한 2년이 지난 무렵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4]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5]

'토황소격문'은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6]

시무십여조

894년(진성여왕 8) 2월에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이다.[7]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8] 최치원의 이같은 시무책은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9]

진성여왕은 이 시무책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阿飡)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때의 신라사회는 이 시무책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10]

사산비명을 짓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신라의 불교사를 비롯하여 한문학사·사상사 등 여러 면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은 네 편을 뽑아 엮은 책이다. [11]

네 편의 비문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聖住寺)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雙磎寺)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鳳巖寺)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12]

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13]

지식 관계망

  • 최치원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견일 최치원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사산비명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토황소격문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계원필경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시무십여조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최치원 신라 진성여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제가야산독서당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난랑비서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동국18현 최치원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최치원 표준영정 최치원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최치원 초상(구회당) 최치원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최치원 초상(학남서원) 최치원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최치원 초상(운암영당) 최치원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68년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874년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토황소격문을 저술하였다.
886년 계원필경신라 정강왕에게 바쳤다.
894년 신라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사산비명을 저술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치원", 『두산백과』online.
  2.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3.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4.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5.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6. "토황소격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해볼 때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다만, 귀족개념에는 진골 독점의 귀족개념이 아니라 6두품과 여타의 대호족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신분의 귀족개념이었을 것이다.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운암영당고운선생영정",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15. 피츠, "<< 경주최씨 문창후 고운 최 치 원님 유^^적^^지 >> NO 2.", 『다음 블로그 - 崔致遠記念館』online, 작성일: 2016년 03월 23일.
  16. 臥草-조성재, "고운영정", 『다음 블로그 - 강산애드』online, 작성일: 2016년 03월 23일.
  17. "최치원",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최치원", 『두산백과』online.
    •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 "토황소격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치원",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