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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玄陵)이 스님의 입중유학(入中遊學)을 위로하는 한편 더욱 존숭(尊崇)하였고 모든 사람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친견하려 하였다.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에 잠시 은거(隱居)하다가 동해(東海)를 순방하고, 양양 낙산사(洛山寺)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방광(放光)하는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왔다. 공민왕이 세 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스님을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비로소 5월에야 이르렀으므로 국사(國師)로 추대하고,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대지무애(大智無碍) 성상원통(性相圓通) 복▨▨▨▨▨▨▨▨▨▨(福▨▨▨▨▨▨▨▨▨▨) 원응존자(圓應尊者)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요속(寮屬) 관원(官員)을 두어 인장(印章)과 법복(法服)을 헌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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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庚戌年) 9월 현릉(玄陵)이 왕사(王師) 나옹(懶翁)을 청하여 개성 광명사(廣明寺)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제산납자(諸山衲子)를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다. 이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후 경천사(敬天寺) 에 주석하였다. 다음해인 신해년(辛亥年)에 금강산을 순례하는 중, 5월에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며, 그 해 가을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으로 돌아가려고 간청하였다. 임자년(壬子年)부터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전당(殿堂)을 일신 중수하여 완전히 복구하였으니, 대개 이는 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에 화엄종(華嚴宗) 총본산인 부석사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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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일) 22:34 판

천희(千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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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천희
영문명칭 Cheonhui
한자 千熙
생몰년 1307(충렬왕 33)-1382(우왕 8)
시호 진각(普照)
설산(雪山)
천희(千熙)
탑호 대각원조(大覺圓照)
출신지 흥해(興海)
승탑비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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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천희(千熙)요 호는 설산(雪山)이며 흥해(興海) 출신이다. (결락) 구(具) 전리판서(典理判書) 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니, 최씨가 꿈에 큰 배를 보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고, 그 물이 대문(大門) 앞에까지 이르러 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였다. 만삭이 됨에 또 백학(白鶴)이 그의 복부를 쪼아 청첩가사(靑帖袈裟)를 입은 한 스님이 뛰어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 후 대덕(大德) 정미년(丁未年) 5월 21일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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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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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나이 13살 때 화엄종(華嚴宗)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沙彌)스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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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법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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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甲辰年) 가을 우리 스님께서 배를 타고 중국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내가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규보(跬步)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그리하여 스님께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렀다. 그 날 밤 몽산(蒙山)의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 곧 영각(影閣)에 방광(放光)함이 있었다. (결락) 인(人). 의발심이지(衣鉢心異之). 스님을 모시고 방장실(方丈室) 앞에 다다르니, 문에 자물쇠가 매우 견고(堅固)하게 잠겨져 있었다. 삼전어(三轉語)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스님께서 그 글을 읽고 설명하니 자물쇠에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를 본 대중(大衆)은 모두 숙연(肅然)하였다. 실중(室中)에 궤(樻)가 있는데, 사(師) (결락) 그 속에 주봉(柱棒)과 불자(拂子)가 있었다. 그것을 들어 나에게 주려고 하니 이를 본 대중들은 더욱 탄복하였다. 또 칠(漆)을 한 자그마한 궤가 있었는데, 이는 잠겨져 있지 않고 다만 상면(上面)에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여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벌을 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절성(浙省)승상(丞相) 장대위(張大尉)의 제(弟) (결락) “그 속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하였으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문서(文書)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그것을 열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열어 볼 수 있습니다” 하고, 곧 열어보니 과연 2질(秩)의 문서가 있었다. 그 중 (결락) 하나에는 군도(群盜)가 삼보(三寶)를 파괴하여 마침내 절이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승상(丞相)이 노(怒) (결락) “해외에서 온 사람을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나는 우리 불법(佛法)을 부지런히 배울 뿐이라” 하고, 받았던 몽산(蒙山)의 의물(衣物)을 그냥 두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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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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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丙午年) 봄 만봉(萬峯)을 성안사(聖安寺)로 찾아 갔으나, 만봉은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만봉(萬峯)이 이르기를 “고려노화상(高麗老和尙)이 (결락) 입시(入時)가 없거늘 어찌 출시(出時)가 있겠습니까” 하니, 만봉(萬峯)이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으나, 누가 친절한 마음으로 나의 병을 간호(看護)해 주겠는가”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으로 그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만봉이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불문(不聞) (결락)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에 이르니, 어떤 스님이 그곳에 머물기를 청(請)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떠났다. 만봉회상(萬峯會上)의 어느 스님이 만봉이 삼경(三更)에 스님에게 전해준 의(衣)·봉(棒)을 빼앗고자 이날 밤에 오강(吳江)까지는 따라왔으나, 승방(僧房)에는 미치지 못하고 되돌아갔으니, 그 스님의 속성(俗姓)은 마씨(馬氏)였다. 우는 소리를 듣고 (결락)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오호라! 몽산(蒙山)이 휴휴암(休休庵)에서 방광(放光)하여 앞의 일을 현몽(現夢)으로 보여준 것이고, 만봉(萬峯)이 삼경(三更)에 전법(傳法)한 것은 후일(後日)을 경계한 것이다. 미래(未來)의 일을 훤히 내다보시고 묘(妙)하게 유촉(遺囑)하였으니, 스승과 제자간의 도(道)는 시간적인 고금(古今)과 공간적인 하이(遐邇)에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석씨지(釋氏之)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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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귀국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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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玄陵)이 스님의 입중유학(入中遊學)을 위로하는 한편 더욱 존숭(尊崇)하였고 모든 사람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친견하려 하였다.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에 잠시 은거(隱居)하다가 동해(東海)를 순방하고, 양양 낙산사(洛山寺)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방광(放光)하는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왔다. 공민왕이 세 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스님을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비로소 5월에야 이르렀으므로 국사(國師)로 추대하고,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대지무애(大智無碍) 성상원통(性相圓通) 복▨▨▨▨▨▨▨▨▨▨(福▨▨▨▨▨▨▨▨▨▨) 원응존자(圓應尊者)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요속(寮屬) 관원(官員)을 두어 인장(印章)과 법복(法服)을 헌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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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庚戌年) 9월 현릉(玄陵)이 왕사(王師) 나옹(懶翁)을 청하여 개성 광명사(廣明寺)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제산납자(諸山衲子)를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다. 이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후 경천사(敬天寺) 에 주석하였다. 다음해인 신해년(辛亥年)에 금강산을 순례하는 중, 5월에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며, 그 해 가을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으로 돌아가려고 간청하였다. 임자년(壬子年)부터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전당(殿堂)을 일신 중수하여 완전히 복구하였으니, 대개 이는 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에 화엄종(華嚴宗) 총본산인 부석사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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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상현, 「眞覺國師 千熙의 佛敎史的 位相」,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57-66쪽.
  • 최연식, 「眞覺國師 千熙의 生涯와 思想」,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67-90쪽.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91-116쪽.
  • 박상국, 천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수원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488-505쪽.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